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지의 맛!
여행지에서는 이상하게도 눈이 빨리 떠진다. 침대에서 꾸물거리지 않고 가장 편안한 옷을 입고 숙소를 나선다. 숙소에 자전거가 있다면 자전거를 빌려 타고 나간다. 자전거를 빌려주는 직원이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면 얘기한다.
“딱 1시간이면 돼!”
낯선 곳에서는 아침공기는 뭐든 좋다. 첫날이라면 자동차의 매연까지도 묘하게 좋다. (그때마다 몸속의 기생충을 의심해 본다.) 간판에 쓰여있는 문자, 사람들의 의심적인 눈빛, 일렁거리는 햇빛의 냄새,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말. 모든 게 내가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일상적이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아서 기쁜 순간이다.
여행지에서는 푹 늘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는 나와 다르게 천천히 일어난다. 우리는 처음 여행할 때 아침시간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서로에게 스트레스였다. 나는 재깍재깍 일어나지 않는 아내가 답답했고 아내는 아침 일찍부터 부산을 떠는 내가 귀찮았다. 모든 시간을 함께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서로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의 말다툼 끝에 오전만큼은 각자 원하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서로를 위한 완벽한 합의였다.
아무리 유명한 관광지라도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아침에는 사람들의 진짜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엇을 먹고 출근을 하는지, 무엇을 입고 다니는지, 표정은 어떤지.... (물론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디든 밝지 않다.)
어느 도시에서도 아침에는 조금 걷는다. 숙소와 멀리 떨어지지 않고 근처를 돌면서 맛집으로 보이는 곳을 물색한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곳엔 나도 그곳의 단골인 양 자연스럽게 줄을 선다. 그리고 그곳이 맛이 있으면 잠시 후 아내를 데리고 와 다시 한번 먹는다. 아내에겐 이미 먹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문을 능숙하게 한다. 그리고 궁금해한다. 마침 처음 먹어본 것처럼. 이미 검증이 끝난 맛이지만 감탄을 연발한다. 그런 내가 웃기지만 그건 나만 아는 사실이다. 아니 가끔은 식당 주인도 안다.
'또 왔어?'라는 뜻으로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뜬다. 나는 눈썹을 치켜올려 무언의 답을 한다.
대만에 오기 전에 가장 기대했던 건 대만의 아침이다. 오랜만에 낯선 곳에서 혼자 걸을 생각을 하니 설렜다. 그리고 타이난의 첫날이자 마지막 날 아침.
나는
늦잠을 자버렸다.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여행지에서 늦잠을 자다니. 전 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하더라도, 도수가 높은 칵테일을 몇 잔 마셨다 하더라도 내가 아내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다니....
나의 홀로 산책은?
나의 아침 공기는?
여행지에서 좋아하는 시간 중에 하나가 '톡' 하고 빠져 버렸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다 같이 나왔다. 11시에 체크 아웃이니 시간 여유가 있었다. 짐을 두고 식당으로 갔다. 토비가 안내한 식당은 어제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광객들 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이 오는 곳 같았다.
우리는 갯농어가 들어간 생선죽 두 그릇, 땅콩을 얹은 찰밥 하나를 시켜 나눠 먹었는데 내 입맛에는 조금 싱거웠다. 전체적으로 싱거운 음식을 계속 먹다 보니 속이 불편했다. 비린맛이 올라오는 것은 아닌데 조금 느끼했다. 옆 테이블을 보니 아저씨 한 분이 맑은 생선국에 밥을 따로 시켜 먹고 있었다. 미리 알았으면 저 것을 주문했을 것이다. 안내자가 있으니 편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의 메뉴를 둘러보고 메뉴를 정할 여유가 없다. 안내자가 해주는 대로 따를 뿐이다.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나 대신 주문을 해주니 고마웠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이상하게 자꾸 불편했다.
토비가 기차표를 당겨 타이베이로 빨리 돌아가 그의 엄마와 점심을 먹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우리는 대만에 오기 전부터 한 번은 엄마를 만날 계획이 있었다. 아내는 엄마에게 줄 아이크림을 준비해 왔다. 어차피 오늘은 타이베이를 돌아다닐 예정이었으니 점심을 먹으면 더 좋았다. 저녁에 스케줄이 있는 것보단 점심을 함께 먹고 헤어지는 게 부담이 없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타이난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대만에 처음 온 건데, 타이베이는 들르지 않고 타이난에 먼저 왔다. 처음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인이 경주에 먼저 갔다가 서울로 가는 셈이다. 타이베이에선 가보고 싶은 곳이 정확히 있었다. 먹어보고 싶은 것도 정확히 있었다. 여행 대부분의 일정을 쫓아다니기만 했던 타이난과 다르게 타이베이에선 우리의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다. 무엇보다 그게 제일 기대됐다.
타이베이로 오는 기차에서 토비가 오늘의 계획에 대해 다시 말했다.
