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딘타이펑에 가야하는 이유
오전 9시.
커튼을 쳤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노출콘크리트 건물이 많은 대만은 비가 내리니 더욱 진한 회색빛으로 변했다. 해가 쨍쨍할 땐 차분한 느낌이었는데 비가 내리니 우중충하고 우울한 느낌이다.
딘타이펑은 사람이 많으니 무조건 오픈런을 하라고 토비가 일러주었다. 열 한시부터 오픈인데 적어도 30분 전에 가서 줄을 서 있어야 한다고....
주말도 아니고 평일인데 그럴까 싶었는데 검색해 보니 시간을 잘 못 맞췄다간 오래 기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밖으로 나오니 부슬비가 내렸다. 숙소에서 지하철역이 가까웠고 딘타이펑도 중산역에서 가까워 우산이 없어도 걷는데 무리가 없었다.
타이베이 역에 짐을 맡겨두고 중산역까지 지하도로 걸어가면 된다. 밥을 먹고 조금 돌아다니다가 다시 타이베이 역으로 와서 짐을 찾아 공항철도를 타면 끝. 늦어도 2시 반에 타이베이 역에서 출발하면 되니 딘타이펑에 갔다가 산책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타이베이 역에 짐을 맡겼다. 거대한 타이베이 역 곳곳에 캐리어보관함이 있어 여행자가 이용하기에 좋다. 다만 그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해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짐을 맡긴 보관함의 위치를 헛갈리기 쉽다. 그만큼 역이 넓다. 보관함에 짐을 넣은 후 고유번호 사진을 찍어두었다.
지하도를 따라 걸었다. 이틀 전, 타이난에서 타이베이로 왔을 때 걸었던 길이라 익숙했다. 중산역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니 건너편에 백화점이 보였는데 벽면에 사람들이 길게 줄 지어 서 있었다.
‘설마 저 사람들이 딘타이펑이 오픈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사람들 뒤로 줄을 섰다. 직원이 다가왔다. 한국에서 왔냐고 묻더니 QR코드가 있는 번호표를 주었다. 78번.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졌다. 줄을 서 있는 공간은 백화점 건물이 지붕이 돼주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습도가 높아지며 금세 후덥지근 해졌다. 대기 줄은 계속 늘어났다. 과연 딘타이펑의 나라답다. 다만 대만 사람들은 없는 듯!
-한국에서 오셨어요?
바로 뒤에 줄을 서 있던 아주머니께서 말을 걸어왔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였다. 질문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고 대답했다.
-아. 네.
-이게 다 줄인가 봐요?
-네. 그런 거 같아요. 저희도 처음이라….
70대 정도로 보이는 부부는 기다리는 동안의 무료함을 대화로 털어 내려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머리가 희끗했지만 허리가 꼿꼿했고 백팩을 메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얇은 니트 모자와 얼굴에 비해 큰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두 분 모두 편안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주문했어요? 이거 QR코드 찍으면 메뉴판이 나오는 데 미리 주문할 수 있데요. 미리 주문해 두면 음식이 빨리 나온다네요.
QR코드를 찍어보니 메뉴판 페이지가 나왔고 바로 주문을 넣을 수 있었다. 종업원이 건넨 대기표는 우리가 배정받은 테이블 번호였고 미리 주문까지 가능했던 것이다. 샤오롱빠오, 새우샤오마이, 볶음밥, 오이, 송로버섯수프를 주문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빨리 주문했어요.
-우리 아저씨가 그런 게 워낙 빨라요. 알아보는 거 잘하거든.
아주머니는 아저씨가 자랑스러운 듯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게요. 저희보다 정보가 더 빠르시네요.
갑자기 사람들이 걷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열 한시. 입장이 시작된 것이다. 식당에 들어가겠다고 종종걸음으로 다 같이 걷고 있는 게 조금 웃겼다. 한국에서도 하지 않는 오픈런을 대만에서 하다니….
다행히도 우린 첫 타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식당이 커서 오픈런으로 기다린 사람들 대부분이 자리를 잡고 앉은 것 같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줄 서있을 때 뒤에 있었던 노부부는 바로 옆자리에 배정받았다. 테이블 간 거리가 가까워 멀리서 보면 한 테이블로 보일 정도다. 미묘하게 어색했지만 서로 반가운 말을 주고받았다. 먼저 말을 건넨 건 아주머니였다.
