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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유치원이란

나의 5살 아들에게 영어 이름이 생겼다.

영어유치원에 다니게 된 것이다. 아이 키우는 게 처음이라 말로만 듣던 영어유치원에 아들을 보낼지 말지 많이 고민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유치원 비용, 그리고 한국에 사는 한국사람이 외래어를 먼저 배우는 게 맞는지.

그 모순된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뭔가 큰 동기와 결심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고민이었다.


그래서 나와 같은 동네에서 일하는 동료, 선배들 중에 자식을 영어유치원에 보낸 몇 명에게 왜 보내게 됐는지, 보내길 잘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동료의사 왈,

" 영어로 말 잘하고, 발음도 아주 굴러다니는 걸 보면 뿌듯하죠~ 보내길 잘했어요~"


선배왈,

" 애들 중고등학교 보내보면 영어유치원이 가성비가 엄청 좋은 교육이란 걸 느낄 거다~!"


옆동네 원장님 왈,

" 어릴 때 영어를 다 끝내놓으면 중고등학교 때는 수학에만 집중할 수가 있죠~"


주위에서 들려준 경험담과 조언은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한 달 중 가장 큰 지출이 될 영어유치원의 결정에는 채워지지 않는 고심이 남아있었다.

나와 아내의 고심이 계속되며, 아내는 수많은 영어유치원 설명회에 참석했다.


결국 뚜렷한 확신 없이 입학 때가 되어 영어유치원을 보내게 되었다.

'아들이 영어를 잘하면 어느 분야에 가던지 더 좋은 기회가 있겠지.'

'보내줄 여유가 있는데 자식에게 좋은 교육기회를 우선 줘보는 게 낫지 않겠어?'

나의 확신 없는 결정은 이 정도의 동기로 포장되었다. 남들이 보내길래 나도 보냈다는 줏대 없는 결정을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감추기 위해서였을지도.


그즈음, 의대생 후배들이 나의 병원을 찾아왔다. 의대동아리의 연중행사 중 하나인데, 후배들이 선배의 병원에 찾아와 밥도 얻어먹고, 선배들이 자발적!! 으로 내는 동아리 회비를 걷어갈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창 학업을 하고 있는 후배 2명이 나에게 찾아왔다. 갈수록 좁아지는 의대입시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온 수재들이었다. 그들과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며 나의 근황을 말했다.


"요새 저는 어린 아들이 유치원에 갈 때가 됐는데, 영어유치원에 보낸 게 잘한 건지, 고민이 많아요~ 후배님들은 영어유치원 세대는 아니죠?"


"선배님, 저는 영어유치원 다녔었어요~ OO야 너는?"

"저도 영어유치원 다녔어요~"


나는 놀랐다. 사실 아들을 영어유치원을 보내는 게 맞는지 고민할 때, 그 과정을 거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어떻게 자라 있을지 너무 궁금했었다. 그들을 보면 나의 결정에 답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호기심이 가득 차, 후배들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영어유치원 다녔던 게 많이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영어는 이중국적 언어처럼 편하게 잘하나요?"


후배가 말했다.

" 영어는 외국여행 다닐 때 불편함 없이 하는 정도고,

영어유치원 다녔을 때 도움이 된 점은 좋은 친구들, 나와 비슷한 환경의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점인 거 같아요~"


영어유치원 키즈에 대한 나의 환상은 그렇게 깨졌다.

그 세대는 나와는 다른, 뭔가 국제적이고 그럴듯한 세대로 자라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사가 된 영유 키즈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하고, 내가 의대생일 때 보던 시험족보가 아닌, 영어 원서를 읽고, 동네의사가 아닌 WHO 국제기구에서의 역할을 꿈꾸지 않을까 하는 그런 환상이 있었다.


내가 본 나의 의사 후배들은 나의 의대생 시절과 마찬가지로, 원대한 꿈같은 건 별로 없는 평범한 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영어란 입시를 위한 정복의 대상, 일상을 잊게 할 해외여행 갈 때의 도구, 그 정도로만 느껴졌다. 나의 세대에도 그랬듯이.

후배들의 꿈이 나와 같이 평범한 동네의사가 되는 거라면, 유창한 영어실력보다는 온종일 아픈 사람들이 쏟아내는 우리말을 참고 듣는 능력, 우리말을 공감하는 능력이 더 필요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내 앞에서 깨진 영어유치원에 대한 환상은,

어느 아빠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회사에 다니는 동네 후배와 같이 저녁을 먹던 중 그가 말했다.


"제가 대치동에 거래처가 많아서 자주 가는 데 거기 학원 건물 엘리베이터 타면 아이들이 다 영어로 대화를 하더라구요~ 우리 아들들도 영어유치원 보내줬으면 좋았을 텐데.... 맞벌이하는데도 어휴.. 꿈도 못 꿉니다~"


영어유치원에 보내지 못하는 아빠는, 세상에 나온 자식을 처음 만날 때부터 왜 자책감을 갖아야만 하는 걸까.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없는 아이는 의대생 후배가 말한 그 좋은 친구라는 자격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작가 김영민 교수는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말했다. 각자 버틸 수 있는 이상의 에너지를 일과 학업에 쏟아 넣고 있는데, 그 일과 학업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묻기를 꺼리는 사회라고.


아직도 나는 영어유치원의 명확한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들의 영어유치원 등원길을 배웅하는 것은 남들이 다하는 길이라서, 좋은 친구들의 계층 사다리에 올라타기 위해서, 아들의 교육에는 아끼지 않는 부모의 마음 그 어디쯤 일 것이다.


얼마 전 자녀 교육을 위해 대치동에 힘들게 입성한 친구를 만났다. 10시까지 학원을 다니는 혹독한 초등학생 아이들의 삶을 듣고는, 이 사회에 대한 분노 섞인 씁쓸함을 느꼈다.

그 분노는 '나는 아이를 그렇게 키우지 않을 거야'라는 자만이 깔려 있었다. 친구가 헤어지며 내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지금 아들이 몇 살이지~?"

"응. 이제 5살이야. 얼마 전에 영어유치원 들어갔어~"


"아.. 영어 유치원... 그게 대치동 입성의 시작인데..."


자만하고 있던 나는 친구의 한마디에 제대로 뒤통수를 맞고서야 깨달았다.

입시 지옥에 저항하지 못하고, 오히려 앞장서서 그 지옥에 뛰어 들어서 의사가 된 나였다. 그런 나약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 전 새 대통령이 뽑히며 출범한 정부가 새로운 장관을 임명하는데, 국민이 추천한 인물을 반영한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교육부장관에 위에 인용한 김영민 교수를 추천하는 메일을 썼다. 그리고 메일의 마지막에 추신을 남겼다.


PS.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우리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꺼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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