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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마중 Oct 26. 2024

‘이런 오픈런’이라면 겨울 방학숙제로 강추

역시 노는 게 제일 좋아 

오빠와 사촌 동생들은 야구방망이와 테니스공을 들고 작은 집 논으로 모였다. ‘업어라 젖혀라’ 편을 가르고 오빠와 한 팀이 되었다. 든든했다. 오빠는 투수를 했다. 나와 사촌 언니, 동생은 1루, 2루, 3루를 맡았다. 

상대팀 동갑내기 사촌이 쳤다. 오빠가 잡았다. “원아웃”

작은 언니가 쳤다. 파울이다. 또 파울이다. 그리고 쳤다. 오빠가 또 잡았다. “투아웃”

막내 사촌 동생이 쳤다. 1루까지 뛰었다. 상대팀의 에이스 사촌 동생이다. 역시 안타다. 울퉁불퉁한 논두렁 바닥을 휘청휘청 뛰어 노란 테니스 콩을 간신히 잡고 오빠에게 던져 주었다.  우리 팀 에이스 오빠는 상대팀을 쓰리아웃 시켰다.      


오빠는 모든 놀이를 잘한다. 야구, 구슬치기, 자치기, 산에서 나무 타기, 땅 파서 합정 파기. 나는 오빠를 따라다니며 매일을 반복하고 몸으로 익혔다. 사촌 동생들과 내가 허둥대면 자상하게 알려주기도 했다. 야구 규칙, 구슬의 각도, 어느 위치에서 구슬을 서로 부딪혀 홈에 들어가는지, 자치기의 비법 모두 오빠에게 배운 놀이 기술이다. 놀이 자격증 따기가 숙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밤 할머니가 은밀히 입 안에 넣어주던 엿이 생각났다. 작은 언니와 나는 광안으로 들어가 비좁은 문틈 사이에서 들어오는 빛만으로 엿을 찾는다. 깊숙이 두지 않았을 거라는 직감으로 문 앞을 뒤적이다 달력종이로 덮어 놓은 소쿠리가 하나 느껴진다. 종이를 들춰보니 엿이 얼마 없다. 입에 쏙 들어갈 만한 작은 엿을 입에 넣고 가려는데 미련이 남아 다시 종이를 들춘다. 엿 덩어리에 묻어있는 콩가루를 살살 털어내고 칼 등으로 한쪽을 툭 친다. 다양한 조각이 만들어져서 그중에서 제일 큰 엿을 하나씩 잡아 입에 넣는다. 입가에 묻은 콩가루를 흔적도 없이 털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볕 좋은 담벼락에 앉아 오래도록 녹여 먹는다. 처마 밑에 고드름이 마녀 손톱처럼 기다랗고 밤새 수북이 쌓은 눈을 보며 새로운 놀이의 장이 열릴 것 같다.    

  

때마침 사촌들이 비료 포대를 가져왔다. 나는 사촌 언니에게 물려받은 미끄럼방지 부츠를 꺼내 신고 지푸라기를 비료 포대에 알맞게 넣는다. 집 뒤 도연이네 목장길 따라 커다란 양옥집 담벼락을 지나간다. 도연이는 우리 반에서 가장 부유한 친구였다. 피부는 하얗고 분홍포스터물감을 들고 다니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밖에서 같이 놀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인기척 없는 도연이 집을 힐끔 쳐다보고 나는 사촌들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장 끝자락은 우리 동네에서 최고 높은 언덕이어서 여러 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해를 등지고 우리는 비료 포대를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각자 자리를 잡는다. 썰매를 잘 타려면 푸대살짝 뒤쪽으로 무게중심을 두고 손과 발은 빠른 노를 젓듯 움직여 속력을 낸다. 속도가 나기 시작하면 발을 재빨리 썰매 안쪽으로 접어 포개 앉는다. 순간 몸을 뒤로 젖히고 “야호”.     