-아이고! 바로 옆자리였네. 가까이 있으니 좋네요.
-네. 누가 보면 일행인 줄 알겠어요. 하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미리 주문을 해서 그런지 음식이 바로 나왔다. 대충 봐도 옆 테이블과 비슷했다.
-우리랑 시킨 게 같나 보다.
-예. 워낙 한국사람들에게 유명한 게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과묵한 아저씨와 다르게 아주머니는 말을 계속 붙여왔다. 30 대때만 해도 그런 게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아프신 이후로는 어른들이 건강하게 다니시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번에는 아내가 먼저 말을 붙였다.
-그런데 어디에서 오셨어요?
-저희요? 안동이요.
아내와 난 빠르게 눈길을 주고받았다. 안동 출신인 아내는 어른들을 대할 때 예의를 잘 차리며 대하는 편인데 안동에 사는 분들이라 하니 조금은 더 경직돼 보였다.
-두 분은 어디 살아요?
-저희는 서울 살긴 하는데 아내가 안동 출신입니다.
-아이고, 반가워라.
안동 출신임을 밝히고 나니 아내와 아주머니의 조금 더 개인적인 얘기가 이어졌다. 어디에 사는지, 안동은 얼마나 자주 가는지, 언제까지 살았는지 등등….
두 분은 아저씨께서 은퇴 후,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고 있다고 했다. 작년에는 네덜란드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셨다고….
가게를 관두면 어디든 한 달 살기를 하자고 약속한 우리로서는 두 분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아내가 어떻게 두 분이서 다니시냐고 대단하시다고 얘기하니 패키지여행은 한 번 했다가 갑갑해서 두 번은 못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아저씨가 원체 갑갑한 걸 힘들어해요.
-네, 맞아요. 패키지는 더 피곤하죠.
-그것도 그렇지만 우리 아저씨가 은퇴하기 전까지 교도관으로 일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밖으로 나다니는 걸 아주 좋아해요.
갑갑한 걸 싫어한다는 어르신이 단번에 이해됐다. 평생을 교도관으로 일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경직된 그곳에서 정년을 마치고 남은 생을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내 조용하게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저씨가 처음으로 대화에 참여했다.
-패키지여행은 선생님 쫓아다니는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어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차 타고 있다가 여기 보라고 하면 보고, 사진 찍으라고 하면 찍고, 먹으라면 먹고. 여행을 하고 집에 왔더니 남는 게 없어!
나는 '이번 우리의 대만 여행이 그랬어요. 친구가 계획을 잘 짜줘서 좋긴 했지만 남는 게 없어요.'라고 거들고 싶었지만 토비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험담을 하는 것만 같아 관두었다.
우리가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70이 넘으면 체력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40 대 중반인 우리는 70세까지 25년이 남았다. 1년이 금방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다. 서로 아껴주며 돌아다니기에도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게다가 우린 둘 다 애주가들이다. 건강 걱정 없이 술을 함께 마실 수 있는 시간은 더 짧을 게 뻔하다. 둘 중의 한 사람이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우울해져 버릴 것이다. 가장 친한 술친구를 잃어버리는 것이니깐.
서버가 맥주를 테이블에 놓았다. 아내에게 한잔을 따라 주고 내 잔에도 가득 채웠다. 어르신들은 술을 하지 않는지 맥주를 주문하지는 않았다. 한 잔 하실 테냐고 여쭤보려다 그러지 않았다. 더 어리다는 이유로 쓸데없는 질문을 할 권리는 없다. 평소에 술을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맥주 한 병 정도는 당연히 주문했을 것이다.
아내와 건배를 했다. 한 모금을 시원하게 넘기고 아내를 보았다. 역시 아내는 입만 축인다. 나는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다.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대낮에 말을 튼 어른들 바로 옆에서 맥주를 들이켜는 게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안동에서 오신 분들이다. 아내는 비슷한 상황이 올 때마다 그런다. 안동 시내를 돌아다니며 어깨라도 끌어안고 다니면 아내는 슬쩍 품에서 벗어난다. 나는 그게 재미있어서 더 꼭 끌어안곤 하는데 아내는 그때마다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재미있는 건 아내가 안동을 벗어나면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어릴 때,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안동'은 아내를 경직되게 만든다. 아내의 술잔은 줄어들지 않았다. 맥주의 탄산이 빠지고 있는 중이었다.
