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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마중 Nov 01. 2024

그 시절 방과 후 활동

“할머니, 왜 배다리야” 

“그전엔 저기 산자락 앞까지 물이 찼었어. 그래서 배가 들어와서 배다리지”

“그럼 여기는 왜 갓골인데”

“여기는 산이 많았지 깜깜한 밤이면 호랭이도 살고 여시도 살았어”

“진짜, 그럼 호랑이는 다 어디로 갔데”     


볕을 피해 처마밑에 앉아 콩깍지를 벗기는 나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좋아했다. 할머니 이야기보따리가 열리면 일을 하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할머니는 나를 할머니, 아빠의 과거 속으로 그리고 엄마와 결혼한 이야기 등 내가 모르는 할머니만의 이야기 속으로 어릴 적 만나보지 못한 아빠의 모습까지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가도 몸이 근질근질할라치면 할머니는 앞주머니에서 바스락 소리 나는 뭔가를 꺼내 재빨리 껍질을 벗겨 돌돌 말아 내 입속에 넣어준다. “뭐야”하고 입을 다물면 할머니 온기에 말랑말랑해진 엿이 입천장과 혓바닥에서 살살 녹는다. 몇 번 씹고 엿을 쪽쪽 빨아 입천장에 붙여 오래도록 녹여 먹는다.


점점 사라져 가는 엿맛에 아쉬워 할머니 호주머니에 시선을 주지만 할머니는 더는 내어 주지 않았다. 산처럼 쌓인 콩깍지를 퇴비장에 다 버리고 돌아오면 할머니 몸 어디선가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한 손에 쥐어 주며 “아무한테 얘기하지 말고 맛있는 거 사 먹어” 한다. 할머니의 거친 손바닥의 온기와 할머니의 냄새와 함께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며 지폐 한 장을 펴지도 않고 재빨리 호주머니에 넣고 호주머니 단속을 한다. 툭툭.


아침부터 매미소리가 요란 맞다. 요란 맞은 소리에 작은언니와 나, 동생은 할머니에게 불려 나가 고추밭에 도착했다. 포대 하나씩을 들고 한 고랑씩 들어가 쭈그리고 앉았다. 동생을 몇 개 따고는 “아악 벌레”하며 밭고랑을 빠져나가고 작은 언니와 나는 인상을 쓰면서 고추를 따기 시작한다. 빨갛고 상처가 나지 않는 잘생긴 고추로 말이다. 고개를 숙인 채 앉은 자세로 앞으로 전진하며 잘 익은 고추를 포대에 담을 때마다 '텅텅' 빈 소리에서 "척척"가득 채워지는 소리에 밭 한 고랑이 끝났다.  


다리가져려 코에 침을 '하나 둘 셋' 바르면 침이 다 마를 때까지 효과가 없어 일어나면 다리가 심하게 찌릿하다. 허리를 펴고 작은언니는 어디쯤인가 찾아보면 저 앞에서 고춧대가 흔들거린다. 그때 나타난 사마귀 한 마리. 놀랠 만도 하지만 고추밭에 있으면 생전 처음 보는 애벌레, 노린재, 무당벌레 벌레 천지다. 힘들고 지루할 틈 곤충들을 만나 소르라치게 놀라기도 하지만 어느새 벗이 되어 밭고랑 두 개를 끝낸다. 


볕이 얼마나 뜨거운 정수리 뜨겁다.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눈앞이 ‘핑’ 돈다. 이러다 쓰러지면 좋으련만 일하면서 한 번도 쓰러져본 적이 없다. 무쇠소녀다. 나는.

처음 시작하는 밭고랑은 언제나 파이팅이 넘치지만 '언제 끝까지 가나' 싶은 마음도 크다. 운이 좋아 엄마가 들어간 밭고랑을 만나면 엄마는 내 밭고랑의 고추를 따주기도 해서 훨씬 빠른 속도로 고추를 딸 수 있다. 수북한 포대를 들고 나와 토방에 깔아 둔 돗자리에 쏟아놓는다. 노린재도 딸려 왔다. 산더미 같은 빨간 고추만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가을이면 콩과 깨를 수확한다. 볕 좋은 곳에 콩가지를 말려 마당 한가득 채워놓고 도리깨질을 한다. 사방에 튄 콩도 하나하나 주워 포대에 담는다. 도리깨질 한 콩을 키에 담에 자연바람이나 선풍이 바람에 먼지는 날리고 콩만 아래로 떨어지면 포얀 서리태공이 빛을 발한다. 


9월 추석이 지나고 추수한 벼를 광에 보관하려면 뽀송하게 말려야 한다. 토방이며 마당, 빈 밭까지 파란 포장을 깔고 그 위에 벼를 늘어놓는다. 할아버지는 새하얀 고무신을 신고 벼를 갈라 벼고랑을 만든다.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스키 타는 모양새로 발을 번갈아가며 벼를 가르면 발등이 어찌나 간지럽고 따가운지 모른다. 몇 날 며칠 볕에 말린 벼는 할아버지의 손끝에서 결정이 되어 담기 시작한다. 80kg 쌀가마니.     

포장 위에 벼를 한 곳에 수북이 모아 2인 1조가 되어 한 사람은 쌀포대를 잡고 한 사람은 담는다. 그렇게 꽉 찬 쌀가마니는 오빠나 아빠가 등에 업고 광으로 가져간다. 광이 채워지면 어느새 깜깜하다. 몸에 묻은 먼지를 수건으로 탈탈 털기 시작하면 몸이 가렵기 시작한다. 빨리 씻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코끝은 차갑고 땀이 식어 찬 공기와 만나 온몸이 서늘하다. 춥다.    

  

봄에는 모를 심은 논에 허벅지까지 신는 장화를 신고 뜸 모를 한다. 장화가 맞지 않으면 맨살로 들어가 거머리와 싸움을 해야 했고 여름에는 마늘도 캐고 고추도 따고 풀도 뽑는다. 가을이면 콩과 팥, 깨를 수확하고 벼를 추수한다. 겨울이면 상에 서리태콩을 펼쳐 놓고 빛이 잘 드는 안방에 앉아 썩은 콩과 멀쩡한 콩을 고른다. 

학교 끝나는 나는 방과 후 활동으로 사계절 내내 집안일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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