어떤 길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두가 출발하는 길이 눈길이 되고 우리들만의 눈썰매장을 만들어 간다. 이것이 오픈런의 묘미. 눈길이 만들어지면 또 그 위에서 타는 것도 스릴 있다. 울툴불퉁 길을 마주하게 되면 엉덩방아도 찧지만 지푸라기 덕분에 쿠션감도 좋다. 서로 깔깔깔 웃고 그만 타고 싶으면 그대로 몸을 뉘어 옆으로 넘어진다. 눈에 뒹구르며 눈도 먹고 눈을 감고 눈밭에 벌러덩 누워 파란 하늘과 내 심장소리에 집중한다. 한숨 고를 때 코 끝에 앉아있는 찬바람이 등꼴까지 시리게 한다. 서둘러 일어나 내려온 만큼 다시 오른다. 이마, 등에 따끔할 정도의 땀이 날 때쯤 정상에 도착한다. 혼자 타기도 하고 둘이 타기도 하며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명태에서 동태가 되어가는 것처럼 내 몸이 얼었다 녹았다’, 한다.       


젖은 옷과 부츠는 부뚜막과 솥뚜껑 위에 얹어놓고 엄마가 쪄 놓은 고구마와 시원한 동치미를 들고 안방 아랫목 이불 속에 들어간다. 토끼 발자국이 산으로 있다는 오빠 말에 대충 마른 옷을 다시 입고 우리는 토끼사냥을 간다. 사냥터에 가려면 활을 만들어야 한다. 마른 대나무를 반으로 갈라 연두색 연줄을 탱탱하게 묶고 대나무를 휘게 만들어 활을 완성한다. 화살은 제법 크게 자랐던 마른 개망초 줄기로 사용했다. 몇 번 화살을 날려보고 곧장 산으로 출격이다. 토끼 발자국도 맞고 여기저기 토끼 똥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토끼가 이곳을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숲 사정도 훤히 알고 있었다. 약간에 긴장감과 재미를 느끼며 낮은 자세를 취하며 걷는다. 뽀드득뽀드득.   

   

토끼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산에 들어왔으니 산에서의 놀이를 시작한다. 동생들은 죽은 나무를 낑낑거리며 끌고 들고 나르는 사이 오빠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주워 온 죽은 나무들을 세우고 묶어 아지트를 만들었다. 솔잎을 주워 바닥에 깔면 포근한 아지트가 완성이다. 여럿이 앉아 낄낄거리다 뻥 뚫린 나무 사이를 올려다보면 어둠이 내려앉아 샛별이 반짝인다. 
 

방학의 끝자락이다. 또다시 울며 불며 숙제를 하지 않겠다고 일기도 하루 이틀 써가며 다시 내일로 내일로 미뤄지는 일이 생겼다.       

작은 집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막내 작은 집이 있다. 외아들인 사촌 동생은 모든 형제들 중에서도 막내였고 외동이다 보니 집에 없는 게 없다. 그리고 최신식 슈퍼마리오 게임기.     


그 겨울 우리를 찾아왔다. 사촌 동생의 현란한 손동작과 게임 방법을 대략 파악하고 나름 순서를 정해서 돌아가며 게임을 했다. 화면 속 슈퍼마리오가 점프를 하고 벽돌을 깨면 마리오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스릴을 만끽하며 깃발에 도착하면 단계마다 통과할 수 있다. 9단계가 마지막 단계인데 불을 피해 피오나 공주를 구해 낼 수 있다. 마지막 코스. 조금만 더 하면 쿠바를 무찌를 수 있는데 방법을 터득하고 찾아내는데 몇 날 며칠 막내 작은 집으로 출근을 했다. 숙제도 잊은 채.  

   

아파트 한 동이면 두 마을이 함께하는 인구이다. 인사만 하는 정도의 요즘과는 다르게 한 동네, 이웃 동네까지 친구도 사촌도 많이 살았다. 함께 온 마을을 구석구석 누비며 속속들이 알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마다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놀이와 자연 속에서 뛰놀기 바빴다. 저녁 늦은 시간에서야 집에 들어가 대충 씻고 밥 먹는 정도였으니 숙제는 불안한 요소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사촌 형제들과 함께한 놀이 하나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더 흥미로운 건 그날들의 날씨와 풍경, 온도까지 고스란히 옆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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