옆 테이블의 어른들과는 식사를 하며 계속 대화가 이어졌다. 아내가 안동 출신임을 알게 된 후론 좀 더 친근하게 느끼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두 분 보니 아직 젊으신 것 같은데, 이렇게 여행을 오면 얘는 어떻게 하고?
우린 종종 이런 경험이 있다. 질문을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어색해지는 질문.
-아! 저희는 얘가 없어요. 하하.
-아. 그렇구나. 요즘은 왜 그렇게 얘를 안 낳노? 우리 얘들도 똑같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다.
결혼 9년 차.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 특히 어른들과 조금 길게 얘기를 나눈다 싶으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다. 아내와 난 유체이탈 모드로 탈바꿈한다. 마치 남 얘기하듯 대화를 이어갔다.
-아! 그렇군요. 그러게요. 요즘 아기 안 낳아서 문제라고 하더라고요.
눈치가 빠른 분들은 질문이 불편한 가보다 싶어 얼른 말을 돌리는데 다행히 두 분 역시 그랬다. 아내와 처음부터 아이 없는 결혼 생활을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 늦게 결혼(아내는 마흔, 나는 서른여덟)을 한 우리는 바로 아이를 갖지 않고 둘이서 여행을 하는데 시간을 집중해서 썼는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여러모로 '아이를 갖는 것'이 부담됐다. 아마 우리가 아이를 갖고 싶은 계획이 확실히 있었다면 결혼하자마자 가족계획에 집중했을 것이다. 골든타임은 이미 지났고 그다음부터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태도를 바꿨다. 그러니 누군가 우리에게 '왜 아이가 없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때가 지났다고 답한다. 물론 그럴 때마다 아이를 갖는데 '때'가 어딨 냐는 물음이 이어진다. 그러면 난 다시 이어 답한다. '사람들마다 때는 다 다른 것이라고....'
결혼 초기에 양가의 부모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하면 '별 오지랖을 다 부리고 앉았네.'라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질문에 대해 발끈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들은 우리를 비난하려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 왜 그 좋은 유전자를 세상에 남지기 않아?'라고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칭찬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난 이후로는 아이에 대한 질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물론 물어보지 않으면 더 좋고!
'아이를 갖지 않은 것'에 대해 우리라고 해서 백 프로 만족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아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동경일 뿐이다. 요즘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특히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는 최근 2년은 더욱 그렇다. 아이가 있었다면 아버지를 심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지금처럼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
옆테이블의 어른들이 먼저 일어났다. 테이블의 접시를 모두 비운 후였다.
-반가웠고, 여행 잘하세요.
아저씨의 담백한 끝인사가 좋았다. 왠지 안동에 가면 한 번쯤은 시장에서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의 얼굴을 사진처럼 기억하는 나는 한번 본 사람들도 잘 기억해 낸다. 그들은 나를 알아볼 수 없겠지만 나는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왠지 다시 한번 볼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랬다.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과 인사를 마치고 그들이 보이지 않자 아내는 맥주잔을 들었다. 탄산이 빠진 맥주를 잘도 마셨다.
-아이고! 목말라서 혼났네.
-자긴. 이상하게 그게 잘 안 되나 봐. 뼛속까지 안동 여자라 그런가?
-아니. 낮부터 술 마시는 게 이상하게 눈치가 보이네. 이래서 내가 한국 사람들 없는 데를 좋아하나?
-뭐. 그럴 수도. 그런데 우리 낼모레면 오십이어요. 조금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눈치 볼 나이야.
-그렇긴 하지만....
딘타이펑의 음식은 뷔페에서 먹는 것처럼 미리 조리된 느낌이라 유명세에 비해 맛이 인상적이지 않았다. 친절한 직원들의 서비스는 좋았지만 맛만 따진다면 줄을 서서 먹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가 봐야 할 식당이다. 대만의 수많은 샤오롱빠오 식당의 기준이 돼 줄 것이기 때문이다. '딘타이펑'을 가보지 않고 다른 식당에 갔다면 '딘타이펑'의 맛이 궁금할 것이다. 반대로 '딘타이펑'을 먼저 다녀오면 사람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대만의 길거리 식당이 얼마나 맛과 가격면에서 훌륭한 지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딘타이펑'은 경험해 볼 만하다.
