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하는 밤
여행 전부터 토비가 몇 번이나 얘기한 식당이 있다. 대만에 오면 무조건 같이 가야 할 곳인데 특별한 메뉴가 없고 재료를 고르면 알아서 요리를 해주는 곳이라며 오빠, 언니가 진짜 좋아할 것 같다고 했었다.
저녁은 그곳에서 토비, 토비의 엄마 그리고 토비의 친구들과 함께 할 예정이었다. 토비는 한국에 있을 때 김치찌개, 돼지국밥, 평양냉면, 삼겹살을 즐기는 친구다. 그러니 우리와 입맛이 꽤 잘 맞았다. 토비가 맛있을 것이라 보장을 하면 확신의 믿음이 있었다. 여행을 하기 전까지는....
타이난에서 토비와 함께 먹은 음식은 대체로 괜찮긴 했으나 맛있진 않았다. 1박 2일 동안 대만 음식을 접한 나의 솔직한 소감은 이랬다.
'아! 이게 대만 음식이구나. 대만 사람들은 조금 싱겁게 먹나 보네. 느끼하다.'
가장 맛있었던 음식을 꼽자면 타이베이로 돌아와 먹은 만두였는데 그것도 개중에 나은 것이라는 거지 최고라는 뜻은 아니다. 여행 프로에서 하도 '대만은 미식의 나라'라고 떠들어 대서 기대를 했지만 점점 실망만 커지고 있었다.
토비는 대만의 음식에 대해 자부심이 커 보였다. 여행 전에 우리가 알아본 식당을 얘기하면 관광객이 많이 가는 곳이라 짜고 맛없다는 현지인들의 리뷰가 많다며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가보고 싶은 식당을 얘기하는데 더 좋은 곳을 알려주겠다고 하니 난감했다. 우리에겐 어떤 것을 먹는 것이 중요하기도 했지만 그 식당을 가보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이 짜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잘 맞을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음식이 싱겁다고 느껴지니 맛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싱겁게 먹으며 음식 본연의 맛을 잘 느끼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향신료나 소스를 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향이 강하고 조미료의 맛은 느껴지는 데 간만 싱거웠다. 그러니 음식 본연의 맛이 잘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이틀 만에 음식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나니, 여행의 본질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이번 대만 여행의 가장 큰 목표는 다양한 음식을 많이 먹어 보는 것이었다. 점점 흥미가 떨어지고 있었다. 저녁에 갈 식당도 마찬가지다. 크게 기대되지 않았다. 다만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서 모인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설렐 뿐이었다. '아무렴 어때? 같이 맥주 한잔 하는 게 좋은 거지 뭐.' 라며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토비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대만 친구들이 한국으로 놀러 왔다. 토비는 그 친구들을 가게에 데리고 와 소개해주었고 몇 번씩 반복해서 보다 보니 나름 친분이 쌓였다. 우리가 대만에 왔다고 하니 토비 친구, 미미와 은표가 저녁 식사에 합류하기로 했다. 미미는 토비 친구 중에서도 가장 많이 본 친구다. 은표는 그녀의 남자친구. 그 역시 한국에 왔을 때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우버를 타고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숙소 근처에 식당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우리를 태운 SUV는 도심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뒷자리에 탄 내가 조수석에 탄 토비에게 물었다.
-식당이 생각보다 멀리 있다 보네. 어디쯤 있는 거야?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계속 보던 토비는 못 들었는지 대답하기가 귀찮은 건지 답이 없었다. 나는 되묻기가 무안해져서 구글지도로 현재 위치를 파악했다. 점점 숙소에서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럴러면 대체 왜 숙소를 그곳으로 잡으라고 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토비는 우리를 케어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집과 가까운 숙소를 추천한 것 같은데 나는 그 케어가 점점 답답해지고 있었다.
30분 정도를 달려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앞에 있는 진열대에서 재료를 고르면 음식을 만들어 주는 '실내포장마차' 스타일이었다. 도착한 지 1분도 안 돼서 미미와 은표가 왔다. 시간을 대충 맞춘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저녁 일곱 시였다. 우리는 가볍게 포옹했다. 여행지에서 만날 친구들이 있다는 건 어둠 속에서 스위치를 찾아낸 것과 같다. 친구들이 나를 밝혀준다. 오직 현지인들만 오는 것 같은 그 식당에서 나는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30분 정도 있으니 토비의 엄마가 손자를 데리고 함께 왔다. 토비 보다 일찍 결혼한 남동생의 아들이다. 아이가 들어오니 식당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4살짜리 아이가 아장아장 걷는 걸 식당의 모두가 쳐다보았고 토비의 엄마가 아이에게 물 잔을 쥐어 주고 사람들과 건배를 하고 오라고 하면(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아이의 개인기인 듯) 서로 자기의 잔과 부딪히길 바라며 한 곳을 바라보았다. 결국 풍성한 파마머리를 한 한 여성과 건배를 하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마치 아주 재미있는 공연을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갑자기 뭉클해져 버렸다. 이제 우리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게 맞다!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입장에서 <노키즈존>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생기니 자꾸 상식적이지 않은 제한이 생긴다. 나는 괜찮다는 이기심이 결국 나에게 돌아와 불편함을 초례한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사회에 규칙이 많아지면 재미가 점점 없어진다. 대만도 저출산 국가라고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더욱 귀할 것이다.