-엄마와는 저녁에 보는 게 어때요? 엄마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그냥 엄마는 신경 쓰지 말아요. 타이베이에 가면 내가 오빠와 언니랑 같이 가고 싶은 식당이 있는데 아마도 엄마는 거기로 올 거예요. 그때 봤던 내 친구들도 올 거고요.
여행 중에 계획은 계속 바뀔 수 있다. 그런데 특별한 기준이 없이 바뀌니까 답답했다.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지만 불편한 마음이 계속 쌓였다. 나는 마음을 계속 비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대되는 게 없고 기대되는 게 없으니 여행이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타이베이 중앙역에 내렸다. 아내와 토비가 화장실에 간 동안 주변을 둘러봤다. 타이베이 중앙역의 메인 로비로 가니 중앙역의 규모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하늘과 연결된 규칙적인 창문과 건물 내부의 규칙적인 창문이 한눈에 보였는데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봤었던, 빌딩과 도로가 왜곡되는 듯한 느낌이다.
서울역보다는 훨씬 큰 규모인데 인상적인 건 의자가 없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군데군데 노숙자도 보였다. 대게 사람들이 의자가 아니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면 공간은 어지러워 보인다. 하지만 타이베이는 달랐다. 분명 규칙적이지 않게 아무 곳이나 앉아 있었는데 번잡해 보이지 않았다. 깨끗했고 단정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아내는 냄새가 조금 심했다고 전했는데 한국 아줌마 한 분이 딸에게 '아이고야. 여기 너무 더럽다. 여기서는 오줌도 못 싸겠네.'라고 크게 얘기하는 바람에 민망했다고 한다. 작게 말하면 될 것을 모든 사람들이 들으라는 냥 그렇게 크게 말할 필요까지 있을까? 아마 그 공간에는 한국어를 잘하는 대만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숙소에 가서 캐리어를 두고 오면 시간이 지체되니까 타이베이 중앙역에 캐리어를 맡기고 돌아다니기로 했다. 역 중간중간에 캐리어보관함이 충분해서 편하게 맡길 수 있었다. 역과 연결돼 있는 지하도를 통해 중산역까지 걸었다. 한 정거장이지만 매우 짧은 거리였다. 지상으로 올라갔다. 타이베이와 첫 만남이다. 계단을 오르며 조금 설렜다. 중산역 밖으로 나가니 사람들이 많았다. 가운데는 커다란 인도가 있고 양 옆으로 낮고 오래된 건물이 서 있다. 매일 걷는 '연트럴파크'와 많이 닮아 있다.
익숙한 풍경이라 실망한 것은 아니다. 오래된 노출콘크리트 건물이 많았는데 내부의 인테리어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카페나 식당이 많았는데 오래된 곳이기보다는 새로 생긴 곳이 많은 것 같았다. 중심지에서 노포가 사라지고 새로운 가게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큰길을 따라 솽렌역까지 걸었다. 중산역에선 한 정거장, 타이베이 중앙역에선 두 정거장의 거리다. 타이베이역에서 솽렌역까지는 두 정거장이지만 오르락내리락거리며 지하철로 이동하는 시간이나 그냥 걷는 시간이나 비슷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깝다.
토비는 어릴 적, 솽렌역 근처에서 오래 살았다고 했다. 예전에는 자동차를 정비하는 카센터가 모여있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카센터가 빠지고 카페나 개인 음식점이 많이 생겼다고. 우리나라로 치면 '문래동'같은 곳이라고 설명했는데 주변을 걷다 보니 확실히 그런 느낌이 있다. 돌이켜보니 한국에 있었을 때, 토비는 유독 문래동을 좋아했다. 그때는 그냥 '핫한 곳이라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타국의 생활에서 유년시절의 분위기를 엿볼 있는 곳이라 좋아했었나 보다. 공간의 익숙함이 편안함을 주었을 것이다. 토비는 신나 보였다. 골목을 걸으며 어릴 적 동생과 놀았던 곳, 어릴 때 살았던 집을 소개해주었다. 우리에게 진짜 토비를 설명하려는 것 같았다. 하긴 한국에서 만난 토비와 대만에서 만난 토비는 사뭇 다르다.
한국에선 그저 잘 웃는 아이였다면 대만에선 생활의 고단함이 묻어 있는 직장인 같은 느낌이 있다. 당연히 다를 것이다. 학생 때와 직장인일 때, 이십 대와 삼십 대일 때, 타국과 고국일 때....
토비와의 여행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땐 토비 말고 다른 친구들도 함께였다. 그러니깐 이번 여행은 토비를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일 것이다.
주변을 산책하다가 토비가 어릴 적부터 먹었다는 만두집으로 향했다. 솽렌역 대로변에 있었는데 멀리서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게 보였다. 대만에 와서 그렇게 만족스럽게 먹은 음식이 없어서 그런지 기대되진 않았다. 게다가 만두다. 만두는 향이나 냄새, 익힘에 따라 엄청 실망스러울 수는 있으나 기억에 남을 만큼 맛있기도 힘들다. 아무리 맛 집이라 하더라도 평균 이상의 맛을 찾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한식으로 치자면 불고기, 부침개, 잔치국수 등이 그렇다. 맛없기도 맛있기도 힘든 음식. 그러니까 나에게 만두는 애초에 기대치 자체가 낮은 음식이다. 식사라기 보단 간식에 가깝다. 심지어 그런 음식을 오래 줄을 서서 먹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이미 마이너스다.
