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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마중 Dec 06. 2024

아들이 뭔지

아들 때문에 산다는 보호막을 벗고 엄마로서 살아 그게 당연하 거야!

해가 앞산을 넘어가기도 전 ‘드르륵 쾅’ 차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쿵쿵’ 계단 세 개를 오르니 현관문이 열렸다. 저녁 햇살을 따라 엄마 일 가방이 바닥에 던져졌고 엄마는 다시 문을 닫으며 “해 떨어지기 전에 빨래 걷어놓고 할아버지 진지 챙겨 드려” 


동생과 나는 엄마 일 가방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가방 안에는 새참으로 받은 빵과 멸균우유가 있었다. 동생과 경쟁하듯 평소 먹지 못하는 간식을 찾을때면 엄마가 하루 종일 썼던 모자, 팔 토시, 흙으로 물든 장갑에서는 선크림, 샴푸 향, 땀 냄새가 뒤 섞인 엄마향이 가득하다. 일 가방을 뒤적거릴 때마다 올라오는 향을 느끼면 문을 닫고 이내 사라지는 엄마품처럼 아늑했다.


집 근처에 엄마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할아버지 식사는 내가 차려야 했다. 엄마가 아침에 끓여놓은 돼지고깃국을 데우고 김치와 멸치볶음을 꺼내 은수저를 가지런히 내려놓고 “할아버지 진지 드세요” 하고 할아버지 방문을 두드렸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할아버지는 방문을 열고 “어미는 아직 안 왔어?”묻는다.   


‘드르륵 척, 드르륵 척’ 어둑해질 무렵 요란 맞은 삽 찍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렸다. 엄마가 집으로 향하는 소리다. 화장실에서 엄마가 씻는 물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내 방문을 닫을 수 있었다.      


홀로 된 엄마 옆에서 둘이 함께 한 시간이 몇 해다.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진작부터 집 떠나 타지에서 일을 했고 오빠는 군대를 갔으니 엄마 곁에는 중학생 동생과 고등학생 나뿐이었다. 논농사와 밭일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나였다. 주말만 되면 엄마를 따라 논두렁을 다녔고 더운 날에는 새참과 물을 챙겨 드렸다. 품앗이라도 가시는 날에는 할아버지 점심은 항상 내 몫이었다. 12시 전에 드리면 ‘왜 이렇게 일찍 먹느냐’ 늦게 드리면 ‘왜 이렇게 늦게 먹느냐’ 하셔서 정각 12시 땡 하는 시계소리를 기다렸다가 가스에 불을 끄고 밥을 퍼서 “할아버지 진지 드세요”했다. 선비님 같은 할아버지.     

 

엄마는 한날한시도 여유 없이 일만 했다. 봄, 여름, 가을, 초겨울까지 온갖 농사에 무 작업 품앗이까지 했다. 새벽 일찍 나가서 밤늦은 시간에 들어오는 엄마를 볼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았다. 엄마가 유일하게 쉬는 날은 비 오는 날이었다. 그런 날은 집안 가득 엄마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평소 엄마가 좋아하는 뽕짝 메들리가 울려 퍼졌다.      


“엄마 토요일 저녁에 밥이나 먹을까?”

“밥은 무슨 밥이여 논에 피가 너 만 해!”

더운 공기가 조금 누그러진 주말 오후다. 엄마가 좋아하는 족발을 사 들고 친정에 갔다. 유통기한을 알 수 없는 꽉 채워진 냉장고에 족발이 들어갈 만한 공간을 만들어 넣고는 신랑과 논으로 나갔다.      


“왔어”하며 우리를 보는 엄마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다. 농약 냄새가 진동했다. 엄마는 서둘렀다. 약통을 보니 한강처럼 가득했다. 적어도 2시간이다. 2시간은 꼼작 없이 농약냄새와 땀범벅이 되겠다 싶었다. 엄마가 논으로 들어가 농약줄을 잡아당기는 것을 보니 이제 시작이다. 이제부터는 엄마의 걸음걸이와 줄을 잡아당기는 강도에 집중해야 했다. 엄마가 줄을 잡아당겨 걸어가면 빨리 줄을 풀어 뒤따라가고 엄마가 방향을 바꾸면 방향에 맞게 줄을 끌어당기거나 풀어줘야 했다. 엄마와 나는 호흡이 척척이였다. 아니 나는 엄마를 잘 도왔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와 이마에 땀을 식혀 주었다. 

“엄마 이제 약 없어” 소리치자 논 가장자리에 서 있던 엄마는 “없어”하며 논두렁으로 나왔다. 질질 나오는 약까지 벼를 향해 주었다. 일을 끝냈다는 홀가분한 한숨을 쉬며 엄마는 뒤따라 나오는 신랑에게 뭐라고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신랑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신랑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나에게 포기한 표정으로 엄마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줬다. 

“인서방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죽어라 일하는지 아나?”

“새끼들 잘되라고 하는 거쥬!” 

“아녀. 아들 하나 잘 되라고 내가 이 고생을 하는 거여.”

“다른 새끼들이 들으면 서운하다고 하겠슈”  

    

나는 미련스럽게도 속상하지 않았다. 왜 그랬냐고 지금에 나에게 물었다. 아들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어릴 적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엄마의 외로운 삶과 신랑의 부재로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힘든 날들에 대한 보호막.


나는 이유없이 당연했다. 당연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들 때문에 산다는 말보다 엄마를 위해서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는 그럴 자격 있으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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