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에서 16년, 가족의 따뜻함과 추억도 많았지만 불편한 점도 있었다. 창고로 지어진 집이다 보니 지대가 낮아 바람이 통하지 않았다. 한여름 찜통더위는 오래된 에어컨이 대신해 주었다. 겨울에 창문을 살짝 열어 환기시키려면 아버지가 오가며 “보일러 틀어놓고 왜 문은 열어놔” 혼잣말로 마음이 불편했다. 튼튼하게 지어진 집임에도 낡은 창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잘 보관해 두었다가 무더운 여름에 사용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좁은 집에 대한 불편함은 큰 아이 사춘기 때 절정이었다. 큰 아이의 공간이 필요했기에 안방을 내주었고 작은 아이와 우리 부부는 거실에서 잠을 잤다. 잠버릇이 안 좋은 작은 아이의 발차기로 밤마다 “헉”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런 대화들이 일상에 웃음꽃도 피웠지만 각자만의 방이 절실했다.
나는 늘 집에 대해 고민했다. 해결되지 않는 상황 때문에 점점 불평하기 시작했다. 신랑은 잘 참아주었다. 아니 모든 상황을 잘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여유 있는 성격 덕분에 예민한 나와 무탈하게 지낸 것 같다.
나의 투덜거림은 일을 하면서 사그라졌다. 방학 때나 아이들이 갑자기 아파 등교를 못 하면 어머니가 끼니를 챙겨주었다. 작은 아이 돌봄 교실이 끝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교를 해주었다. 어머니가 아무 조건 없이 손자, 자식 사랑으로 도움을 주어 나는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 맞벌이하면서 살림이 불어나면서 분가에 대한 꿈도 키울 수 있었다.
시가 인근에는 새 아파트가 들어오지를 않았다. 아이들 학교 문제로 그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조용한 시골마을이 좋았다. 저녁 먹고 나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산책하기도 좋았고 자전거 타며 상쾌함을 느낄 수 있는 냇둑길도 좋았다. 가까운 곳에 땅을 사서 집도 지어볼까 알아봤지만 입에 맞는 땅도 거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여러 개가 생겨났다. 새 아파트가 지어질 때마다 모델하우스 둘러보는 것에 재미를 느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딱 맞게 떨어지는 아파트는 없었다. 소득 없이 돌아서는 발걸음은 늘 헛헛했다.
몇 달 뒤 H모델하우스에 가보자는 신랑을 따라나섰다. 깔끔한 실내화를 갈아 신고 별 기대 없이 A구조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와! 이거다” 작은 방과 거실이 확장된 구조였다. 널찍하게 잘 빠진 공간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입에 침이 마르듯 신랑에게 “좋다, 살아보고 싶다”하며 연신 감탄을 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 부부는 결혼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잘 통했다. “괜찮다”하면 “괜찮네”하고 대꾸했다. 나는 상상했다. ‘넓은 거실에 기다란 소파를 놓고 소파 뒤로는 기다란 나무 테이블에 차도 마시고 책도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
시원하게 비 내리던 그날, 신랑이 결심에 찬 얼굴로 H모델하우스를 한번 더 가자고 했다. 다른 아파트 볼 때 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따라나서는 내 발걸음도 가벼웠다.
어딜 가나 영역표시를 해야 한다며 화장실을 먼저 가는 신랑이다. 나는 신랑을 기다리지 않고 벌써 직원 앞에 앉아 설명을 듣고 있었다.
“선호하는 층수가 있을까요?”
“저는 단독에 살았던지라 높은 층수는 무서울 것 같아요 중간정도가 좋을 것 같아요”
“아파트 살아본 사람들은 살면 살수록 고층에 살고 싶어 해요. 저도 그래요”
18층, 20층 점점 높은 층수를 이야기해 주었다. 뭐 살다 보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18층 정도”하는 말에 직원은 A타입, B타입을 이야기하며 1804호를 보여주었다. 마침 화장실에서 나온 신랑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오빠, 1804호야. 너무 높지 않아?”
“그래, 5동 1804호!”
