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 - 거울치료
사찰에서 나와 하야시 백화점에 갔다. 타이난에 가면 무조건 들려야 하는 필수 코스.
대만 최초의 백화점이라고 하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만의 일제식민지 시기에 건축된 곳이다. 1932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약 100년 된 건물이다. 옛 모습을 적당히 지켜가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화장실 역시 마찬가지다. 백화점 화장실이니 깨끗하긴 했으나 타일과 창문 등에서 옛 흔적이 남아 있다. 절대로 벗길 수 없는 세월의 때. 그게 청결하지 않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화장실이라면 무조건 현대식으로 바꾸고 보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나는 하야시 백화점의 그 무엇보다 화장실이 인상적이었다.
백화점이라고 해서 브랜드 제품을 팔 것이라 생각했으나 대만 디자인 제품이나 타이난 관광 기념품을 위주로 팔아서 좋았다. 제품 디자인도 예쁘고 특색이 있어 그야말로 타이난을 기념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팔릴 만한 것은 온갖 다 가져다 놓은 인사동의 기념품 샵과는 차원이 다르다. 대부분이 타이난의 문화와 전통에 관련된 기념품이었다. 게다가 디자인이 귀엽고 세련됐다. 예전 같았으면 냉장고 자석이라도 하나 샀을 텐데. 아내와 난 이제 소비에 있어 꼼꼼하게 따지는 편이다. 기념품이라는 것은 그곳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을 때 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이제 타이난 1일 차다. 내일이면 떠날 것이고. 아직은 타이난을 기억하고 싶은 것이 없다. 예쁘다고 무턱대고 샀다가 집안에 굴러다니는 쓸데없는 물건들이 너무 많다. 만약 사원에서 점괘를 보던 나무토막을 팔았더라면 그건 고민 없이 샀을 것 같다.
백화점을 나서기 전 아쉬운지 아내가 얘기했다.
-나 쿠키라도 하나 살까 봐.
-쿠키? 잘 먹지도 않는 쿠키를 왜?
-그냥 나 기념하게....
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내 아내에게 건넸다. 아내가 산 쿠키는 빨간색 원형의 철제통에 들어 있었다. 뚜껑의 아래쪽에는 하야시백화점이라고 쓰여 있고 그 위로는 붉은 카라가 있는 검은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캐릭터가 프린트 돼 있었는데 왠지 익숙한 모습이다.
-이 캐릭터가 입은 원피스 그대로 1층 직원들이 입고 있었어. 너무 귀엽잖아.
그래. 우리에겐 이런 게 기념품이다. 쿠키는 관심 없다. 캐릭터가 그려진 그 통은 우리 집 거실 어딘가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가요.
토비의 말이 반가웠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많이 걸어서 조금씩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백화점 근처에 식당이 있을 줄 알았는데 토비는 어디론가 계속 걸었다. 관공서로 보이는 건물들이 보였다.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큰 소방서가 있는 것을 보니 타이난의 중심지인 모양이다. 큰길인데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길이 조용했다. 저녁 8시밖에 안 됐는데 캄캄했다. 달밤을 셋이 걸었다. 한낮의 소음이 가라앉은 길이었다. 거리에는 우리의 말소리만 들렸다. 말을 하지 않으면 발걸음이 울렸다. 잔잔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큰길을 지나 다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어찌 된 게 큰길에는 사람들이 없고 골목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골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걷던 토비가 말했다.
-여기가 YOU&I호스텔이에요. 제가 처음 추천드렸던 곳 아시죠?
식당을 가겠다더니 토비가 우리를 데리고 온 곳은 자기가 추천했던 호스텔. 나는 아차 싶었다.
'토비는 처음부터 여기에 오고 싶었구나. 자신이 추천했던 숙소를 감안하지 않고 우리가 에어비앤비를 예약한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하구나.'
동시에 기분이 묘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대만 여행을 처음 계획한 건 나와 아내다. 토비가 시간을 내서 합류해 준건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의 여행을 토비에게 다 맞출 수는 없다. 게다가 비용도 우리가 다 내려고 마음먹고 있다. 숙박 비용 역시 우리가 다 지불한 상태고. 식비나 술값 역시 웬만하면 우리가 내고 있고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그럴 생각이다. 그런데도 토비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게 묘하게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심사가 꼬이기 시작했다. 호스텔을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쳤다. 그도 그럴 것이 호스텔이 역사가 오랜 건축물도 아니고 그냥 새로 지어진 건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호스텔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어두운 골목 안에 환하게 조명이 켜져 있는 곳. 멀리서 봐도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다 왔구나 싶었는데 그곳이 아니었다. 다시 조금 더 걸었다. 이제는 좀 아무 데나 앉고 싶었다.
