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타나지 않는 것들

- 에필로그

by 문과체질 내과의사

나는 내과의사로 살아간다.
주로 나타나지 않는 것들을 다루고 치료한다.
내(內)과라는 이름처럼 몸속에 있는 것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위장, 심장, 폐, 간, 신장, 혈액 이런 것 들이다. 몸속에 있는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기 위해 갖은 수단을 총동원한다. 내시경, 초음파, 엑스레이, 혈액검사, CT 등등.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에 고장이 나면 처음엔 잘 나타나지 않고 느끼기도 어렵다. 혈압이 높아져도, 위장에서 피가 나도, 대장에 용종이 생겨도, 폐에 혹이 생겨도, 혈액암세포가 떠다녀도.
그것들이 겉으로 드러날 때는 이미 병이 많이 진행된 경우가 많다. 이미 암세포가 많이 전이가 된 경우도 있고, 혈압이 올라 합병증으로 뇌졸중이 오거나, 심근경색이 생기는 경우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최선의 치료가 예방이듯, 현대의학의 발전은 보이는 것의 치료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치료로 확장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의 소중함을 자각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 별 탈 없는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소중함을 느끼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쉽지 않다.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운동, 식습관 관리, 간식의 유혹을 참기, 스트레스 덜 받기, 술, 담배 멀리하기, 주기적인 건강검진 등.

좀 더 생각해 보니,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놓치기 쉬운 건 건강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늘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의 루틴의 소중함과 같은 것들. 어찌 보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갖은것의 소중함을 그렇게도 놓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상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기하기 위해서는 시각화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계속해서 혈압을 재서 수치화하여 보아야 하고, 내시경을 해서 화면으로 위장을 들여다봐야 하고, 흑백사진과 같은 초음파로 장기들의 안녕을 물어야 하고, 암호처럼 쓰인 건강검진 책자 안의 빨강, 파랑 화살표들을 보며 내가 비정상이 된 것들을 알아채야 한다.

그 와중에 더더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노인 환자들의 건강이 그런 것들이다.
병의 증상이란 몸의 방어기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열이 나고, 기침을 하고, 설사를 하는 것들은 내 몸에 들어온 균을 배출하고, 내가 병에 걸렸으니 조심하고 쉬라고 자아가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노인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그런 신호가 아주 약한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냥 왠지 모르게 기운이 없고 처진다고 내원한 할아버지 환자를 검사해 보니 폐렴에 의한 패혈증이 있는 경우,

왠지 모르게 시름시름 앓는 할머니 환자에게 심한 요로감염이 있는 경우 등이다.

이렇게 드러나지 않는 것들은 치료의 시작을 늦추게 되고, 이미 손쓰기 어려워진 안타까운 경우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나의 시선은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향한다.

특히 증상이란 신호조차 보내기 힘든 이들에게. 노인이나 소외된 사람들, 화려한 사회의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에게.

한편 나의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의 상당수는 다른 의미의 내(內)과적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오기도 한다.
어느 할머니 환자가 나에게 진료를 보러 왔다.

"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고, 뭔가 얹힌 거 같은데, 이것 땜에 잠도 잘 안 오고 그러네요..."

가슴 통증이 있을 때 가장 중요하게 감별해야 되는 병은 심장질환이다.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일 경우 위중한 상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전도, 심장초음파, 혈액검사로 그녀의 심장 상태를 최대한 시각화하여 들여다보았다.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어봤다.

" 어르신, 검사결과는 다행히 문제없네요. 혹시 요새 스트레스가 많거나, 힘든 일이 있거나, 기분이 처지고 우울하진 않으세요~? "

".... 내가 할아버지 보내고, 막내딸이랑 같이 사는데... 곧 딸이 결혼하거든요.. 딸이 독립하니 기쁘기도 하고, 나는 어떻게 살지 막막하기도 하고.. 나도 마음이 왜 이런가 모르겠어요.."

그렇게 나는 할머니 환자의 심장이 아픈 것이 아니라, 폐가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 일거라 생각했다.
우리 몸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아무리 시각화해도 드러나지 않는 것. 그것은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유일하게 드러나게 할 수 있는 것은 복잡한 검사가 아닌, 진료실 안의 대화였다.


그리고 나의 어떤 처방보다 할머니의 가슴을 편하게 해 줄 것은 딸의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딸의 따뜻한 포옹일 거란 생각을 했다.

속마음을 얘기한 할머니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는 할머니의 작은 손을 잡아드렸다.

할머니가 맞잡은 내 손을 쥐는 약한 악력을 느꼈다. 할머니가 고맙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것 역시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 건강다이제스트 2025년 송년호에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