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병원은 동네 사람들과 세월을 같이 난다.
그 세월의 변화를 가장 또렷이 보여주는 사람은 바로 소아 환자다. 감기로 나에게 종종 찾아오던 한 소년이 오랜만에 병원에 왔다.
" 안녕하세요~ 감기 걸려서 왔어요, 선생님~"
" 와~ 그새 많이 컸네~ 어디가 안 좋나 목부터 한번 봐볼까요? 아~해보세요."
그 친구는 10살부터 나에게 진료를 봤다. 하얗고 귀여운 얼굴에, 엄청 숫기가 없던 소년은 나에게 인상이 남는 아이였다. 아이는 항상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왔었다. 작고 아담한 몸에 수줍어서 나에게 말도 잘 못했었다. 소년의 가는 목소리는 귀여운 아가 티를 팍팍 냈었다. 진찰을 위해 그의 목을 보고, 코를 보고, 귀를 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소년을 어르고 달랠 때, 나는 빛의 속도와 감으로 진찰을 해야 했었다.
오랜만에 진료실에 온 소년은 이제 15살이었다. 우리 병원에 혼자 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못 보던 사이 키도 많이 컸다. 무엇보다 낯선 것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맑고 높은 톤이던 아가의 목소리는 이제 낮은 옥타브로 바뀌어 있었다. 수줍던 소년의 얼굴에선 이제 시크함이 묻어났다. 어느새 소년의 몸에 농도를 높여가는 테스토스테론은 그렇게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소년을 진찰할 때 이제 더 이상의 어리광은 없었다. 목도 척! 코도 척! 양쪽 귀도 척척!이었다. 할머니가 말해주던 감기 증상을 이제 스스로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씩씩하게 큰 소년은 더 이상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올 필요가 없었다. 아니, 같이 가자고 한 할머니의 손을 이제 소년이 애써 만류했을지도 모른다.
달라진 소년의 얼굴에, 동 시간을 보낸 나의 시간을 새삼 느꼈다.
'나도 이 동네에 자리한 지 이렇게 시간이 흘렀구나..'
수년간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작은 진료실 방 안에 해가 뜨기 전 들어와서 해가 지고 나가는 일. 그것은 시작할 땐 몰랐지만 자발적 고립을 택하는 길이었다. 반복되는 하루에 무뎌진 감각은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세월이 됐고, 그 세월은 소년에게는 이렇게 큰 성장의 시간이 되었다.
그 사이에 늘어난 나의 새치는 이제 내 머리의 대부분이 되어, 새치라 부르기 민망한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같은 시간은 사람마다 다른 의미로 흘러갔다. 하루가 다른 소년의 성장의 시간은, 나에겐 매일이 같은 반복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반복은 나에게도 가장 큰 성장을 주었다. 같은 일의 반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듬직하게 큰 소년의 진료는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수고스럽지 않았다. 소년을 대견하게 보는 나의 마음 뒤로, 이상하게 왠지 모를 섭섭함이 느껴졌다. 그 감정 속 소년의 모습은 점점 커가는 나의 아들의 모습과 같았다.
부모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가가, 아침에 일어나 하루의 루틴을 혼자 하는 어린이가 된 아들의 모습이었다. 꽉 쥐었던 아빠의 손을 이제 땀난다고 뺄 줄도 아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아빠가 잡아주던 네발 자전거의 보조 바퀴를 서서히 허공으로 올리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우리 아들도 몇 년 더 지나면 혼자 병원에 올 수 있는 소년이 되겠지~'
그런 생각에 아들과 손을 잡고 다니는 지금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여느 아빠와 아들처럼 손잡는 건 어색해질 거라 생각했다. 두 손의 간격은 멀어지겠지만, 그동안 함께한 시간만큼 부모와 자식의 마음은 더욱 가까워질 거라 믿었다. 그리고 소년이 될 아들의 대견함과 그에 비례할 섭섭함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료실에 온 소년이 진료를 마치고 나갈 때, 약 처방을 하기 위해 내가 물었다.
" 학생~ 이제 알약 먹을 수 있죠~?"
"... 아니요 아직... 가루약으로 주세요 선생님~"
그래.. 키만 컸지. 다 큰 게 아니었어. 아직 아기였구나.
헛헛했던 마음이 가루약에 뭔가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은 아들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생각한 것보다 좀 더 남은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