다행히 긴 줄은 포장 줄이었고 우리는 매장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기다란 테이블에 셋이 나란히 앉았다. 주문은 간단했다. 찐만두 두 접시 (한 접시에 만두 10개), 산라탕 하나. 반찬으로 먹는 건두부 오이무침. 반찬류는 작은 공간에 미리 준비돼 있었는데 따로 주문하지 않고 한 접시씩 가져다 먹고 나중에 계산하는 듯했다. 만두가 나오기 전에 건두부 오이무침을 먼저 먹었다. 양꼬치 집에서 기본으로 시켜 먹었던 건두부. 그냥 입이 심심하니까 먹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한국에서 먹는 중국산 건두부와는 차원이 달랐다. 건두부 자체가 고소해서 그냥 먹어도 담백하고 맛있었다. 한국에서 먹는 건두부는 수분과 함께 맛도 빠졌기 때문에 별 맛이 없는데 이건 달랐다. 수분이 적당히 남아 있고 고소한 맛이 응축돼 있다. 별 간이 돼 있지 않았는데도 맛있었다. 깊은 그릇에 가득 담아 면처럼 후루룩 거리며 먹고 싶을 정도다. 오이는 단촛물에 담가둔 맛이었는데 피클처럼 강렬한 맛이 아니라 심심해서 그냥 먹어도 간이 맞았다.
만두가 나왔다. 수분이 많은 것을 보니 찐 것이 아니라 물에 삶아서 건져 낸 것이다. 만두피가 조금 두꺼웠는데 찰지지 않고 부드럽지도 않았다. 딱! 적당했다. 잘 삶은 수제비를 먹는 것만 같다.
간이 잘 맞지만 초 간장을 뿌렸다. 작은 종지가 준비 돼 있는 않는 걸 보니 간장을 찍는 것보단 뿌려 먹는 게 기본인 듯하다. 풍미가 확실히 달라졌다. 대만식 만두에 적당한 초간장은 필수인 것 같다. 산라탕은 한국에선 흔하지 않은 메뉴다. 하지만 애주가들은 안다. 그게 얼마나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식인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신 맛과 매운맛이 있는 탕이다. 그러니 해장으로 좋다. 반찬으로 먹은 건두부 그리고 만두까지 좋았다. 남은 건 산라탕이다.
중국집에서 좋은 재료가 가득 들어간 산라탕은 여러 번 먹어 봤으나 분식집에서 먹는 듯한 심플한 산라탕은 처음이다. 현지식인 것 같아 더욱 기대 됐다. 한 술을 떴다.
시다. 맵지 않다. 싱겁다.
그동안 내가 먹은 산라탕은 시고 맵고 간간했다. 조미료의 강렬한 감칠맛이 아니고 시고, 매운맛이 잘 어우러져 기분 좋은 감칠맛을 냈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맵지도 않고 시기만 했다. 게다가 싱거웠다. 시지만 달지 않고 싱거운 탕수육 소스를 퍼 먹는 느낌이었다. 이 집만 유독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대만 대부분의 국물 요리가 싱거운 듯했다. 평소에 짜게 먹는 편이 아닌데도 대만의 국요리는 유독 싱겁게 느껴졌다. 간이 잘 맞는 국을 마셔야 속이 조금 풀리려나? 숙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속이 계속 더부룩했다.
대만은 미식의 나라라던데, 뭘 먹어도 맛있다던데 많은 사람들이 환장을 하면서 먹는다던데....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 못 된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의 맛은 쉽게 미화된다. 유튜브 영상은 좋은 기억들만 편집돼 기록되다 보니 모두 맛있는 것만 같다. 우리는 수많은 이들의 가공된 행복을 소비하고 있다.
맛있다고 하면 진짜 맛있다고 믿는다. 많은 이들이 맛있다고 하니 나도 맛있어야 할 것만 같다.
자꾸 반항심이 든다. 묻고 싶어졌다. 대만 음식이 진짜로 맛있는지.
물론 만두는 맛있었다. 담백하고 잡내도 나지 않고 부추향과 고기향도 괜찮았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엄청난 맛이 아니었다. 갑자기 슬퍼졌다. 이게 다 나이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새로운 맛이 주는 기쁨을 찾기가 힘들다. 웬만한 건 다 먹어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대가 덜 하다. 다 아는 맛이다.
나는 여행지에서 끊임없이 맛을 탐미했었다. 보고, 먹고, 배웠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기쁨이 줄어드는 순간이 온 것만 같다. 인정해야 한다.
다 때가 있는 것이다.
그 순간이 갑자기 그렇게 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