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앞 내과

by 문과체질 내과의사

삐까 뻔쩍한 곳에 내 병원을 갖고 싶었다.
도심이 내려다 보이고, 느긋하게 예약된 환자를 보며 여유롭게 병원을 걸어 다니는 그런 꿈이 있었다.

병원을 개원한 지 이제 8년 차,
이곳은 그런 나의 꿈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서울의 남쪽 아래, 개발의 손길이 덜 닿은 곳,
도심의 끝자락에 고립된 섬 같은 곳,
전통시장이 아직 남아있는 그런 곳이다.
그 전통시장을 들어가는 골목길 어디쯤에 나의 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개원 초기, 나는 동네 주민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개원 전까지 대학병원의 권위에 보호를 받으며, 환자와의 소통보단 일방적인 치료를 주로 하던 나였다.
그래서 환자를 대하는 나의 진료는 딱딱했고, 나의 언어는 건조했다. 의과대학에서 동네의사의 소통 방법이나 역할 같은 건 가르쳐 주지 않았다.
'동네'에 융화되지 못한 '동네병원'의 대기실은 텅 비어있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할아버지 한 명이 진료실에 들어와 얘기했다.
"아니. 여긴 대기실에 믹스커피도 하나 안 갖다 놓고..! 그러니까 환자가 하나도 없지~ 옆에 병원엔 사람이 바글바글 하던데... 쯧쯧.."

아... 얼큰히 취한 할아버지는 울고 싶은 나의 뺨을 제대로 때렸다.

거기에다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나는, 병원을 찾는 어르신들의 눈에 햇병아리 의사쯤으로 보이는 듯했다.

" 아고. 원장이 아주 젊네~ 길거리에서 보면 학생인 줄 알겠어~"

이렇게 나의 이상과 현실은 아주 다른 것이었다.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좋을 거라 생각한 그럴싸한 대기실과

VIP 수액실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고된 일상에 당 충전을 위한 믹스커피 한잔과, 통증을 빨리 줄여줄 독한 엉덩이 주사 한 대가 더 필요한 것이었다.

인간은 놀랍도록 적응의 동물이었다.
나의 생존을 위한 적응은 나를 서서히 변하게 했다.
속이 체하여 왔다는 환자에게 예전의 나는

" 체했다는 병은 없습니다. 기능성 소화장애인 거 같은데 혹시 놓칠 병이 있을지 모르니 초음파 검사를 해보시죠"

라고 말했다면, 지금은

"어휴. 많이 체하셨네.. 뻥 뚫리는 엉덩이 주사 한 대 맞고 가시고, 계속 아프면 배속을 보게 한번 와보세요~"

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3년 정도 지나니, 단골 환자가 늘어났다.
점심시간에 나가면 얼굴을 알아보고 서로 인사하게 되는 주민이 늘어났다.

예전에 서울 시내 중심지의 다른 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진료의 절반은 대학병원으로 의뢰서를 써주는 일이었다. 어떤 이들에게 동네병원은 그저 대학병원에 가기 위해 들렀다 가는 곳에 불과했다. 그들에겐 내 진료에 대한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지금 나의 동네에는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힘든 알바를 끝내고 몸이 지치면 나를 항상 찾아오는 청년.
뇌졸중이 의심되지만 나에게 꼭 확인을 받고 응급실에 가겠다는 할머니.
매달 다녀야 하는 동네병원을 옮기기 싫어 이사를 못 가고 있는 할아버지.
허리가 아파도 정형외과는 안 가고 여기만 오겠다는 아주머니.

그들에게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이란 건, 혹시 폼나는 사명감이란 감정이 나에게 조금 생긴 걸까.

매달 오는 할아버지 환자는 약을 타러 와서, 내 얼굴을 살피고는 얘기하신다.
" 요새 바빠 보이더니, 살이 쪽 빠졌네~ 힘들겠어 원장~"

가끔 보는 친구보다 더 자주 보는 나의 환자들과의 진료는 더 이상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환자들에게 힘을 줄 때도, 힘을 받을 때도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나를 자칭 OO동 주민이라고 부른다.
나의 일상에서 집보다 더 오랜 시간 머무르는 곳이 여기라면, 나는 이곳 주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마음속에서도 이 동네 주민으로 자리 잡은 것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가족이나 지인이 오면 이 동네 맛집을 소개해주고 싶은 것, 자주 가던 단골가게가 없어지면 슬프고 헛헛한 것. 길 가다가 인사할 사람이 많아진 것.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가 걷고 있는 거리도 달라졌다.
나의 첫인상 속 낙후되고 허름한 주택가는, 이제 나의 환자들의 추억이 담긴 사람 냄새나는 거리로 바뀌었다.
그런 시선의 변화는 내가 이 동네에 정이 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 애매한 '정'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함께 해온 시간들의 합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이제 발을 빼기엔 늦었다...!
내가 이 동네에서 해야 할 것도, 받은 것들도 참 많아져버렸다.
멋들어진 병원은 아니어도, 세월의 흔적을 담아가는 이 동네 병원임에 자부심을 느끼며...
그렇게 나는 시장 앞 내과를 지킬 거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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