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움과 반성문 사이
볕이 뜨거운 날, 지나가는 밭고랑에서 무를 하나 뽑아 손으로 닦아내고 이로 껍질을 벗겨 먹는다. 요즘처럼 흔한 편의점에서 마시는 음료 부럽지 않았다. 동갑내기 사촌집에 들렀다. ㅇ수는 남색 보이스카우트 단복을 입고 있었다.
“너 그거 하냐”
“응, 너는?"
5학년때도 말했지만 엄마는 단복 사줄 돈이 없다며 어렵다고 했다. 단짝 친구들은 갈색 단복에 흰 타이즈를 신었다. 야영도 하고 선서하는 모습이 근사했다. ‘동갑내기 사촌도 하고 다 하는데 나만 못하다니’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친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은 부러움의 돌덩어리 하나를 마음속에 넣고 지냈다. 그렇게 아픈 겨울을 보내고 같은 반 친구 누나가 졸업을 하면서 단복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엄마 나 친구 누나가 단복 물려준데 나도 할 수 있지!” 헐레벌떡 친구 집에 뛰어가 단복을 챙겨 왔다.
갈색이 단복 색이 바랬지만 내 몸에 착 맞았다. 걸스카우트를 한다는 것은 나는 특별하게 만들었다. 흰 타이즈도 갈색 단복과 모자도.
그날은 보이·걸스카우트 야영이 끝나고 친구들과 차부가 있는 주유소까지 걸어갔다. 진희네 양조장을 지나면 노란색 큰 창고 옆에 살짝 오르막 길 대추나무집이 있다. 평소 그 아래 보건소길로 지나가는데 그날은 대추나무에 대추가 눈에 띄었다.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 높이에 맞춰 한두개씩 대추를 따서 입에 넣거나 손에 들고있거나 달콤한 마음으로 대추를 따서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누구여 남의 대추를 함부로 따? 이늠들 나 따라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주인집 아저씨의 호통소리었다!
담아래로 뛰어 내려가 손에 든 대추를 슬쩍 버리고 친구들과 아저씨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집은 대낮인데도 볕이 들지 않아 어둑했고 여럿이 서 있기 비좁은 현관에 우리는 한 줄 서기를 하고 숨죽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저씨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검은색 유선 전화기를 꺼내 수화기를 든 아저씨는 “너네들 아빠 이름 말해”, “집 전화번호는 뭣여” 다그쳤다.
우리 셋은 얼음이 되었다. 누가 땡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싶은 심정이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들은 아저씨는 “너네들 반성문 써가지고 와”하며 우리를 풀어주셨다.
친구들과 떠들며 갔던 주유소길이 그날따라 더 멀게 느껴졌다. 누가 신발에 모래주머니를 달아 놓았는지 발걸음도 무거웠다. 걸어가는 동안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주유소의 화장실 칸은 여러 개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대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을 앞으로 메고 공책을 찾아 빈 종이 한 장을 찢었다. 종이 찢는 소리가 화장실을 가득 채웠다. 벽에 종이를 대고 ‘반성문’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화장실 안으로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야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