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친구와 함께 집에 오셨다. 예전에 두고 간 버즈 이어폰을 찾으러 오는 길, 마침 쉬는 날이라 드라이브도 겸해 친구랑 함께 들른 것이었다.
세간살이를 번쩍번쩍 닦아놓고, 에어컨도 시원하게 틀어 손님을 맞았다. 엄마 친구는 잘해놓고 산다며 웃으며 칭찬해 주셨다. 그러더니 오싹하다는 몸짓을 하며 에어컨을 무풍으로 바꾸신다. 나도 바람이 직접 닿는 것보다 무풍이 좋았다.
집주인은 나지만 복숭아는 엄마의 손에서 곱게 깎여 나왔다.
“배가 아직 하나도 안 나왔네”
“얘는 나 닮아서 입덧도 하나도 안 해”
자연스럽게 임신에서 내 어릴 적 이야기로 흘러갔다.
여전히 복숭아를 깎으며 엄마는 이제는 전래동화처럼 느껴지는 기억들을 아삼아삼 꺼내놓는다.
초산은 보통 병원에서 받은 출산 예정일보다 조금씩 더 일찍 나온다는데, 나는 장녀임에도 오히려 예정일보다 두 주 가까이 더 뱃속에 머물렀다고 한다.
지금도 원체 느릿한 나는 출생부터 그러했던 셈이다.
그렇게 오래 품어 키운 아기는 4.3킬로그램의 초우량아로 태어났다.
아기가 커서, 낳을 땐 힘들었지만 그때를 빼고는 임신기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엄마는 나를 거저 키웠다고 표현한다.
아기띠에 맨 채로 바닥에 내려놓으면, 나는 그 상태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잠시 일을 보러 가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이모가 와서는 “얘 아직도 이러고 있어?” 하며 어이없어했다는 얘기도 덧붙여졌다.
낮잠을 너무 많이 재우면 밤잠을 못 잔다는데, 나는 금세 자고 일어나서는 또 “자자” 하는 엄마의 손길에 쉽게 눈을 감고 수르르 졸았고 가슴을 토닥이면 어느새 다시 통잠에 빠져들던 아기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쌔근쌔근 잤다고 한다.
요즘 아기가 있는 집이면 하나쯤은 꼭 있다는 홈캠.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관찰 카메라 따위 그 시절엔 없었다. 그런데도 엄마가 말을 알아들을 무렵의 나에게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하고 장을 보러 나가면, 정말로 그 상태 그대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돌아와 나를 볼 때마다 엄마는 신기해하셨다.
예전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와서인지, 나는 육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20대 초반, 친구들 가운데는 아기를 잘 키울 자신이 없다며 걱정하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고민을 한다는 것은 그녀들이 이미 좋은 엄마가 될 자격이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땐 아직 먼 미래이기도 했고,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키우면 되지, 왜 미리부터 겁을 먹을까.’ 아주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미디어나 주변의 육아 선배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없던 공포가 생겨났다. 밤잠을 설치며 아기를 봐야 하고, 작은 뒤척임에도 깨서 확인할 수 있는 밝은 잠귀가 있어야 하며, 심하면 불면증까지 올 수 있다는 말들. 과연 내가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점점 무서워졌다.
학생 시절부터 직장생활 10년까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던 세월이 내 인생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여전히 힘들다. 일을 쉬는 요즘은 ‘사람이 이렇게까지 많이 잘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잠에 취한다. 나날이 기록 경신 중이다. 그런 내가 밤을 새워 육아를 한다는 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건 엄마의 말이었다. “너처럼 순한 애는 없었어”
두려움에 빠진 나를 순간적으로 끌어올려 주는 말. 내가 잊고 있던 나의 DNA를 환기시켜 주는 말이었다.
언젠가 나도 이 아이에게 “넌 거저 자란 아기였어” 하고 웃어줄 수 있을까. 하지만 설령 예민한 아이라 해도 괜찮다. 쌩쌩 직접 바람을 쏘아내든, 살랑살랑 무풍처럼 부드럽게 스미든, 예민하든 순하든, 결국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어떻게든 배우며 자라 갈 테니까.
복숭아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몸은 시원하고 입안은 달콤했다. 그리고 무풍이 조용히 집 안을 식히듯 엄마의 말이 내 두려움 위로 은은하게 번졌다. 진정 여름휴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