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둘이서
단수이로 가는 지하철은 땅 위로 달린다. 스린에서 단수이까지는 30분 정도 걸리지만 풍경을 보며 갈 수 있어 지루하지가 않다. 단수이에 가까워질수록 자연의 풍경이 더 많이 펼쳐진다. 지하철 창이 커서 밖이 잘 보였다. 오직 풍경을 감상하기 위한 관광열차를 탄 기분이다. 시간이 넉넉지 않아 단수이역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다시 돌아온더라도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좋다.
단수이에 내렸다. 열차에서 내리자 강 건너 멀리 산이 보였다. 햇볕이 강물에 반사되며 산의 실루엣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일몰을 감상하는 곳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는데 알아본 바로는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거리상으로는 천천히 걸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역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광장이 펼쳐졌다. 넓은 단수이 강도 보였다. 어딘가에서 드럼 소리가 들렸다.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가 플라스틱 페인트 통과 프라이팬을 여러 개 뒤집어 놓고 드럼스틱을 이용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 빛이 조금씩 바래져 가는 그 시간에 울리는 활기 찬 연주는 단수이에 온 우리를 환영하는 팡파르였다. 흥겨운 음악 속에 차분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하루를 마무리하는 볕에서 오는 느긋함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며칠 동안 가장 좋았던 순간이다. 오랫동안 곱씹어 볼 순간이었다.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어제 유바이크를 빌려 타 봤으니 거침이 없었다. 단수이역 한편에 바이크가 넉넉하게 비치돼 있었다. 강변으로 천천히 달렸다. 자전거가 다닐 수는 있지만 인도와 함께 있어 신경이 쓰였다. 풍경이 좋아 사람들이 잠시 멈춰 있는 곳에선 자전거에서 내려 끌면서 걸었다. 광장을 시원하게 달릴 땐 좋았지만 좁을 길을 자전거로 가다 보니 조금 성가셨다.
산책 삼아 천천히 걸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걷기에 멀다는 정보는 평소에 웬만하면 걷지 않는 사람들의 기준인 듯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이 세운 기준들은 절대적이지 않다. 특히 여행지에선 더더욱!
그래도 자전거를 탄 덕분에 편하게 일몰의 장소까지 도착했다. 걸었다면 조금 다리가 아프긴 했을 것이다. 날이 더워서 땀도 꽤 흘렸을 것이다. (역시 자전거 최고!)
해가 조금씩 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각자 해야 할 일들을 잘 마치고 다시는 오지 않을 오늘의 마지막을 함께 하러 온 것만 같다.
‘하루’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벤치에 앉았다. 지나가는 모두의 얼굴을 보았다. 사람들의 표정이, 주고받는 말들이, 느릿한 손짓이 단수이의 저녁 볕을 담고 있었다. 평온했고 따뜻했다. 단수이에 오면 모두가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아내는 빙수를 사러 갔다. 생각 보다 오래 걸리는 것 같아 빙수 가게에 아내를 찾아갔는데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빙수 가게에는 일을 하는 사람이 세 명 있었다. 아내는 아직 주문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보니 일을 하는 순서가 꼬인 듯했다. 주문부터 받고 같은 메뉴는 함께 만든다면 배는 빠를 것이다. 그러나 빙수 가게의 직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의 주문을 받고 천천히 만든 후, 손님에게 내어준 다음에서야 다른 주문을 받았다. ‘빨리빨리’가 익숙한 한국이라면 직원 둘이서 배는 빠르게 빙수를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고 빨리 내줘야 한다는 책임감에 손이안 보이도록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다. 주문이라도 먼저 받으면 좋으련만 빙수의 모양을 잡느라 하나의 빙수에 여섯 개의 손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보자니 자꾸 마음이 성급해졌다. 답답했다가 이내 헛웃음이 올라왔다. 단수이의 느긋함이 좋다고 느끼면서 빙수 하나 조금 늦게 받는다고 조급해하고 있는 나였다.
빙수를 들고 일몰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다. 해가 조금씩 지기 시작했다. 일몰은 금방 진다. 하이라이트는 원래 짧다. 한눈을 팔 겨를 일 없다. 아내는 맥주 한잔을 하고 싶은데 참는다고 했다. 아직 정상 컨디션이 아닌 남편을 두고 한잔 하는 게 맘에 걸리는 모양이다. 차라리 맥주를 마시는 게 나로서는 맘 편했다.
사람들이 많은데 일몰의 순간만큼은 모두 조용했다. 매일 해가 뜨고 진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그 순간이 특별하다는 증거다. 우린 손을 잡고 있었다. 매일 잡는 손인데도 좋을 땐 더 꼭 잡게 된다. 꼭 잡은 손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좋아? 나도 좋아!'
'함께 해줘서 고마워.'
'너라서 다행이야.
'앞으로도 함께 다니자.'
'시간 참 빠르다.'
'우린 하루로 치면 어디쯤 왔을까?'
'너랑 사느라 재밌었어.'
'여전히 사랑해.'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린 알 수 있다. 그동안 주고받았던 애정의 말들이 살결에 담겨 있고 꼭 잡은 손으로 다시 한번 서로에게 전달된다.
수평선에 구름이 길게 있어 해가 강물로 사라지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신 해가 떨어지기 전 마지막 빛을 보여주려는 듯 구름 뒤에서 환하게 빛을 발했다. 어찌나 밝던지 조용히 일몰을 감상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우리는 모두 같은 빛을 보았다.
금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기온도 급격하게 내려갔다.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드디어! 속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는 얘기.
