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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May 09. 2024

친구도 다 때가 있다

자주 만나는 사람은 계속 바뀐다

경태 씨의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 갔다. 오래전부터 집에 한번 초대하고 싶다고 얘기를 했었는데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았다가 얼마 전 주차장에서 만나 확실하게 날짜를 정했다. 그동안 우리는 ‘조만간’을 너무 반복했으므로.


경태 씨와 만난 건 4년 전이다. 점심시간 마감을 앞두고 한 남자가 혼밥을 먹으러 가게에 들어왔다. 한창 바쁜 시간이 지난 가게 안은 조용했고 늦은 점심을 먹는 손님들도 모두 빠져나간 후였다.

곧 식사가 나왔고 주방과 가까운 자리에 앉은 그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을 시간이다.

오버 사이즈 핏의 셔츠와 면바지의 평범한 차림이었지만 타원형의 둥근 뿔테 안경이 그가 그저 심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밥을 천천히 먹던 그가 갑자기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던 건 그때 매장에 흐르던 음악 때문.


-tears for pears?


반가움이 잔뜩 머금은 목소리는 나에게 ‘지금 이 음악이  tears for pears 음악이 맞죠?’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 역시 이 음악을 아는 사람이 있어 반가운 건 마찬가지였다.


-오. 아시네요. 젊은 분이신데 음악 많이 들으시나 보네요.


-아. 네. 너무 오랜만에 들었는데 갑자기 들으니까 너무 좋은데요.


우리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남자는 식사를 계속했고 나는 홀을 마저 정리했다. 식사를 마친 남자가 계산을 하며 얘기했다.


-사장님! 너무 잘 먹었습니다. 음악도 좋았어요. 식당에서 음악 듣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 잖아요. 덕분에 기분 좋게 밥 먹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이 앞에 와인바를 열거든요. 앞으로도 자주 올게요. 정식으로는 다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가게를 나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기분이 좋았다. 단정하고 다정한 말투로 자기를 간단히 소개하는 화법이 좋았던 것 같다. 몇 주 후, 떡을 가지고 온 그가 가게에 들렀다. 손글씨로 쓴 작은 편지도 함께였다.


'안녕하세요. 와인바를 오픈하게 된 ooo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종종 들러서 좋은 시간 많이 만들어요.'


좋은 글씩체는 아니었지만 손으로 꾹꾹 눌러쓴 그의 편지를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하는 거구나,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웃들과 안면을 틀 수 있는 거구나.'


떡을 돌리며 인사하는 행위가 다 고리타분한 일인 것만 같아 생략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크게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직장인의 티를 벗지 못한 애송이였다.


그 후로 우리는 서로의 가게를 오가며 꽤 친해졌다. 길에서 우연히 라도 마주치면 길 한편에 서서 수다를 떨었다. 알고 보니 나보다 여덟 살이 어린 그는 모텔이나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숙박업도 하고 있는 사업가였는데 곁에서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태도가 좋은 사람이었다.

코로나를 함께 겪으며 우리는 같은 고통을 나누었다. 작은 매장을 하나 운영하고 있는 나와 여러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그가 느끼는 고통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늘 의연하고 흔들림이 많지 않은 그를 보면서 배운 점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나의 아내와 경태 씨가 친해지고 경태 씨의 아내와 나도 친해졌다. 관계가 조금씩 넓혀진 것이다. 나는 그게 좋았다. 빠르지 않고 천천히 친해진 것!






경태 씨의 집에서 오후 6시에 모인 우리는 다음날 새벽 3시가 돼서야 헤어졌다. 천천히 술을 마시며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있었던 것. 시계를 보지 않고 놀았던 게 오랜만이었다.


가게를 시작하며 오래 사귄 친구 한 명을 잃었다. 서로의 이기심과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앙금이 부딪혔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서운하고 그 역시 그럴 것이다. 아마 평생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도 큰 관계는 없을 것 같다. 친구와 헤어짐을 마음먹었을 땐 오랜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느낌이었다. 밉고 되돌리고 싶다가 그리움이 찾아온 후 잊게 됐다. 고등학교 동창이었지만 스물에 친해진 그 친구와 싸운 건 마흔 하나였다. 20년을 친하게 지낸 친구와 헤어진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가장 치기 어린 시기를 함께 보냈고 조금씩 이해심이 넓어질 시기에 서로를 등졌다.


다 때가 있다. 나는 조금씩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날 술자리의 마지막 즈음에 그런 얘기를 했었던 것 같다.


-사람들에겐 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이 우리의 때인 것 같네요.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잔을 들었다. 여러 개의 잔이 가운데로 모였다. 가볍게 잔이 부딪혔고 다들 공감의 한 모금을 마셨다.



와인으로 시작해 럼과 진으로 끝난 그날의 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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