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가봤니!
“제주도 몇 시 배 있나요? 자동차(인생 첫 차, 대학 졸업하고 첫 직장 다니면서 중고로 산 마티즈)도 실어야 해요.” 서해안 고속도로를 3시간도 더 달려 도착한 완도 선착장.
자동차를 싣고 가려면 오후 4시 전에는 와야 한다는 직원 말에 다음날 첫배 시간표를 확인했다.
하룻밤 묵을 민박집을 찾아 나서야 했다. 선착장 지대가 낮아 이미 해는 보이지 않았고 산비탈 그림자 안에 작은 마을이 까매지고 있었다. 완도도 처음이고 민박도 처음인 나로서는 더 어둡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도 언덕 중간쯤 회색 시멘트 민박집을 찾았다. 주인에게 열쇠를 받았다. 공동 화장실과 가까운 입구 쪽 작은방이다. 빛을 따라 화장실에 가서 고양이 세수를 했다. 방문을 서둘러 열고 재빨리 닫았다. 바닥에 깔려있는 요에 앉아 차에서 먹다 남은 과자와 소시지를 꺼내 허기진 배를 달랬다.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보니 나는 혼자였다. 갑자기 밀려오는 공포감으로 방문을 잠갔는지 여러 번 확인했다. 채널이 몇 개 나오지 않는 작은 텔레비전을 켜 놓고 목소리를 최대한 줄여 바깥 상황에 촉각을 세우며 잠이 들었다.
여객선 꽁지가 선착장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제주항 여객선터미널’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왔다! 나 혼자서 왔구나’ 감탄과 설렘 말고도 여러 감정이 뒤 섞였다.
“엄마, 나 제주도 갔다 와도 돼?”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갑자기 던진 한마디였다. “그래 갔다 와” 엄마는 이유도 묻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다음날 바로 트렁크에 버너, 물, 옷 몇 벌, 카세트테이프를 챙겨 출발했다. 그것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선착장으로 차를 찾으러 가는 들뜬 마음을 자욱한 안개가 가라앉혀 주었다. 먼저 제주도 관광지도를 샀다. 동그란 제주도를 한 바퀴 다 돌겠다는 마음으로 이제부터는 갈색 이정표를 보고 마음 닿는 곳에 멈춤이다. 그리고 지도는 거들뿐이다.
‘선착장과 공항을 기준에서 서쪽 방향으로 이동하자’ 운전대를 잡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제주 시내 중심에 용이 살았던 용천에 물이 흙탕물인 것을 보니 그동안 비가 많이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천을 따라 용두암을 지나 높지 않은 돌담길에 노란 유채꽃이 아름다웠다. 유채꽃을 보기에 살짝 늦은 감은 있었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꽃을 보니 제주도에 왔다는 것을 한번 더 실감했다. 이정표가 없어 더 깊숙이 들어가 보니 비행기가 뜨고 내리 고를 반복하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철망이 둘러있는 것을 보니 공항 뒤편까지 내려왔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달리다 보면 새로운 곳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이정표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길을 헤매야 했다.
‘스르륵스르륵’ 카세트테이프 늘어지는 소리가 났다. ‘도원경’ 노래 A면을 다 듣고 B면을 다시 돌려 들었다. 한참을 달려 애월이라는 이정표와 바닷가를 발견했다. 엊저녁부터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든든한 한 끼가 필요했다. 트렁크에 실어 두었던 버너와 물을 꺼냈다. 최대한 사람이 드문 곳을 찾아 모래를 판판하게 만들었다. 그 위에 버너를 놓고 바닷바람을 케이스로 막아 라면을 끓였다. 바다 옆에서 먹는 라면 맛은 바다 맛이 났다. 뜨거운 것도 모를 만큼 허겁지겁 먹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민망함이 밀려왔지만 배가 불러 기분은 좋았다.
그 기분도 잠시. 차에 짐을 실으려고 운전석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순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마를 바짝 창문에 대고 안을 들여다보니 차 키가 핸들 아래 그대로 꽂혀 있었다. 아뿔싸!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어서 렌터카보다 주변에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근처 상가로 가서 사정을 말했다. 아저씨는 밥숟가락으로 해보자며 창문 사이로 숟가락 손잡이를 넣어 툭툭 쳐보지만 길이가 짧아 택도 없다. 다시 기다란 철사를 가져와 몇 번을 툭툭 치니 ‘달칵’하고 걸리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차 문이 열렸다. 아저씨도 안도하며 살짝 웃었다. 나는 환호하며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여 몇 번을 인사했다. 제주도에서 만난 첫 번째 감사함이다.
크라잉넛 카세트테이프로 바꿔 넣고 한껏 기분을 올렸다. 산방산을 지나 햇살 좋은 시골 풍경과 한라산을 바라보며 내륙 쪽으로 달리다 보니 녹차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아마 지금의 오설록이었던 것 같다. 한 할머니가 집채 만 한 짐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움을 드리고 싶었고 누군가와 대화할 일이 없던 나는 대화상대도 필요했다.
