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일한다는 것.
만약 당신이 엄마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먼저 하게 될까?
누군가에겐 기쁨이겠고, 누군가에겐 행운이겠고, 누군가에겐 고통이겠고, 누군가에겐 호기심이겠고, 누군가에겐 다행이겠고, 누군가에겐 슬픔이겠고, 누군가에겐 책임이겠고, 누군가에겐 보은이겠고, 누군가에겐 부담이겠다.
나는 책임이 가장 컸다.
내가 언제까지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 없는 것. 그것을 나는 오직 책임감 하나로 기꺼이 짊어지기로 했다.
노후 자금이 넉넉지 않은 부모님은 몸이 편치 않은 아버지 대신 엄마가 계속 일을 해야 했다. 엄마는 식당일을 하며 두 형제를 키웠고 아버지가 편찮으실 땐 운영했던 식당을 미련 없이 접고 아버지의 병간호에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쏟아부었다. 평생 일을 해도 돈이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돈이 조금 모일만 하면 아버지가 아팠다. 그 반복의 시간 속에 엄마는 늙고 있었다.
나는 크면서 엄마의 고생을 가끔은 외면하며 살았다. 그래야 나도 조금은 행복할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언제나 버릇처럼 “네 엄마 고생 좀 그만해야 한다”라고 얘기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세상의 어떤 말보다 그 말이 고까웠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떠넘기는 말처럼 느꼈으니까….
가게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엄마의 잃어버린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야간에 식당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늘 맘에 걸렸지만 쉽게 관두게 하지 못했다. 엄마가 관두는 순간부터 내겐 부담이 시작되는 것이었으니까….
결혼을 하고 내 가정을 갖자 자연스레 엄마의 피곤한 모습을 덜 보게 되었다. 양심이 가책이 덜해졌다. 부모를 자주 보지 못하니 부모에 대한 책임감에서 잠시 벗어난 것이다.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현실에 대해 잠시 눈을 감으니 행복했다. 아니 행복한 것 같았다.
엄마와 식당을 함께 해보면 어떻냐는 아내의 권유를 처음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가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엄마의 독립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했다. 2년만 함께 일을 하면서 시스템을 만들고, 집에서 가까운 곳에 메뉴 한두 가지만 하는 작은 식당을 열어주는 것. 그게 우리의 현실적인 목표였다. 가게를 오픈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져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가게를 오픈하고 엄마는 100% 내 의견에 따랐다. 엄마는 식당에 대해 나보다 더 베테랑인데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그런 오픈 마인드가 참 좋았다. (물론 자식이어서 그랬겠지만)
메뉴의 레시피를 만들어 갈 때, 어떤 메뉴를 할지 대충 설명을 하면 엄마는 귀신같이 그 맛을 재현을 해냈다. 물론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맛을 낸 것은 아니었으나 시행착오 과정에서 내 머릿속에 있는 맛을 설명을 해주면 엄마는 금방 그 말을 알아차리고 맛을 고쳤다. 그건 오직 우리 둘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함께 많은 음식을 먹어보고 만들어 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교감. 엄마와 나에겐 그게 존재했다.
처음 오픈하고 손님이 별로 없을 때, 내가 가장 노력했던 건 손님이 음식을 남겼다 치면 얼른 빨리 음식물 처리통에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손님이 깨끗하게 먹은 것은 치우면서 굳이 엄마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봐. 온 사람들은 깨끗이 다 먹잖아. 금방 손님이 늘 거야.”
자신감!
무엇보다 엄마에겐 그게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외국인들이 많이 오면 좋았다. 표현에 비교적 인색한 한국 사람들보다 외국인들은 조금만 입맛에 맞아도 호들갑을 떨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외국인들이 엄마에게 맛있었다고 얘기를 하면 엄마는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게 정말로 좋았다.
한국 사람들도 물론 표현은 했다. 음식에 대한 맛 표현은 아니고 다른 형식의 표현인데 나는 그것 때문에 조금 힘들 때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익숙해지기 시작할 무렵, 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인사를 하며 가게를 나갔다.
“어머니 고생 정말 많이 하시네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땀을 흘리는 엄마를 보며 나를 나무라듯 신경질적인 말투로 ‘어머니 정말 더우시겠어요.’라고 얘기했는데 나는 그때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저들에게 저런 식의 말을 들어야 하지? 한두 사람도 아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에게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니 불편하기도 하고 신경질도 났다. 그리고 궁금했다.
한 달 정도 지나니 나름대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백종원이 출연하는 TV 프로그램이 문제였다.
빌어먹을 골목식당!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식당 중에 아들과 엄마가 함께 운영하는 식당은 대부분 아들이 엄마를 고생시키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니 사람들의 인식 속에 부정적인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그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사람들의 불편한 눈빛을 감수해야만 했다. 골목식당이 방영하는 다음날엔 특히 더 그랬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즈음 아내에게 엄마와 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사실 그 일뿐만 아니더라도 나는 엄마와 단 둘이 일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친척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조금씩 힘들어지기도 했고 우리 가족의 개인적인 문제들로도 자주 다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보다 보니 작고 크게 챙겨줄 일이 많은 것도 때때로 귀찮았다. 엄마는 전화기에 모든 광고 문자에 대해 물어보았고 나는 그때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부모는 자식의 끊임없는 물음에 기꺼이 대답해 주어 왔지만 자식은 부모의 물음이 그저 귀찮은 것이었다.
나의 투정을 차분히 들은 아내가 말했다.
“그래도 나중에는 분명 지금의 시간을 잘했다고 생각할 거야. 그 누구도 모르는 어머니와 당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니까.”
맞는 말이었다. 가끔 아내는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얘기를 해줄 때가 있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식당을 시작한 이유를 마음에 새로 새겼다.
가게를 시작하고 나는 시간을 잃었다.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종일 가게에 있다 보면 시간이 아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손님이 없으면 더욱 그렇다. 내가 시간을 잃은 대신 엄마에겐 새로운 시간을 찾아주었다. 일하는 시간을 줄여주고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을 찾아주었다.
그것만으로 나는 식당을 운영하는 이유가 있었다. 더 큰 목표가 물론 있었지만 최소 그것만으로도 됐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는 엄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많은 끼니를 함께 하면서 우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지난 얘기들을 많이 한다. 엄마의 개인적인 얘기, 내가 어릴 때 가지고 있던 기억들, 그리고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수많은 얘기를 하며 밥을 먹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엄마는 늘 못해준 것만 얘기한다. 나는 못해준 게 아니었다고 장담하건대 나는 그렇게 못했을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냐고 대답한다.
우리 둘은 여전히 그렇게 마주 앉아 지난 얘기를 하고 눈물을 삼켜가며 밥을 먹는다. 어제도 오늘도 그랬다.
엄마와 함께 식당을 하며 동료가 없다고 푸념했던 나를 반성한다. 동료가 없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엄마도 또래의 동료가 필요했을 것이다. 엄마에게도 ‘미스터트롯’에 나오는 가수들을 함께 얘기할 수 있는 동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작은 농담에도 자지러지게 함께 웃는 동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나만 힘든 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