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지에서의 과음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나의 기억 속에 셋째 이모부는 좀 특이한 사람이었다.
외갓집에 모이면 어른들이 함께 술을 마셨는데 셋째 이모부만 유독 유난스러웠다. 자기가 마실 와인 한 병을 가져와 조금씩 나눠 마셨으며 와인 한 병을 다 비우면 그 이상의 술을 마시는 법이 없었다. 술을 마시는 것도 권하는 것도 좋아하는 아버지는 이모부에게 소주나 맥주를 권했는데 이모부가 일언지하에 거절해서 종종 분위기가 어색해지곤 했다.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권했고 이모부는 하나 같이 거절했다. 무딘 창과 단단한 방패의 대결이었다. 나는 이모부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한 잔 받아놓고 마시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런데 자기가 무슨 지조를 지키는 유생인 양 한 손을 훠이 훠이 저어가며 거절을 했는데 그 특유의 거만함으로 아버지를 무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걸 옆에서 지켜 본 나는 기분이 별로 일 수밖에....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긱했다. 적어도 어제의 술자리 전까지는....
그는 전적으로 옳았다. 술은 자기의 주량을 알고 마셔야 하며 주량이 채워졌다 싶으면 칼같이 그만 마셔야 한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술이 술을 불렀다. 내가 술을 마신 게 아니라 술이 나를 삼켜버렸다.
눈을 떴다. 꿈을 꾼 것도 아닌데 갑자기 눈이 떡하니 떠졌다.
싱글베드 두 개짜리 방 밖에 남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예약했던 숙소의 한 침대에 나는 누워 있었다. 어떻게 침대에 눕게 됐는지 기억이 없다. 아찔했다. 시선을 돌렸다. 아내가 1m 떨어져 있는 또 하나의 싱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아니 다행이 아니다. 등을 돌리고 옆으로 누워 자고 있는 아내를 보고 있자니 잠을 설친 게 느껴졌다.
공포가 몰려왔다. 기억의 마지막을 더듬었다. 언더락잔에 가득 담긴 위스키 원샷. 그게 문제였다. 그 이후로 기억이 없다. 아내가 깰까 봐 숨소리도 죽인 채 생각했다. 다 기억해 내야 했다. 아내가 일어나면 어디까지 기억나냐고 물어볼 것이다. 최대한 많이 기억해야 했다. 그게 감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뻔뻔하게 다 기억난다고 우기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건 위험하다. 몇 개의 질문으로 금세 탄로 나 버릴 게 뻔하다.
머리가 아팠다. 배가 아팠다. 화장실에 갔다. 어제 술김에 먹은 안주가 문제였다. 토비의 엄마가 적매실 절임을 내주었는데 입 안이 개운해서 몇 개를 연속으로 먹었다.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플 수가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적매실 절임은 변비예방용으로 조금씩 먹는 것이었다. 그걸 알리가 있나 상큼하고 맛있으니 계속 집어 먹었다.
지금 변비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무조건 적매실을 구해서 드셔보시라. 대장내시경을 하기 전 날과 같은 인체의 신비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
샤워를 했다. 그리고 다시 화장실. 그리고 다시 샤워.
멍한 기분에서 깨어나려면 수압을 최대한 강하게 씻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럴 때 인가? 밤 새 잠을 설치다가 이제 막 잠에 든 것 같은 아내가 깨면 안 된다. 사람이 잠을 설치면 짜증이 늘어난다. 잠을 푹 잤어도 짜증이 났을 상황이다. 10분이라도 더 재워야 했다.
졸졸 흐르는 물에 샤워를 하는 건 군대에서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여름에 일주일씩 훈련을 나가면 씻을 물이 넉넉지 않으니 1.5리터 페트병에 물을 담아 못으로 뚜껑에 구멍을 내고 조금씩 아껴가며 온몸을 씻었다. (그래도 씻고 나면 개운했다.) 나는 1박에 12만 원짜리 호텔에서 그때와 같은 물줄기로 샤워를 마쳤다.
