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다낭시.. 아니, 베트남 다낭에 다녀왔다.
한국인들이 그렇게 부를 만큼 좋아하는 여행지라고 했다. 자영업자인 나에게 소중한 몇 안 되는 연휴에 다녀온 여행이었다.
첫 베트남 여행이었는데, 정말 좋았다.
길지 않은 비행시간, 야자수와 열대 과일이면 충분한 동남아 바이브, 깨끗한 호텔, 아직도 원시적인 매력이 남아있는 해변.
그 모든 매력의 화룡점정은 단연 물가와 가성비였다! 물가가 대략 우리나라의 1/3 정도로 느껴졌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베트남에 좋은 인상을 갖게 해 준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여행 내내 잠깐씩 마주했던 베트남 사람들이었다. 이동 수단을 모두 택시로 이용했기에 여러 명의 기사분들을 접할 수 있었다.
몇 마디의 대화와 행동으로도 그 사람의 인상이란 게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느낀 베트남 사람들은 대게 친절하고, 욕심이 많지 않고, 순수한 사람들이라 느껴졌다.
귀국한 지 얼마 후, 돌아온 일상의 진료실에서 베트남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40대 남자 환자였고, 외국인이라 의료보험은 가입이 안된 상태였다. 자세히 묻지 않아도 외국인 노동자임이 분명했다. 그는 오른쪽 옆구리가 너무 아프다고 했다. 통역이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서툰 한국말로 증상을 설명했다.
베트남 여행의 여운과 호감이 아직 남아있어서인지, 나는 그를 더 잘 치료해주고 싶었다.
그는 통증이 상당히 심해서 잘 걷지도 못했다.
의료비, 언어장애, 외로움 등.. 타지 생활의 셀 수 없이 많은 제약 때문에 통증을 버티고 버티다가 나에게 왔음이 틀림없었다.
초음파로 그의 신장을 들여다보자 또렷한 결석 하나 가 신장 속에서 소변이 나오는 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묵히고 묵힌 결석 때문에 신장은 땡땡 부어있었다.
한국말에 서투른 그에게 상태를 조곤 조곤 설명해 보았지만 '신장, 결석' 같은 말을 그가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번역기 앱을 켰고, 훨씬 수월하게 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요로 결석은 크기가 컸고 통증도 심해서 쇄석술이 필요한 상태였다.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학병원에서 의사소통도 잘 안될 그와, 엄청난 진료비를 생각하니 내가 다 막막해졌다.
번역기 앱과 펜으로 그림도 그려가며 그를 이해시키고, 대학병원으로 갈 수 있게 준비를 다 해주었다. 요로결석은 산고의 고통과 견줄만하기에 센 진통제 주사 한방도 그에게 놔주었다.
진료실 컴퓨터에 치료 오더를 다 넣고 엔터를 누르니, 그에게 부담될 진료비 숫자가 떴다. 베트남 물가가 우리의 1/3 정도 됐었지..? 여행지 베트남의 애정은 그에게도 전이되었고, 진료비를 3으로 나눈 후 다시 엔터를 눌렀다.
옆구리를 잡고 의뢰서를 들고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외롭고 힘든 이방인의 모습이었다. 그의 고통과 막막함은 3으로 나눈 진료비에도 불구하고, 절반도 덜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쾌유를 마음으로 빌며, 점심을 먹으러 병원을 나왔다. 매일 점심, 길거리를 헤매며 메뉴를 찾는 나는 가까운 거리에 지나치던 베트남 쌀국수집이 생각났다. 오늘은 그렇게 입맛까지 베트남으로 귀결됐다.
노란 간판에, 허름하고 작은 그 식당에 들어갔다. 베트남 여자 사장님이 혼자 운영하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 혼자 점심을 먹고 있던 그녀는 내가 들어오자, 급하게 먹던 음식을 정리하고 주방에 들어왔다.
나는 쌀국수를 시켰고, 나에게 조금 특별해진 베트남의 흔적이 있는지 식당 곳곳을 둘러봤다. 잠시 후 그녀의 딸로 보이는 혼혈인 초등학생 소녀, 그리고 시어머니로 보이는 한국인 할머니가 같이 식당에 들어왔다. 처음 봤을 때 무표정이었던 베트남 사장님의 표정이 한없이 밝아졌다. 그녀와 딸과 할머니는 여느 평범한 우리의 가족과 다름없었다. 엄마의 서툰 한국말 발음과 달리, 딸의 목소리만 들으면 한국사람과 다름없었다. 아니, 그 소녀는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피부색만 조금 진할 뿐.
그 소녀를 보며, 또 다른 소녀가 생각났다.
요로 결석 때문에 나를 찾았던 그가 번역 앱을 켤 때, 휴대폰 배경화면 속엔 소녀의 사진이 있었다. 빨간 전통 의상을 입은 그 소녀는 그의 딸이었음이 분명했다. 이방인이 되기를 택한 그의 외로움과 노력은 그 소녀를 위한 것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픔을 이기고 쾌유한 그가, 그의 나라로 돌아가 소녀와 재회하며 웃는 모습을 상상하고 기원했다. 그 상상 속 배경엔 가족을 태운 수많은 오토바이가 지나다니고 있었다.
쌀국수가 나왔다. 베트남 사장님을 봐서 그런지 연휴 때 먹어본 본토의 맛이라 느껴졌다. 오늘은 항상 빼던 쌀국수 안의 고수를 그대로 먹어보았다. 그와 그녀를 응원하는 내 나름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고수는 쿰쿰하지만 먹을만했다. 그렇게 베트남에서 온 모든 것은 나에게 이방인도, 낯선 것도 아닌 게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