40분 정도의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볶음밥, 만두 두 종류, 오이, 송로버섯 수프, 맥주 한 병해서 한국 돈으로 5만 원이 조금 넘었다. 기대했던 샤오롱빠오가 맛있지 않아서 만족스러운 식사는 아니었다. 음식의 종류는 많았지만 양이 적어 배가 차지 않았다. 여행 마지막 날, 한 가지라도 더 먹어보고 싶은 우리에게 그나마 반가운 일이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살 정도는 아니어서 비를 맞으며 걷기로 했다. 이틀 전 토비와 함께 걸었던 길을 다시 걸었다. 아내는 처음 와 본 것 같다고 했다. 그럴만하다. 가이드가 있는 여행과 없는 여행은 단순하게 길을 걷는 것조차도 다르다. 보폭이 다르다. 걷는 속도가 다르다. 보이는 게 다르다.
특별한 계획 없이 중산역 근처를 맴돌았다. 그제야 타이베이가 보이는 것 같다.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라 식당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직장인들이 많아 보이는 식당에선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 사이에 껴서 한 끼를 해결하고 싶다. 다음에 왔을 때 가볼 곳을 미리 점찍어 둔다. 구글지도에 표시해 두진 않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우연히 만나고 싶다. 물론 그때의 우연은 계획된 우연일 것이다. 골목 중간중간에 작은 정원이 있었다. 시에서 관리하는 모양인데 자투리 땅에 근사한 정원을 조성해 놓은 게 부러웠다. 우리라면 어땠을까? 금세 흡연구역이 됐을까? 누군가가 정원의 꽃을 새벽에 몰래 파갔을까? 좋은 것보다 나쁜 게 먼저 떠오른다. 카페에 물건을 잠시 두어도 훔쳐가지 않는 나라라고 자부하면서 쉽게 꽃을 꺾고 쉽게 담배꽁초를 버리는 나라임은 왜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비는 계속 내렸지만 걷기엔 문제없었다. 대만의 도심은 장마철의 굵은 빗방울이 아니라면 우산 없이도 걸을만하다. 건물이 하나로 연결돼 있는 느낌이다. 멀리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가까이 가니 예상했던 대로다. 샤오롱빠오 전문 식당이다. 식당 앞에 켜켜이 쌓여 있는 찜통에선 하얀 김이 마구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안 쪽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빠른 손놀림으로 만두를 빚고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왔었던 사람처럼 거침없이 주문을 했다. 남자가 답했다. 5분만 기다리면 된다고.
왠지 진짜 샤오롱빠오를 맛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손에 포장용 봉지가 차례로 쥐어졌다. 옷차림을 보니 직장인들이 점심식사용으로 포장을 해가는 것 같다. 한 사람이 봉지를 들고 사라지면 다른 사람이 주인에게 와서 주문을 했다. 분주해 보이지만 삐걱거리지 않고 혼자서 모든 주문을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주인이 나를 가리켰다. 다 됐다는 얘기.
여기서 먹고 갈 것이라 얘기하니 이미 알고 있는 듯 나무젓가락과 일회용 간장을 만두 위에 얹어주었다. 식당엔 따로 테이블이 없다. 건물의 사각기둥에 피스로 고정시킨 나무판이 스탠딩 테이블인 셈.
종이 상자로 덮여있는 뜨끈한 샤오롱빠오를 열었다. 뜨거운 김이 훅 새어나가며 코를 스쳤다. 뜨거운 김에는 다양한 향이 담겨있다. 때마침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습한 공기가 향을 더 진하게 만들었다.
'딘타이펑'에서 삼십 분 전에 먹었던 샤오롱빠오와는 사뭇 다르다. 일단 크기부터가 다르다.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방금 만든 것이라 향이 살아 있다. 게다가 뜨끈뜨끈하다.
간장과 식초를 골고루 뿌렸다. 일회용 수저에 샤오롱빠오를 하나 올렸다. 젓가락으로 한쪽 끝을 꼬집었다. 육즙이 주르르 쏟아지며 수저 속에 있는 샤오롱빠오를 둥실 띄웠다. 일회용 수저가 깊숙해서 샤오롱빠오의 육수를 그대로 담을 수 있었다. 조금 뜨거워도 입천장이 까져도 이런 건 한 번에 먹어야 한다.
육즙도 속재료도 그걸 감싸고 있었던 샤오롱바오의 피도 완벽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까지도....
딘타이펑에서의 아쉬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만은 샤오롱빠오의 나라가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