욕실에서 나오니 아내가 몸을 뒤척이는 게 보였다. 여전히 등은 돌리고 있는 상태.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 외나무다리다. 피할 수 없다. 용기를 내고 부딪혀야 한다. 아내의 등 뒤로 천천히 걸어가 아내를 안았다. 아내가 바로 반응했다.
-자기야. 나 잠 좀 더 자야 돼. 나 너무 피곤해.
오케이. 일단 후퇴!
아내의 침대로 갔던 걸음 그대로 역재생을 해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
조금 안심이다. 아내의 목소리 톤을 들어보면 분노의 퍼센트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열은 받지만 그래도 ‘너랑 말도 섞고 싶지 않아!’ 정도는 아니다.
나의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천만다행이다. 더블베드가 아니라 싱글베드 밖에 남지 않았던 건 그래도 운명이 나를 아주 내팽개치지 않았다는 증거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로 씻었지만 개운하긴 했다. 베개가 조금 높았다. 수건을 돌돌 말아 목에 끼워 넣었다. 확실히 편했다. 그리고 나는 염치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다시 일어난 건 아내의 샤워소리 때문이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수압이 어찌나 강한지 한 여름 소나기 같았다. 오전 열 시였다.
아내가 욕실에서 나왔다. 머리를 말리며 나온 아내가 깨어있는 나를 확인하고는 드디어 첫 질문을 했다.
-어제 기억나?
혼란스러웠다. 정공법을 택했다.
-아니. 어떻게 왔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대체 어떻게 온 거야?
-그럴 것 같더라니. 진짜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진짜. 미안해. 무서울 정도로 기억이 안 나.
-어디까지 기억나는데
-마지막에 위스키 원샷했잖아. 그때부터 기억 안나는 거 같아.
-그러니까. 왜 그랬어? 우리 다 놀랐잖아.
-아니 자꾸 자극을 하니까. 어쨌든 잘못했어. 그러면 안 되는 건데. 한 밤중에 비틀거리며 왔을 생각 하니까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밤거리를 어떻게 온 거야? 나 데려오느라 힘들었겠어.
-아니 자기 눈이 풀려서 그렇지 잘 걷긴 했어. 그리고 우리 토비가 우버 불러줘서 우버 타고 왔어. 나는 자기 술도 깰 겸 좀 걸을라고 했는데 자기가 힘든지 우버 불러달라고 하더라.
-그래? 전혀 기억이 없다. 미안해. 우리나라도 아니고 여기까지 와서 나를 케어하게 해서 미안해. 내가 무조건 잘못했어.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오버를 했어. 술을 아무리 권해도 그렇지. 평소에 잘 멈추는 사람이 어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나도 모르겠어. 뭔가 이상한 객기가 생겼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
-오늘 우리 대만 와서 처음으로 토비 없이 둘이 돌아다니는 날이야. 근데 이게 뭐냐?
토비는 이틀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출근을 했다. 우리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토비의 케어에 조금씩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지 않고 토비가 미리 정해둔 계획대로 움직이다 보니 여행의 기분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준 토비의 마음은 당연히 고마웠다. 하지만 정해준 스케줄에 의해 돌아다니다 보니 단체 여행을 다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누군가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투어가 아니라, 우리만의 속도로 흘러가는 트래블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트래블을 할 수 있는 첫날의 아침.
나는 숙취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오늘 박물관 가기로 했잖아. 갈 수 있겠어?
나는 숨도 안 쉬고 목소리를 한 톤 올려 대답했다.
-당연! 나 정말 멀쩡해! 샤워만 얼른 하고 나올게, 준비하고 나가자.
괜찮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샤워를 다시 했다. 수압을 최대한 올렸다. 목구멍이 뚫어져라 가글을 했다. 술이 조금 깨는 것만 같다. 딱 두 시간 정도만 그러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오래 씻었네.
금세 씻었는데 그러지 않은 모양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나를 보고 아내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머리를 말렸다. 드라이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왔다. 토할 것만 같다. 그대로 눕고 싶었다.
하지만 이겨내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단 나가야 했다. 나가면 괜찮을 것이다. 나가서 찐한 초콜릿우유를 단숨에 마시면 좀 진정될 것이다.
