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하루 일과를 마감해 가던 어느 날 오후, 한 어머니가 나에게 진료를 보러 왔다. 그녀가 말했다.
"어제 하남의 다른 병원에서 위내시경을 했는데, 식도염이 있다고 하고, 위에서 조직검사도 했다고 해서..."
환자는 말끝을 흐렸다. 망설임은 당연해 보였다.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나에게 상담을 하러 왔으니 답이 나오기 어렵다는 걸 그녀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동네 병원 의사들이 흔히 겪는 불만스러운 상황이다. 대형 검진병원에서 검사를 다하고, 동네병원에서는 상담만 하고, 약만 달라고 하는 상황.
나의 동료 의사가 이런 환자에게 하는 말이 있다.
" 삼성에서 만든 가전제품을 엘지에 가져가서 고쳐 달라고 하면 거기서 어떻게 고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검진하신 병원에 가셔서 치료받으시죠.."
웃픈 멘트지만, 이렇게 검사와 치료를 다른 병원에서 하게 된다면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를 쌓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나는 환자에게 물었다.
" 검사를 어제 하셔서 조직검사 결과도 아직 안 나왔을 거 같은데, 어떤 이유로 저희 병원에 오신 거예요..? "
" 그게 실은... 제 딸이.. 여기 병원에서.. 38세에 위암 진단을 받았었는데.. 항암치료도 했었고.. 그러다... 갔어요.. 3년 전에.. "
잊고 있었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어느 환자의 위 속을 넓게 채우고 있었던 암덩어리. 환자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딱딱하고 거친 암덩어리는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보통 젊은 여자환자에게 진단되는 위암은 진행속도가 빨라, 암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늦어버린 경우가 종종 있다.
그때도 그런 직감에, 그녀에게 너무 희망을 주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절망스럽지도 않게, 위암이 있음을 알려주고 대학병원에 의뢰를 해준 기억이 났다.
고인이 된 딸의 어머니가 검사 다음날 왜 나에게 찾아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딸을 하늘로 보낸 이후 아마 처음 받았을 위내시경 검사에서 조직검사를 했다고 하니 느꼈을 불안감, 그 불안감에 딸의 병을 진단한 의사는 뭔가를 알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 환자에게 조직검사를 했더라도 단순 위염인 경우가 훨씬 많으니 우선 너무 걱정하지 않으시는 게 나을 거 같다고 얘기를 해드렸다. 그리고 증상이 없는 식도염에 대해 약효보단, 불안감에 대한 플라시보 효과를 위한 약을 며칠만 처방해 드렸다. 그리고 말했다.
" 조직검사 결과는 아마 일주일 후에 나올 거예요. 결과지랑 내시경 검사 사진을 가져오시면 제가 확실하게 상담해드릴 테니 꼭 오세요"
그리고 고인이 된 환자의 가족에게 내가 루틴 같이 했던 한마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 말을 뱉으려다가, 여러 뒤섞인 감정이 내 입술을 다물게 했다.
그 건조한 한마디가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에게 털끝만큼의 위안도 안 될 거란 망설임,
3년이 지나 조금은 희미해진 부모의 슬픔을 내가 다시 건드리며 감히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감정이었다.
" 진료 보게 되면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이렇게 기억이 안 나네... 진료실 나가면 또 생각날 거 같은데.. 그 애 보내고 나서는 기억력도 흐려지고.. 계속 이러네..."
어머니 환자는 진료 내내 말 끝을 흐렸다. 그녀는 나의 눈도 잘 쳐다보지 못하고, 자신의 의사를 또렷이 표현하지 못하고는 진료실을 나갔다.
그 망설임은 딸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 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건강은 챙기게 되는, 삶의 본능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을까.
진료를 마감하고 어둑해진 병원 앞 거리에 나왔다.
맑은 저녁 하늘에 또렷해진 달이 보였다.
먼저 별이 되었을 딸은 그 근처 어디쯤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곳에서 딸은 분명 어머니를 지켜줄 것이기에.. 일주일 후 나는 그녀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