“할머니 어디까지 가세요. 제가 태워 드릴게요?”
할머니는 밝은 표정으로 뒷문을 열어 짐을 짊어진 채 앉았다. 할머니 사투리에 이해되지 않는 말도 있었지만 나의 여행을 걱정해 주며 도착지에 내렸다. 짧은 대화였지만 푸근함을 느끼며 할머니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좀 전에 왔던 길을 다시 돈 기분도 들었지만 길은 다 통해져 있다는 생각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갈색이정표를 찾아 동네 관광지를 찾아다니다 보니 해가 뉘엿뉘엿하다. 시골마을에서 민박을 잡기는 어려울 것 같아 서귀포 시내로 차를 돌렸다.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깜깜했다. 창문을 열어야만 낯선 서귀포 시내의 여관이나 민박을 찾을 수 있었다. 마침 여사장님이 카운터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옆방을 달라고 했다. 전날 묶었던 방보다 훨씬 신식이었다. 작은 침대도 있었고 텔레비전도 컸다. 짐을 내려놓고 가까운 식당을 찾아 끼니를 해결했다.
처음으로 여유가 있던 저녁시간이었고 마침 이메일도 확인할 겸 PC방을 찾아 들어갔다. 그동안 받은 편지함에 읽지 않은 편지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 확인을 하고 답장을 했다. 그때는 수시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편지를 주고받는 게 일상이었다. 지금의 SNS처럼 말이다.
다음날 아침, 서귀포 시내를 빠져나오니 제주에서 처음 보는 듯한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이정표에는 ‘월드컵경기장’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2002년 제주월드컵경기장이 완공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경기장을 직접 들어가 보았다. 규모가 어마어마했고 구경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중에 나도 있다는 사실과 곧 월드컵이 이곳에서 열린다는 상상을 하니 괜스레 우쭐해지는 기분이 최고였다.
이런 순간은 남겨야 했고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인증샷도 찍었다. 그때는 휴대폰 화질이 좋지 않았다. 일회용 카메라를 사서 찍는 게 최선이었다. ‘찌찌찌 찍’ 플라스틱 버튼을 누르면 찰칵하고 소리가 났다. 찍혔나 안 찍혔나 믿지 못할 찰칵 소리지만 어쩔 수 없다. 여행이 끝난 후 사진관에서 현상을 해야 사진이 잘 나왔는지 알 수 있으니 그 궁금함은 언제나 기다림이었다.
서귀포 중문단지 안에 쉬리 촬영장을 지나 몇 개의 폭포 앞에서 사진도 찍고 오징어가 널려있는 바닷가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표선민속촌을 구경하고 해가 떨어지기 전 성산일출봉 인근에 도착했다.
높은 상가도 별로 없었고 대부분 민박, 가정집, 작은 식당 몇 개가 전부였다. 차를 주차한 곳 집 앞에 손 글씨로 ‘민박합니다’ 붙여 있었다. 아줌마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인상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손자가 도시로 나가 남은 빈 방을 민박으로 쓰고 있다며 소박한 저녁밥을 차려줬다. 이틀 동안 식당에서의 혼밥과 햄버거, 라면이 전부였는데 포근한 저녁 한상이었다. 혼자 먹는 내가 안쓰러웠을까 옆에서 다 먹을 동안 이야기를 나눠줬다. 매일 이른 아침 성산일출봉에 올라간다는 할아버지는 같이 가고 싶으면 일찍 일어나라고 당부했다. 나는 늦지 않게 일어나기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낯선 방 천장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어른 1명 2,200원 하는 표를 끊고 할아버지를 따라 안갯길을 헤치고 걸었다. 꽤 가파른 길이였다. 안개가 심해서 정상에 올라간다 해도 일출 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할아버지를 뒤따라가는 나는 힘든 티를 내지 못했다. 동행해주시는 할아버지에 대한 예의였다. 할아버지는 여기가 정상이라며 명당자리에서 사진도 찍어줬다. 제주에서 받은 또 하나의 감사함이다.
며칠간 있을지도 어디를 갈지도 정하지 않았다. 무작정 떠났던 제주도였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고는 도로 구석구석 잘 만들어 놓은 갈색 이정표와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와 함께한 마티즈, 카세트테이프, 엄마의 한마디 “갔다 와”. 그 용기로 제주도 한 바퀴를 돌았다.
두려움보다 큰 나의 새로운 도전을 보여줬던 22년 전의 5월,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마티즈에는 메밀꽃밭의 두엄 냄새와 한라봉, 제주시장 어느 골목 할머니에게서 산 완두콩 한 봉지, 제주가 한가득 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나의 믿음과 용기도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