-그냥 쉴래? 나 괜찮으니까 너무 힘들면 좀 자다 나가자.
달콤한 유혹이다. 속으면 안 된다. 물론 진심이겠지. 그렇지만 나가야 한다. 두고두고 원망을 받을 순 없다.
기지개를 크게 켰다. 머리가 울렸다.
호텔을 나섰다. 오전 열 한시 반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호텔에서 멀지 않았다.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긴 했지만 여덟 정거장을 이동한 후 버스로 10분 정도만 가면 됐다. 이동하는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스린역에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향했다. 대만에서 처음 타는 버스였다. 버스 좌석이 운전석을 바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승객이 서로 바로 볼 수 있도록 배치돼 있었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 무리들이 보였다. 넷 중 셋은 작은 음료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대중교통에서 음료를 마시는 것이 금지된 대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음료를 손에 든 채 탈 수는 없지만 가방에 꼽거나 음료 전용가방에 담은 채로는 가능하다. 밝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다가도 우리를 슬쩍슬쩍 훔쳐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혼자서 착각의 늪에 빠져본다.
‘그래 아저씨, 아줌마 여행하는 거 멋지지?’
오래된 버스였지만 나름 운치가 있었다. 게다가 박물관으로 가는 길이 꽤 이국적이었다. 커다란 야자수와 오랜 건물이 대만에 와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느끼게 해 주었다. 숙취만 없었다면 완벽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내렸다. 앞에 앉아 있던 사인방도 같이 내렸다. 더블데이트를 하는 모양이다.
박물관은 버스정류장 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었다. 해가 쨍쨍했다.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없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박물관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광장처럼 넓고 길었다.
군데군데 사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십대로 보이는 부부가 힘겹게 셀카를 찍고 있었는데 사진을 찍어 주냐고 먼저 물어보았다. 익히 들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사진 열정을….
세로 사진 열 장, 가로 사진 열 장으로 포즈를 바꿔가며 찍었다. 핸드폰을 건네어 받은 아저씨가 말했다.
-땡큐. 웰컴 투 타이완!
사진을 열정적으로 찍어 준 나를 보고 아내가 얘기했다.
-좀 살만 한가 봐?
박물관에선 오디오가이드를 대여했다. 한 개만 빌렸는데 내가 듣고 아내에게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이는 우리가 평소에도 자주 하는 방식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아내에게 간추려 얘기하는 것을 즐기고 아내는 나에게서 듣는 역사 얘기를 재미있어한다.
하지만 그건 평상시의 이야기다. 술도 깨지 않고 박문관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오디오가이드에서 흐르는 설명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나는 바로 오디오가이드를 아내에게 넘겼다. 3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오래된 중국의 유물이 많았다. 중국에서도 희귀한 유물이 대만에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1930년대,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자 중국은 자금성의 유물들을 남쪽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국공내전이 격화되던 1949년,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패배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주요 유물을 가지고 대만으로 건너왔다. 유물은 한동안 창고에 있다가 1965년 박물관이 지어지면서 옮겨졌는데 이 유물을 보기 위해 중국에서도 많이 방문한다.
중국 역사에 깊은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유물들이 그렇게 인상적이진 않았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만고궁박물관 4대 유물 중 세 개가 다른 박물관에 대여 중인 터라 더욱 그랬다. 박물관에는 동파육을 닮은 수석이 인기가 있었는데 한국어로 해설을 하고 있는 도슨트 투어를 귀동냥으로 듣다 보니 수석 원래가 동파육의 모습과 비슷하긴 했지만 색을 칠해 더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흥미가 사라졌다. 그 사실을 몰랐다면 어쩌면 색까지도 그렇게 잘 익은 동파육을 빼다 닮았는지 감탄했을 것이다.
힘들어하는 나와 다르게 아내는 도슨트 투어 해설 무리들과 조금 떨어져서 걸어 다니며 해설을 듣는 듯했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듣는 건 양심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깐. 아내도 인정하면서도 정색을 했다.
