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식당
겨울을 핑계 삼아 무절제하게 먹었더니 체중이 불었다. 절식을 시작했다. 아침 겸 점심은 과일 음료로 대신하고 저녁 한 끼는 가게에서 먹고 있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긍정적인 건 예전보다는 식욕이 줄었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 든든하게 먹어야 직성이 풀리던 때에 비하면 지금이 절식하기에 훨씬 편하다.
자영업을 하면서 늦게까지 일을 하다 보니 밤 열 시가 되면 어김없이 허기가 찾아온다. 어제도 그랬다. 반가운 손님들이 오셔서 조금 더 편안하게 드시라는 의미로 연장 영업을 하다 보니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문을 닫게 됐다. 뭐든지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밤늦게 까지 하는 가락국수집으로 갈지, 24시간 영업하는 돈가스집으로 가서 돈가스와 매운 냉면을 먹을지 고민이었다.
두 가지 메뉴 중에 고민하다가 결국 집으로 곧장 왔다. 먹고 나면 잠을 늦게 잘 게 뻔하고 늦게 자면 다음 날 늦게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조금 쉬다가 가게에 출근하기 바쁘고.
그렇게 하루가 무너질 게 뻔했다. 당장의 허기보다 그게 더 싫었다.
집에 오자마자 씻고 누웠다. 평소에는 TV를 한 시간 정도보다 자연스레 자는 편인데 그러지 않았다. 새벽에 먹는 프로그램을 왜 이렇게 해대는지.... 돈을 벌고 밥을 먹고 온통 그런 프로그램뿐이다. 바보상자는 진짜 바보를 만드려고 작정한 것 같다. 안 보는 게 여러모로 속 편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가벼웠다. 눈을 뜨자마자 어제 참고 잔 자신을 칭찬했다.
점심 즈음, 아내와 문래동까지 걸었다. 바람이 찼지만 걸을만했다. 좋아하는 식당을 가는 길이었으니까. 문래동 '소문난 식당'의 묵은지고등어찜은 그야말로 끝내준다.
김치찜인데 김치가 짜지 않고 고등어는 밑간이 배지 않아 심심한 편인데 바로 그게 포인트다. 도톰한 고등어살을 젓가락으로 크게 발라 김치와 싸 먹으면 어디에서도 먹기 힘든 담백한 고등어 본연의 맛이다. 식당 리뷰를 보니 어떤 이는 간이 잘 안 배서 실망이라는데 이 식당은 바로 그게 맛의 비결이다. 고등어는 쉽게 비려져서 적당한 간이 필수다. 그런데 간을 하지 않고도 비린 맛을 잘 잡아낸 건 소문난 식당이 자부할 만한 점이다.
얼마 전에 처음 먹고 아내를 데려온 것인데 아내 역시 쌀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흔치 않은 일....
고등어와 김치를 다 건져내 먹고 나니 자작하게 고인 조림육수만 남아 있다. 두 수저 정도 남은 밥에 조림육수를 수저로 듬뿍 떠서 밥에 말았다. 그래도 짜지 않다. 심심한 김치와 고등어의 감칠맛이 잘 밴 육수와 흰쌀밥의 궁합은 말해 무엇하랴!
밥을 다 먹고 집에는 조금 더 돌아가기로 했다. 맛있는 밥을 먹은 후 걸으니 잠시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걷는 게 우리의 여행 스타일이니까.
바람이 차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내에게 목도리를 빙빙 둘러주었다. 얼마 전 목도리로 바라클라마 만들기 영상을 본 것이 생각났는데 막상 해보니 쉽지 않았다. 한쪽 귀가 잘 덮어지지 않아 마치 환자가 붕대를 휘감은 것처럼 보였는데 어떻냐고 묻길래, 반고흐 같다고 말해주었다.
볕이 들지 않는 터널을 지났는데 날카로운 고드름이 천장 그물에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두껍고 길게 얼어서 만약 떨어질 때 사람이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큰 사고가 날 게 분명했다. 지나쳤다가 아내에게 말했다.
-저거 다 떨어뜨려 버릴까?
적당한 돌멩이를 손에 쥐었다. 던졌다.
단 한 번에 고드름이 떨어졌다. 미치도록 정확한 제구력.
-오호호호호호
아내의 탄성이 등 뒤에서 들렸다.
제일 놀란 건 나 자신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어깨는 조금 으쓱거렸겠지만 패딩에 두꺼워서 티는 안 났을 것이다.
별 거 아닌 거에 기쁜 날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모처럼 개운한 아침이 좋았고 심심한 묵은지김치찜이 좋았고 아내와 함께 걷는 게 좋았고 누군가에게 닥칠 위험을 하나 제거 한 것이 좋았다.
좋아하는 식당을 종종 찾아가는 건 기분을 좋게 하는 방법 중에 참 쉬운 한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