종종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의 얘기들을 들으면 아이들이 불쌍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함께 놀다가 배가 고프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밥을 먹던 시절의 우리와는 너무 다르다고. 자연스럽게 개인주의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게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들에게 '거리두기'를 일상으로 만들었다. 다시는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나는 그게 때때로 슬프다. 그런데 대만의 작은 식당에서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물론 한 순간만으로 모든 걸 알 수 없다. 여행의 필터는 작은 것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때만큼은 사람들이 눈을 맞추며 같이 웃는다는 게 뭉클했다.
반면에 토비가 자랑해 마지않던 식당의 음식은 역시 그저 그랬다. 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또 엄청 맛있지도 않았다. 버섯, 생선 등의 무난한 요리가 나왔고 소간, 닭 내장 등의 쉽게 접하지 못하는 요리가 이어 나왔다.
닭 내장은 국물 요리로 나왔는데 모래내시장에서 닭내장탕을 자주 먹던 경험이 있었던 터라 처음에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물론 먹기 전까지....
칼칼하고 자극적이라 소주 안주로 제격인 우리의 닭내장탕과 다르게 대만의 닭내장탕은 싱거워도 너무 싱거웠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싱겁기 때문에 내장의 맛을 더 잘 즐길 수 있다고 했는데 우리 입맛엔 싱겁기 때문에 내장의 맛이 그대로 느껴져서 힘들었다. 게다가 닭내장탕에 들어 있는 닭고환은 처음 접해본 것이었는데 싱겁다 보니 재료 본연의 느낌이 자꾸 떠올라 괴로웠다. 나는 아내의 비위를 잘 알고 있어 반대했지만 아내도 도전을 했다. 여기까지 데리고 와준 정성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은 덩이를 먹은 아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도저히 삼킬 수는 없고 뱉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같았다. 나는 얼른 냅킨을 건넸다.
양념이 재료에 충분히 배게 해서 잡내를 없애는 우리의 요리법과 다르게 대만은 양념을 최소화해서 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이게 우리의 요리 법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재료의 맛을 최대로 살린다'를 대만의 요리의 특징으로 꼽는 것도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채소 요리의 경우 대부분이 채소를 볶다가 소스를 넣어 낸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채소 요리의 맛이 비슷하다. 먹어도 입안이 개운하지 않다. 기름과 소스의 맛이 먼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만 사람들이 한국 음식은 간장, 고추장 맛이 강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나는 대만 대부분의 음식에서 특유의 간장 맛을 느낀다. 대만 사람들이 한식은 양념이 너무 강해서 재료 본연의 맛을 잘 느끼지 못하겠다고 얘기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우리의 나물 요리를 먹어보라고 추천한다. 참기름이나 들기름이 적절하게 배합된 나물요리는 채소 본연의 맛을 잘 담아낸 특별 요리다. 예전에는 동네 백반집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었던 나물이 이제는 한정식집에서만 먹을 수 있어서 안타깝다. 그러니 한국에 오는 외국인들에게 한정식집은 추천해 볼만하다.
현지인의 선입견에 사로 잡혀 '한정식 별로 먹을 것도 없이 비싸기만 해.'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다. 적당한 가격의 한정식은 한식을 한 상에 경험하기엔 여행객들에겐 꽤 괜찮은 메뉴다.
원탁이 음식으로 가득 찼다. 아내와 내가 가장 맛있게 먹은 것은 볶음밥. 간이 안된 내장 요리들을 먹으니 조금씩 느끼해졌다. 나는 입을 씻어 내고 싶어 맥주를 먹다 말고 토비에게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토비가 주인에게 말해 가져온 술은 '금문고량주'. 무려 58도.
도수가 부담스러웠지만 별 수 없었다. 진득한 질감의 술을 한 번에 넘겼다. 진득한 액체가 위를 타고 어디쯤 흘러가고 있는 중인지 느껴졌다. 뜨거운 온도를 가진 그 액체는 명치를 지날 때 즈음 진화됐다. 불이 꺼지자 향이 역류 했다. 시큼하고 맵다. 위스키의 피트향보다 강한 불향이 느껴진다.