- 내가 다 쫓아다니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냥 내가 다니는 동선과 자꾸 부딪힐 뿐이야
아내의 말도 맞지만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서 한 구간을 건너뛰고 유물을 감상했다. 천천히 둘러보면 좋았겠지만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유물을 감상하는 척은 했지만 속이 점점 뒤집어지고 있었다. 자꾸 앉고 싶고 심지어는 눕고 싶었다. 그 와중에도 눈에 띄는 유물을 발견했을 땐 디테일한 걸 보고 있는 척을 하려고 아내를 붙들며 말했다.
-이 것 좀 봐. 어쩜 이러냐! 대단하다. 대단해.
두 시간 정도 보고 나니 오후 두 시 반이었다. 일단 나가기로 했다. 뭐라도 먹어야 속이 풀릴 것이다. 박물관에서 나와 오디오가이드를 반납하고 보니 올 때 버스에서 만났던 남녀 무리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박물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얼추 비슷하다. 어디를 가나 그렇다. 들어갈 때 마주친 사람들은 나올 때 또 만나게 돼 있다.
계단을 내려오니 좌측에 정원이 있었다. 해가 뜨거워 그늘 진 정원을 통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시원함이 느껴졌다. 대만은 습도가 높은 나라라고 하던데 3월이라 그런지 햇볕만 피하면 선선했다. 멀리 정자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걸음이 옮겨졌다.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는 정자라면 좋으련만 신발을 신고 올라가는 곳이었다. 대신 벤치가 넉넉하게 있어 사람들이 여유롭게 쉴 수 있다. 조금만 앉았다 가기로 했다가 도저히 못 참겠어서 아내의 무릎에 누웠다. 쓰고 있던 벙거지 모자를 벗기며 아내가 말했다.
-그래! 고생했다. 조금만 쉬었다 가자. 십 분이라도 자고 나면 좀 괜찮아질 거야. 나 정말 괜찮으니까 일단 좀 자.
아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잠이 들었다.
자신의 코골이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 본 경험은 많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만에서, 그것도 야외에서, 심지어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게다가 사람들이 오가는 정자에서 잠을 깨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흔치 않은 경험을 내가 했다. 내가 저질렀다. 삼십 분을 잤다. 중간중간에 작게 코골이 소리가 날 때마다 아내는 조금씩 고개를 돌려 남들이 알아차리는 것을 막아주었다. 나는 덕분에 꿀같음 낮잠을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대포같은 코골이 한 방이 있었다. 워낙 순식간이라 아내도 막지 못했다. 놀라서 눈이 떠졌다.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였다. 5초의 정적. 일어나 앉았다. 괜히 목을 긁어대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 누구도 수군대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모두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아! 착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벗어두었던 신발을 고쳐 신고 일단 정자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오고 싶었지만 잰걸음이 빨라졌다.
-괜찮아? 좀 풀렸어?
요즘 유행하는 '괜찮아. 딩딩 딩딩딩 딩딩 딩딩딩' 밈을 따라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길 잘했다.)
-이제 좀 뭐 좀 먹을까? 확실히 개운해졌어.
-숙소 가서 조금 쉬다 나올까?
-아니야. 정말 괜찮아. 숙소 가서 쉬면 단수이의 일몰은 못 볼 것 같아. 스린에 가서 일단 요기를 하고 단수이로 넘어 가자. 시간도 딱 괜찮은 거 같은데?
-그럼. 그러자. 우리 어제 저녁부터 밥다운 밥을 못 먹은 거 같아. 나도 슬슬 배고파.
확실히 머리가 개운해지고 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스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보니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방법이 없었다. 솔직해져야만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내에게 말했다.
-숙취해소제를 먹어야겠어!
-정말 안 좋구나.
편의점엔 숙취해소제가 없었다. 대만 사람들은 숙취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했다. 한국의 다양한 식품이 편의점에 있는 걸 보면 숙취해소제도 있을 만 한데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술을 즐기지 않은 대만사람들에게 숙취해소제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왓슨스에 가서 설명을 하니 환으로 된 숙취해소제를 보여 주었는데 환 약을 먹으면 바로 토할 것만 같아 고맙다는 인사만 전하고 밖으로 나왔다. 속상했다. 진짜 속이 상했다. 짧디 짧은 대만 여행의 하루를 숙취로 망치고 있었다.