하야시 백화점에서 30분을 넘게 걸어 도착한 곳은 골목 안에 있는 작은 식당이었다.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하느라 분주했다. 자리가 없었는데 줄을 서 있다가 자리가 나면 우선 앉고 나서 주문을 하면 되는 시스템.
10분 정도 기다리니 자리가 나왔다. 우리가 시킨 것은 돼지덮밥과 돼지내장탕 그리고 공심채 볶음. 앉으면 바로 음식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오래 걸렸다. 밥은 퍼서 미리 졸여진 양념장을 얹어내고 탕 역시 바로 퍼서 주면 되는 것이니 그리 오래 걸릴 일이 아니다. 시간이 걸리는 것을 보니 밥을 새로 하고 있는 듯했다. 음식이 나왔다. 1인분의 양이 적었다. 먹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여행지에선 딱 좋은 양이다.
맨밥에 돼지비계조림을 올리고 말린 고기 가루를 올린 '로우송 덮밥'
비벼보니 간간한 간장맛과 기름진 돼지비계가 잘 어우러졌다. 간장버터밥 같다. 다만 짙은 노란색의 고기 가루가 향이 강했는데 그게 바로 '로우송'이었다. 묘하게 꾸릿한 향이 있어 처음엔 일단 거부감이 들었다. 가루가 없었으면 입맛엔 더 맞았겠지만, 이 덮밥의 주인공은 로우송이다. 돼지내장탕은 조금 싱거웠다.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에도 돼지내장은 즐기지 않는 편이라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여행지에서의 아내는 용감하다. 일단 먹어보고 안 먹으면 그만이라는 신념의 그녀는 과감하게 내장탕을 한 술 뜬다. 아랫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몇 번 흔들고는 수저를 놓는다.
토비는 현지인들이 즐기는 음식을 소개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타이난을 여행 왔을 때 맛있게 먹은 추억이 있었던 곳일 것이다. 자신이 전에 묵었던 호스텔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하지만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토비에겐 추억이었고 우리에겐 체험이었다.
양이 적으니 밥을 금세 먹었다. 묘하게 허무했다. 토비가 눈치를 챘는지 다른 식당에 가보자고 했다. 그래. 아직 끼니를 시작한 기분도 아니다.
-타이난은 예로부터 소가 유명해요. 그래서 우육탕 파는 곳이 많아요. 늦게 까지 문을 여는 곳도 많고요. 우육탕 맛집으로 가봐요.
오케이! 괜찮은 선택이다. 아내와 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면서 식사다운 식사를 하게 될 것을 기대했다. 아내는 여행 일주일 전부터 면을 먹지 않을 것을 선언했었다.
-대만 가면 면을 많이 먹을 것 같으니 이제부터 웬만하면 면을 피하겠어. 밥 위주로 먹고 면은 대만 가서 많이 먹고 올 거야.
밥을 먹고 나왔으니 면을 먹는 것도 괜찮다. 드디어 대만의 우육탕면을 먹어보는구나 라는 마음으로 토비가 선택한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숙소 근처에 있었다. 갈 때는 꽤 걸은 것 같았지만 큰길로 걸어오니 금방이었다. 토비가 시킨 건 우육탕 두 개와 소고기 야채 볶음 하나. 우육탕 세 개를 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하나로 나눠 먹겠다고 했다. 토비는 온전히 하나를 먹을 수 있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 하루 종일 숙취에 시달리다 이제야 위장이 허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가 물었다.
-여기는 면은 없어? 나는 면 먹고 싶은데.
-응. 여기 면은 없어.
우육탕면을 생각하고 온 우리는 실망이 컸다. 게다가 여기에서 무슨 면을 찾느냐 식의 말투가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빴는데 다른 친구였다면 바로 화를 냈겠지만 토비라서 이해를 하려고 애썼다. 토비는 대만 사람이다. 뉘앙스가 주는 감정까지 한국말로 주고받기는 힘든 일이다.