술맛이 강하니, 느끼함이 사라졌다. 역시 독에는 독이던가? 나는 홀짝대며 고량주를 연거푸 마셨다. 몸이 뜨거워졌다. 바람을 쐬고 싶어 밖으로 나갔다. 주변은 고요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택시에 실려 왔으니 더 그렇다. 찾아올 일도 없지만 찾아오라고 해도 못 올 것이다. 아마 이 생에 이 식당을 와 보는 것은 마지막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좀 괜찮아졌다.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2차로 어디에 갈지 고민했다. 은표는 일이 있어 가봐야 한다고 했고 미미는 함께 간다고 했다. 토비의 엄마가 집으로 가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다. 우리는 망설였다. 집에 아버지도 있고 괜히 민폐 끼치는 것은 아닌 지 고민됐다. 모두 다 한 입으로 그건 걱정하지 말란다. 아마도 자주 있는 일인 듯.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우버를 타고 토비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토비의 집에 가니 아버지가 편안한 옷차림으로 반겼다. 나와 아내는 한국에서 토비의 아버지도 본 적이 있다. 그때 토비는 약속된 일이 있어서 지방에 가 있었고 나는 우리 가게에 놀러 온 토비의 아버지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때, 아버지에게 '토비가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가 같이 고민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안심시켰었다. 아버지는 몇 번씩 고맙다고 말했었고.
그 이후 처음 본 것이다. 반가웠지만 어색한 악수를 나눴다. 술이 거나하게 올라 장난기가 가득했던 토비의 아버지는 거기에 없었다. 그는 불편해하는 우리를 앉히고는 거실 중앙에 놓여 있던 테이블의 상판을 펼쳤다. 평소에는 접어 두던 상판을 펼치자 테이블의 지름이 두 배로 넓어졌다. 가족 테이블이 파티테이블로 변했다.
토비네 집 거실에 빙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니 배달 음식이 하나 왔는데 야채나 오징어 등을 튀긴 것이었다. 우리가 치킨을 시켜 먹듯이 술과 자주 먹는 배달 음식이라고 했다. 튀김은 그나마 간간한 편이라 따로 양념이 필요 없었다.
엄마, 아빠와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색했다. 어색하니 자꾸 건배해서 술을 평소보다 빠르게 마셨다. 식당에서 마신 금문고량주의 취기가 뒤늦게 더해지고 있었다. 우리가 집에 왔다고 하니 손님이 두 명 더 오고 있다고 했다. 엄마의 친구인데 토비는 '이모'라고 불렀다. 나 역시 그 이모를 본 적이 있다. 토비의 엄마와 한국에 놀러 왔을 때, 우리 가게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반나절 함께 놀았을 뿐인데 우리가 왔다고 해서 술을 마시던 자리를 접고 온다는 게 고맙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대만 사람과 국제결혼을 한 친구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만 사람들은 작은 인연도 소중하게 여기고 특별히 약속을 하지 않았어도 어디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싶으면 기꺼이 모이는 편이라고.... 그래서 처음에는 두 세 사람 만났지만 결국 열 명이 훌쩍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이모가 왔다. 한 손에는 자기가 마시고 있던 위스키를 다른 한 손에는 새 위스키를 든 채로. 이모는 남자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그는 공평하게 모두가 초면인 사람이었다. 이모와 남자친구는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집에 우리가 왔다고 하니 마시던 술의 뚜껑을 닫고 바로 건너온 것이다. 재밌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한자로 써가며 알아냈다. 나의 이름을 쓰니 이름이 좋다며 몇 번을 불렀다.
-차오밍 찬! 차오밍 찬!
대만 사람들은 이름 말고도 애칭으로 많이 불린다. 대만어 발음이 워낙 길고 타인(특히 외국인)이 부르기엔 너무 어려워서 그런 건데 특히 40대 아래로는 영어 애칭이 있어 친구들 사이에서는 본명보다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이모의 남자친구는 나의 애칭을 만들어 주었는데 친근함을 나타내는 '아'에 나의 이름 끝자를 따서 '아찬'이라고 불렀다.
-아찬! 아찬!
그는 나를 아찬이라고 부르며 자기를 '아조'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렇게 아조와 아찬은 신나서 여러 번 잔을 부딪혔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별 의미 없이 술잔을 부딪히는 우리와 다르게 대만은 술잔을 부딪히면 무조건 원샷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몇 번 거절했는데 마시라고 하도 성화를 해서 술잔을 비웠고 그렇게 연거푸 마시다 보니 겨우 잡고 있던 정신까지 놓아버렸다. 아예 건배를 안 하면 괜찮은데 술잔을 채워주고 자꾸 건배를 권하니 나도 모르게 잔을 부딪히고 잔을 부딪혔으니 술잔을 비워야 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결국 언더락잔에 가득 따라준 위스키를 손에 들고 있다가 건배를 했고 나는 객기가 발동하여 원샷을 했다.
밤 12시가 지났다.
아내와 나의 아홉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추억을 되돌아보고 둘 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나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