자전거를 타고 단수이역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갈 때는 올 때와 다른 길로 갔다. 2차선의 차도였지만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천천히 다녀 위험하지 않았다. 강을 끼고 걸었던 길은 관광객들이 많고 차도는 현지인들이 주로 다니는 느낌이다. 일몰이 지고 관광객들이 돌아간 단수이의 상점들이 하나 둘 불을 밝혔다. 낮 동안 관광객들에게 내어준 단수이를 현지인들이 되찾는 시간이다. 삼삼오오 모여 저녁 메뉴를 정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긴 뭐가 맛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당신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겠노라고 말하고 싶다.
고즈넉한 단수이의 밤을 자전거로 달리다 보니 금세 역에 다다랐다. 자전거를 반납했다. 저녁은 스린야시장에서 다양한 걸 먹을 예정이었다. 지하철로 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대로 단수이를 벗어나는 게 너무 아쉬웠다. 야시장은 어차피 간식이니깐 저녁다운 저녁을 단수이에서 먹고 싶었다. 역 근처에 환하게 불을 밝힌 '테판야끼'식당도 오면서 봐둔 참이다.
-저녁을 여기서 먹고 갈까?
-야시장 안 가고 여기서 저녁을 먹자고? 토비랑 야시장에 함께 가기로 했잖아.
그래 토비가 있었다. 그런데 토비는 저녁 9시가 돼서야 퇴근을 한다. 토비와 함께 저녁을 먹자고 그동안 쫄쫄 굶을 순 없다. 하루 종일 숙취에 시달려 속이 좋지 않다가 갑자기 찾아온 허기를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야시장은 당연히 가고 저녁은 여기서 먹고 가자고. 그냥 가는 게 너무 아쉬워서 그래.
-이제 좀 뭐 먹을 생각이 드나 봐?
-덕분에 오늘 제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아내가 웃었다. 남편을 보는 눈빛이 아니고 아들이나 조카를 보는 눈빛이다. 테판야끼 식당에 들어갔다. 부채꼴로 펼쳐진 커다란 철판 가운데 주방장이 바쁘게 요리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철판 앞에 앉아 각자 얘기하는 것 같지만 결국 시선은 주방장의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들.
우리도 기꺼이 아기새가 되기로 했다. 대표 메뉴를 조금씩 맛볼 수 있는 2인 세트로 주문했다. 주방장이 먼저 양배추를 볶아 주었다. 빨간 고추를 보여주며 괜찮냐고 묻길래 좋다고 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철판 앞에 노릇하게 볶은 양배추가 놓였다. 매콤하고 간간하다. 특별할 것 없는 양배추 볶음이다. 하지만 나에겐 더없이 특별했다. 위장이 말하는 것만 같다.
-이제 뭐든 허락할게. 맘껏 먹어보렴.
허락이 떨어졌다. 손을 들어 종업원을 찾았다.
-비어 플리즈!
바싹 붙어 앉아 있던 아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내의 잔에 맥주를 예쁘게 채웠다. 거품이 적절하게 올라오도록 하려면 신경 써서 따라야 한다. 관심은 그런 것이다. 맥주를 예쁘게 따라 주려 노력하는 것.
새우, 관자, 닭구이, 소고기구이가 순서대로 나왔다. 아는 맛이다. 흔한 맛이다. 그런데 그동안 대만에 와서 먹은 것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다. 맥주가 꿀떡꿀떡 들어갔다. 속이 언제 울렁거렸나 싶다. 이제야 여행하는 것만 같다. 토비와 함께 다닌 것도 좋았지만 하루 종일 우리의 속도로 다니다 보니 진짜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조금 느리고 불편해도 하나씩 알아가는 여행말이다.
테판야끼를 대만 음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니까. 대만을 여행하다 보니 일본과 많이 닮아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하긴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몰리는 번화가를 걷다 보면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모를 정도로 일본어의 간판이 많이 보인다. 최근 2, 3년 안에 부쩍 늘어난 느낌이 드는데 도시의 중심지가 일본어로 가득 차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유행에 빠르게 대처해야 하는 번화가에서는 사람들이 최근에 어디를 여행하고 왔는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먹어 본 음식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태국 여행 붐이 일어났을 때는 태국음식점이 베트남 여행의 붐이 일어났을 때는 베트남음식점이 한 집 건너 한 집으로 생겼었다. 지금 그 자리를 일본 음식점이 재탈환하여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과 얘기를 해보면 최근에 일본 여행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말한다.
-일본 갔는데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인지 싶더라. 일본말보다 한국말을 더 많이 듣고 온 것 같아.
슬슬 일본 여행 붐이 끝나가고 있음을 모두가 느끼고 있다. 일본 음식점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다음엔 어떤 나라가 차지하게 될까? 대만 여행을 많이 했으니 대만 음식 전문점이 차지하게 될까? 그렇다면 어떤 음식이 유행을 하게 될까? 현재로선 곱창국수가 가장 가능성이 클 것 같긴 하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여덟 시에 가까웠다. 지하철 앞의 광장으로 나갔다. 해가 있을 때의 활기는 이미 사라졌다.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아내가 기분이 좋은지 멀리서 그 춤사위를 따라 췄다. 쉬운 스텝의 반복이라 제법 비슷했다. 사람들이 재미있는다는 듯 힐끗거리며 지나갔다. 대체로 부끄럼이 많은 아내는 종종 이상한 용기를 낼 때가 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내 앞에선 한다. 다른 사람이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지면 이내 얼굴이 달아오르지만 내가 집중하고 있으면 나의 눈만 바라본다. 그래서 나는 한 시도 끊지 않고 아내를 바라본다. 그게 아내를 부끄럼에서 지켜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