버들가지 살랑살랑

by 김밍키

친구가 이 먼 곳까지 놀러 온 일은 두 번째였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또 기차를 타고. 뚜벅이인 그녀는 이 힘든 여정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수원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익숙한 얼굴이 낯선 배경에 놓이니, 괜히 반가움이 두 배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빈손이 아니었다.

따로 말하지 않았는데도 남편의 생일주간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선물 한 뭉텅이를 들고 나에게 건넨다.


우리는 곧장 행궁동으로 향했다.

오전에 흐려서 걱정이었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맑게 갰다. 바람은 부드러웠고, 햇볕은 따뜻했다.

날씨 좋은 주말은 늘 그렇듯 거리는 조금 붐볐지만, 그마저도 활기를 불어주었다.

걷다가 멈추고, 꽃이 피어 있는 골목마다 감탄을 하며 사진을 찍고, 또 걸었다.


버드나무가 길 양쪽으로 흐드러지게 늘어져 있었다.

푸른 잎들은 바람결을 따라 유연하게 흔들렸고, 잎사귀 하나하나는 실오라기처럼 가늘고 부드러웠다.

예로부터 버들가지는 아름다운 여인에 비유되었다고 한다. 바람을 머금은 그 녹연은 확실히 한 사람의 몸짓처럼 우아했다.

버드나무의 ‘화창한 봄날’이라는 꽃말이 찰떡같이 잘 어우러지는 풍경이었다.


작은 서점을 들어갔다. 책 구경을 하다가 갑자기 그녀는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들뜬 목소리로 책 표지 하나를 가리킨다.

《어느 날 문득, 잘 살고 싶어졌다》

“어? 나 잘 살고 싶은데?”

그 말이 귀여우면서도 마음에 맺혔다.

잘 산다는 게 뭔데?




치킨집에 들러 포장을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친구가 말했다.

“내가 살게. 정호 생일 주간이잖아.”

우리가 말릴 틈도 없이 막무가내로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미는 그녀. 그 뒷모습을 멋쩍게 바라보다가 그녀가 꼭 조금 전 본 버들가지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실업인구가 몇 백만 명에 육박하는 시대에 쉼 없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늘 저리 세력을 부리는 것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건 분명 치킨을 얻어먹었다고 나온 감상은 아니었다. 그녀는 버들가지 같았다.


늦은 오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의 생일상은 그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웠다. 노릇하게 튀긴 옛날치킨, 쫄깃한 광어회, 부드러운 육회 한 접시.

홀케이크는 극구 사양한 까닭에 초는 크지 않은 호두파이 조각 위에 꽂았다.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소박한 생일파티를 한다.

해죽이 웃는 그의 표정도 한 접시 올라간다.


밤이 깊어지고,

남편은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별말 없이 우리에게 방을 내줬다.

친구와 나는 안방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참 좋은 하루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침잠에 묻혀 있는 나를 친구가 조심스럽게 깨운다.

“나 혼자 구봉산 올라갔다 올게. 좀 더 자고 있어. “

여윈잠을 잔 탓에 이불과 한몸이 되었고 일어나기 힘들었다. 그녀는 정말 혼자 나갔다가 한 시간쯤 지나서 돌아온다.

“산 너무 낮길래 내려와서 공원 트랙도 다섯 바퀴 뛰고 왔어.”

마치 나보다 더 여기 주민인 것 같았다. 낯선 동네의 아침을 홀로 산책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내가 빌려준 운동복을 입고 들어오는 친구가 갸륵해 보였다.



오후에 친구 한 명이 또 도착했다.

이제 넷이 되었다. 왜냐하면 남편이 회사에 반차를 냈기 때문이다. 푸짐한 생김새와는 달리 이것저것이 예민한 남편은 전날 밤, 잠자리가 달라져 밤새 궁싯거리다가 결국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 피곤해서 쉬려고 쓴 휴가지만 남편은 또 우리 나들이의 기사 겸 안내자를 자처한다. 함께 넷이서 다시 행궁동으로 향했다. 전날과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진 봄이 우리를 맞았다. 같은 길이지만, 걷는 사람들이 달라지자 풍경도 마음도 새로워진 느낌이었다. 든든했다.


잘 산다는 건, 이런 하루하루로 채워나가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와 웃으며 걷는 봄날, 작은 파이에 초 하나를 꽂는 밤, 잠시 방을 비워주는 다정한 마음, 아침잠 많은 나를 두고 동네 산을 오르고 오는 친구의 기운, 그리고 나를 둘러싼 이들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는 길.


오늘도 실실이 늘어진 버드나무의 잎이 봄날의 햇살을 즐기며 바람에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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