멀리 약국이 보였다. 그래 약국에 가면 뭐라도 있을 것이다. 약사에게 상황을 얘기하니 환으로 된 약을 건네며 술을 마시기 전 30분 전, 술을 마신 후 30분 후에 약을 복용하라고 했다. 소통이 잘 못 됐다. 나는 쑥스러운 웃음과 함께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씨에, 씨에 but I'm sick right now. because hangover!
약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제야 이해를 한 듯 웃으며 작은 종이 상자가 빼곡한 벽장을 손가락으로 뒤지며 약을 찾았다. 의사가 건네어 준 약은 씹어 먹는 위궤양 약이었다. 위에 관련된 약이면 뭐라도 도움 될 듯해서 일단 약을 받아 들었다. 계산을 하고 약국 안에서 바로 약을 씹었다. 한 번에 두 알, 하루에 세 번 까지는 괜찮다고 했다. 시지 않은 비타민제를 먹는 것 같았다. 약이 어금니에 꼈다. 추접의 절정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속이 바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식당을 찾았다. 첫 끼를 먹을 때가 됐다. 하루 다섯 끼를 먹어도 부족한 대만에서 오후 세 시가 다 돼서 첫 끼를 먹다니 대만여행자로서 이미 틀렸다.
평소보다 메뉴 선정에 신중했다. 아직 속이 좋지 않아 음식의 향에 민감했기 때문이다. 골목을 배회하다가 스린역 출구 옆에 있는 국수 가게로 갔다. 유튜브에서 자주 보던 대만 곱창국수와 닮았는데 곱창 대신 토핑을 선택할 수 있었다. 굴이 들어간 국수, 오징어가 들어간 국수를 하나씩 주문했다. 점도가 진득한 국수 위로 재료만 다를 뿐 맛은 같았다. 국수는 한꺼번에 끓여내고 그 위에 토핑만 따로 올려주는 것 같았다. 짧은 국수면이라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을 이용해 먹어야 했다. 대만에 와서 우리가 고른 첫 식사였다.
숟가락으로 가득 퍼 한 수저를 먹었다.
짜다. 너무 짜다. 머리가 띵하도로 짜다. 이 놈의 대만은 중간이 없다. 싱겁거나. 짜거나. 이 걸 어떻게 다 먹지 싶었다. 아내 역시 한 술을 뜨더니 미간이 찌푸려졌다.
메뉴 선정 실패!
그대로 두고 나가고 싶었지만 식당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건 너무 예의 없는 일이라 위에 얹어 있는 토핑이라도 다 먹고 나가기로 했다. 굴도 오징어도 싱싱한 편이었다. 특히 오징어는 도톰하고 씹는 맛이 좋았다. 굴은 작은 굴이라 굴 특유의 향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씩 먹으며 국수를 섞다 보니 처음보다는 간이 괜찮아졌다. 여전히 간간하긴 했지만 처음에 느꼈던 강력한 맛이 아니었다. 먹을 만했다. 물론 또 가서 먹을 맛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 먹을 만큼을 먹고 나왔다. 반 정도 남긴 것 같다.
입 안이 텁텁해서 티를 마셨다. 사람들이 줄을 많이 선 곳을 찾았다. 티를 주문하니 당도와 얼음양을 물어보았다. 당도야 그럴 수 있겠지만 얼음의 양까지 물어본다니 정말이지 티에 진심인 나라다.
스린역 앞에 앉아 차를 마셨다. 속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만 사람들은 참 단정하다. 얼굴 생김도, 입고 있는 옷들도, 걸음걸이도, 작은 미소도, 지하철에서 줄을 서 있는 모습도 모두 정갈하다. 그런 느낌들이 모여 대만사람들이 친절하다고 생각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살짝 날릴 정도의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숙취가 조금씩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