우육탕은 나쁘지 않았다. 간간한 갈비탕의 느낌이었는데 기름이 많고 고기가 질겼다. 게다가 조금 짜게 느껴졌다. 맛있게 먹는 토비와 다르게 아내와 난 적당히 몇 술을 떴다. 갑자기 배가 부르고 피곤해졌다.
숙소에 가서 조금 쉬다 나오기로 했다. 밤 9시가 훌쩍 넘었지만 그냥 자기엔 아쉬웠다. 배가 부르니 안주를 굳이 시키지 않아도 되는 바에 가 보기로 하고 숙소에서 조금 쉬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에서 아치깔창부터 꺼냈다. 족저근막염으로 고생을 한 후로 꾸준히 아치깔창을 쓰고 있는데 여행 전에 새로 산 것이 걸을 때마다 거슬렸다. 아치깔창을 사용해 본 사람을 알겠지만 처음에는 발이 아플 정도로 적응이 되지 않다가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발의 피로도를 확실히 줄여준다. 하지만 이번에는 발바닥의 아치를 지지해 주는 높이를 더 높은 것을 산 게 말썽이었다.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양말을 벗고 발을 찬 물로 씻었다. 피로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여행 방법도 달라진다. 어느덧 아내와 나는 여행 중에도 자주 쉬어줘야 하는 나이가 됐다. 슬프지만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우리 인생의 남은 여행도 잘 해낼 수 있다.
타이난에 유명하지만 인기가 많아 쉽게 갈 수 없는 바를 토비가 예약했다고 했다. 밤 12시 예약이라 그전까지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숙소에 쉬기보다는 나가서 어디라도 한 군데 더 돌아보기로 했다. 토비가 구글지도에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즈음 토비에게서 휴대폰을 뺏어버리고 싶었다. 나의 여행은 적당한 계획과 적당한 무계획이 합쳐졌을 때 가장 좋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오늘만 해도 그 어떤 곳보다 우연히 들어간 사원에서의 시간이 가장 좋았다. 하지만 토비는 최대한 시행착오 없이 좋은 것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게다가 토비가 데리고 가는 곳은 토비 역시 처음 인 곳도 많았다.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곳이라지만 현지인들의 취향이 관광객의 취향과 일치 않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문득, 깨달았다.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나 역시 무조건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외국에서 온 친구에게 무례했던 것은 아닌지, 그들이 찾은 식당을 무시하며 진짜 현지인들은 다른 곳을 간다고 강요했던 것은 아닌지.... 여행자들이 체험하고 싶은 것들은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것과는 다르다. 그 차이를 모르고 나는 진짜 한국을 알려준답시고 나의 취향을 강요했던 것 같다.
내가 그랬다. 내가 그랬었다. 토비에게도 그랬다. 좋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때론 그 좋은 마음이 상대방에게 커다란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거울치료!
이렇게 완벽한 거울치료가 있다니. 나는 토비가 한국에 오면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에 언제 시간이 나는지 묻곤 했다. 약속을 잡으면 장을 보고 메뉴에는 없는 음식을 나의 식당에서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게 좋았고 즐거웠다. 하지만 그게 그에겐 때론 부담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가보고 싶은 곳이 참 많았을 텐데 수십 번도 더 온 나의 가게로 오라고 한 것이 어쩌면 싫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단정 짓고 오해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배려한다는 마음이 불편함이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동안의 시간을 되돌아 보게 됐다.
토비의 친절이 조금씩 불편함으로 다가올 때 즈음 나는 깨달았다. 그 후로 나는 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치료 중이라고 생각했다. 다 뿌리는 대로 거두는 것이다!
토비가 데리고 간 바는 대만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 예약이 힘든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와 아내에겐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분위기도 평범한 편이었다. 우리가 원했던 건 여행자들이 바글바글한 펍이었는데 정작 우리가 간 곳은 프라이빗하고 조용한 바였다. 그래도 칵테일 맛은 괜찮았다. 평소에 칵테일을 즐기지 않는 나와 아내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숙소 앞에 내가 그토록 원하던 분위기의 노천 식당이 많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당장이라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맥주라도 한 잔을 해야 잠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미 피곤하기도 했고 그곳에 앉고 싶은 건 아쉬움보다는 더 즐겨야 한다는 여행지에서의 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전에 하루를 떠올렸다. 대만 첫날이다. 많은 것을 한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온전한 나의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