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이다. 시댁은 해마다 김장을 하는 집이다. 어머님은 이제 연세가 드시고 힘드실 텐데도 “할 수 있을 때까지 김치만은 내가 해줘야지” 하시며 끝내 고집을 꺾지 않으신다. 체력이 닿는 데까지는 꼭 직접 담가 주시겠다는 마음, 그게 어머님만의 사랑 방식이다.
문안 전화드릴 때면 “김치 잘 먹고 있어요, 정말 맛있어요”라는 인사를 꼭 드린다. 그 말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김치에 대한 자부심은 누구도 이길 자 없다. 하지만 매번 김치를 보내겠다고 하실 때마다, 우리 둘의 위장이 따라가지 못해 난처할 때가 많다. 결국 버리는 김치들이 생겨나고, 그게 늘 아깝고 마음에 걸린다. 게다가 우리 집 냉장고는 작은 키친핏이라 큰 김치통이 여러 개 들어가지 않는다. “어머니 공간이 없어요, 넣을 데가 없어요” 몇 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 말을 들으셨던 어머님 아버님의 마음이 안쓰러웠던 걸까.
“지금 하이마트다. 김치냉장고 하나 괜찮아 보여서… 사진 보낼 테니 봐라.”
김치를 주시다 못해, 이번엔 김치가 들어갈 집까지 사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노인연금과 아주버님이 드리는 용돈으로 생활하시는 분들이, 그 돈을 아껴 우리 부부에게 김치냉장고를 사주신다니. 처음엔 받기 미안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기쁘게 받는 것이 오히려 효도 같았다. 자식에게는 천년만년 밑지는 장사를 하면서도 손해라고 여겨본 적 없는 게 부모 마음이니까. 그렇게 뜻하지 않은 가전 하나가 추가되었다.
지난주엔 본가에 갔다. 김장을 한다고 하셔서 일손을 돕기 위해서였다.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김장철 특유의 향이 먼저 우릴 맞았다. 거실엔 이미 양념이 가득 펼쳐져 있었고 가장자리엔 절임배추가 산처럼 쌓여 있다. 이미 전날에 배추를 다 절여놓으시고 양념도 새벽같이 만들어 두신 뒤였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어머님의 꽃무늬 몸빼바지였다. 나도 옆에 자리를 잡아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갑을 꼈다.
사실 버무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친정은 이렇게 본격적으로 김장을 하지 않는다. 늘 사 먹거나 대야 하나에 조금씩 만드는 정도다. 내가 직접 배추를 한 장씩 펼쳐 속을 넣는 과정도 처음이었다. 낯선 작업이었지만 손맛이 재미있었다. 중간중간 아기 배춧잎을 뜯어 양념을 올려 먹는 재미도 좋았다. 이게 김장의 가장 큰 묘미 아니겠는가. 다만 배가 무거워지고 꼬리뼈 통증이 올라와 오래 앉아 있지는 못했다. 몇 포기 버무리다가 결국 일어나 쉬었다.
어머님과 아버님, 아주버님, 아주버님의 친구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배추에 양념을 버무리신다. 다들 자리에 둥지를 튼 것처럼 오래 앉아서 묵묵히 일하셨다. 형님과 조카는 독감 진단을 받아 오지 못했고, 남편은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다들 양념 묻은 장갑을 끼고 있어 부탁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배추 더 꺼내와" "목마르다. 물 좀 줄래?" "너네 집 통을 여기 가까이에 놔줘" 남편은 이쪽저쪽을 오가며 옴니암니까지 작은 일들을 해내느라 바빴다. 김장철마다 맡는 역할인 것 같았다. 그들은 오래된 솜씨로 완벽한 한팀이 되어 분주히 김장을 마쳤다.
우리 몫의 김치통을 챙겨 바로 차에 실었다. 차가 막히는 시간을 피해야 해서 부지런히 채비를 한 것이다. 뒤편이 묵직해진 차를 타고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받아온 김치통을 차곡차곡 넣으니 며칠 전 도착한 새 김치냉장고가 벌써 가득 찼다.
다음 날 저녁, 남편이 수육을 삶아주었다. 어머님이 챙겨주신 전라도 오젓도 함께였다. 따끈한 고기 위에 아직 익지 않은 김치와 새우젓을 올려 와앙 하고 먹었다.
배춧잎의 아삭거림과 부드러운 고기가 입 안에서 따뜻하게 녹았다. 그 안에는 마늘과 생강보다 더 깊은, 우리를 향한 마음이 배어 있었다. 맛있어서 손뼉을 치며 나도 모르게 몸을 좌우로 움직였다. 이렇게 가끔 미각이 충만할 때면 어절씨구 흥이 난다. 신나는 음악까지 있었으면 춤 한판을 벌였을지 모른다.
흥취를 돋웠던 저녁식사가 끝나고 상을 치우는데 문득, 요즘 어머님 전화가 뜸해진 것이 떠올랐다. 한때는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 전화가 오던 분이다. “우리 예꽁이는 잘 있냐?” 그 말로 시작해서 그 말로 끝나는 전화. 목소리마다 손주에 대한 사랑이 애지중지 묻어났고, 나보다도 예꽁이를 더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우리 예꽁이는 잘 있냐 라는 말이 유행가 가사처럼 귓속에 자꾸 맴돌아서 남편과 어머님 성대모사를 자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전화가 일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다. 목소리는 전보다 기운이 없으신 것 같아 걱정이 든다.
김장철은 해마다 돌아오지만, 어머님이 직접 담가 주시는 김장의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저녁 상에 올린 그 붉은 김치가 유난히도 반짝였다. 고맙고, 미안하고, 또 고마운 마음이 배추 속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의 손과 마음이 오롯이 담긴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일. 그 소박한 풍경이 내게는 오래 기억될 저녁 한 끼였다. 모름지기 김장배추의 속 재료는 부모님의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