직원에게 더 물어볼 것도 없이 숫자를 계속 중얼거리며 “어 입에 딱 붙는데”하며 흡족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신랑이었다.
2년의 기다림을 가져야 했다. 시내로 볼 일이 있을 때나 주말에는 일부러 아파트 공사 현장을 찾아갔다. 건물이 한 층 한 층 올라가면서 “저기가 18층이네”하며 손가락 끝으로 찾아보기도 했다. 장마철에는 비 때문에 공사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괜스레 걱정도 해보고 겨울엔 눈이 많이 와서 어쩌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건물은 정상적으로 올라갔다.
마침내 사전 점검일이 다가왔다. 집과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정오의 볕이 확장된 거실에 한가득 했다. 따뜻했고 넓었다. 창문밖으로 탁 틔인 뷰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아래를 쳐다보니 아찔했다. 이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사전점검을 끝내고 입주 날짜가 잡혔다. 4월, 큰 아이는 아파트에서 버스 통학이 가능했다. 작은 아이는 전학을 해야 했다. 낯가림이 있어서 고민되었지만 흔쾌히 새로운 학교에 가보고 싶다는 포부를 보였다. 작은 아이의 말에 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8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 학기부터 작은 아이 통학을 해주었다. 왕복 한 시간 거리였다. 학교 보내고 나서 다시 돌아와 짐정리 해가며 그동안 못한 아침 산책을 다니기도 했다. 오후에는 작은 아이가 부탁한 간식을 만들어 학교 앞에서 대기하기도 했다. 작은 아이는 새로운 학교에 적응을 해나가며 집으로 가는 길 수시로 아파트에 들렀다. 오후 햇살에 누워 “좋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노래를 부르며 매일매일을 함께 기다렸다.
드디어 이삿날. 가져갈 짐은 많지 않았다. 신혼 때 장만한 가전은 15년도 넘게 사용해서 미련 없이 폐가전 방문수거로 정리했다. 나머지 짐들은 신랑 차에 빼곡히 실어 몇 번을 오가며 옮겼다. 점점 비어 가는 임시 거처를 보자니 후련함과 그리움, 만감이 교차했다. 남은 큰 물건은 아버지 트럭으로 옮겨야 했다.
“짐 내리고 차 마당에 가져다 놓고 갈 테니 주무슈”
신랑은 아버지 차 키를 꽂아 시동을 걸었다.
“그려.”
파자마를 입은 채 서성이는 아버지의 두 발은 갈 곳이 없었다.
“그동안 애썼다.”
애써 침착하게 말하는 어머니 한 마디에 나는 코끝이 찡했다.
“주무세요. 내일도 올 건데요, 뭐.”
나는 울컥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서둘러 차 문을 닫고 신랑은 곧장 출발했다.
자동차 백미러에 어머니, 아버지, 회색 시멘트 임시 거쳐도 점점 멀어져 갔다.
새도 달도 모두 잠든 어두운 밤. 신랑은 기어를 넣다 뺐다를 반복하며 무척이나 분주했다. 오래된 아버지 트럭은 속력이 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어’라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소리에 곤히 자던 동네 개들이 짖었다. 기어변속을 할 때마다 덜커덕거려서 나는 수시로 짐칸을 확인했다.
자정이다. 아버지 요란한 트럭을 시가 마당에 잠재우고 아파트에 도착했다.
낯설고 기분이 묘하다. ‘우리 집’이라는 단어가 어색하다. 풀어놓은 짐을 간단히 정리하고 신랑은 달게 잠을 잔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너무 피곤한 탓도 있었지만 기다림의 긴 시간은 사라지고 종이 앞과 뒤가 한순간에 바뀐 환경과 이곳에 놓인 나는 여러 감정들과 어색함을 안고 뒤척이다 새벽이 밝아왔다. 우리 집이 될 우리 집에서.
집을 계약하고 인근에 사는 동생네에서 다녀왔다. 승강기 문이 열리고 초인종을 누르려던 순간 1804호!
그랬습니다. 동생네는 1804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 모델하우스에서 입에 딱 붙는다는 신랑의 말에 이유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