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괘를 볼 수 있는 대만 사원
인생 첫 취두부와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앞서 걷던 토비가 뒤로 돌더니 말했다.
-이상해요. 속이 진짜 안 좋았는데 맥주 한 캔 마셨더니 괜찮아졌어요.
이 녀석! 해장술의 위대함을 드디어 깨달은 것 같다. 속이 울렁거려서 죽겠던 날, 형들이 억지로 권했던 나의 첫 해장술이 생각났다. (그들은 여전히 나와 좋은 술친구들이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계속 걸었다. 아직은 타이난 1일 차. 하염없이 걸어도 모든 게 좋았다.
오후 6시.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길거리 상점 간판의 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주말에는 대만 곳곳에서 사람들이 놀러 온다고 했다. 붐비지 않는 대신 유명한 맛집은 월요일에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 많다. 토비가 체크해 둔 곳 중에서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길을 걷다가 자연스럽게 연두부푸딩을 파는 집으로 들어갔다. 1층에 있는 매장들은 인도와 매장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문이 활짝 열려 있어 걷다가 들어가는 데 조금의 막힘도 없다. 그건 나갈 때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런지 선불로 계산을 하는 데가 많다.
푸딩을 하나 주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인에게 눈총을 받을 일이라 적어도 두 개는 시켜야 되지 않겠냐고 물으니 타이난에서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여행객들에겐 고마운 문화다. 괜히 미안해서 여러 개 시켰다가 입에 맞지 않아 그대로 버리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연두부와 푸딩이라....
두부는 간장을 얹어 반찬으로나 먹어봤지 이렇게 디저트로 먹는 건 처음이다. 게다가 단맛이 첨가 됐다고 하니 콩국수도 소금을 쳐서 먹는 나에겐 생각만 해도 느끼한 조합이다.
수저로 한 스푼을 떴다. 흐믈흐믈한 연두부 위로 흑설탕을 녹인 듯 진득한 소스가 얹어져 있다. 젤리를 먹듯이 호로록 한 번에 들이켰다. 부드러운 것이 입안에 가득 차며 적당한 단 맛이 먼저 퍼진다. 이어지는 녹진한 고소함. 두부라기보단 우유 같다고 느껴졌는데 끝에 두부의 향이 살짝 스친다.
-맞네. 맞네. 두부 맞네!
개운하다. 신기하다. 깔끔하다. 두부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일반 푸딩과 별 다름이 없어 실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끝에 살짝 스치는 두부향이 재미있었다. 매력이 있다. 음식은 본연의 맛을 느낄 때와 예상치 못한 풍미를 경험할 때 즐거움이 다르다. 평범하게 봤던 사람의 매력에 빠졌을 때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별 거 아니라고 느껴졌던 음식도 어느 순간 머리를 '띵'하고 울리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백 번을 넘게 먹다가 갑자기 느껴질 수 있고 단 한 번에 느껴질 수도 있다.
연두부푸딩 집에서 나오니 어느새 더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른쪽 골목 안에 환하게 불을 밝힌 사원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원 앞에 서서 안을 들여보다가 토비에게 말했다.
-들어가 보자. 우린 사원 가는 거 좋아해.
-그럴래요? 그럼 제가 잠깐 설명해 드릴게요. 사원에 들어갈 땐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와야 해요. 대만에 있는 어떤 사원도 마찬가지죠. 가운데 길은 다니면 안 돼요. 가운데는 신들이 다니는 길이에요.
그 말을 듣자마자 커다란 배낭을 멘 채로 가운데 길을 활보하며 걷는 유럽인들이 보였다. '이 녀석들아! 거긴 신들이 다니는 길이란다.'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입구에 있는 기부함에 기부금을 내고 향을 들었다. 여러 개의 향을 든 다음에 돌아다니며 향을 꼽고 소원을 빌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엉겁결에 대만의 사원에서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나는 꽤 진지했다.
'아버지 병원 옮기는 곳에서 잘 적응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가게를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우리 부부 지금처럼 잘 살게 해 주세요. 그러려면 조금 더 경제적으로 걱정 없게 해 주세요. 많이 바라는 거 아니에요. 적당하게 아껴 쓰며 여행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소원을 빌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할 일인가? 내가 신이라면 '야. 잠깐만 넌 적어내. 적어내. 너는 그 욕심부터 버리렴. 니 소원은 외우지도 못하겠다.'라고 얘기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얘기하자. 직접적으로!
'돈 좀 벌게 해 주세요.'
그래 그게 솔직한 말이다. 나는 지금 돈이 필요하다. 아버지 병원비도 걱정이고 매달 쪼달리는 가겟세도 걱정이고 아파트 대출금도 걱정이고 생활비도 걱정이고 엄마에게 제대로 용돈도 주지 못하는 게 고민이다. 그런 고민들을 잠시 잊고 싶어 여행을 온 것이지만 생각을 깊게 하면 할수록 고민들이 짙어졌다. 빨리 생각을 떨쳐 내야 한다. 여행지에서까지 온갖 고민을 끌어안고 있을 수 없다. 소원을 바꾼다.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 주세요.'
결국 흔하디 흔한 소원을 빌고 마지막 향을 꼽는다. 사람들이 생각이 없어서 '가족건강'으로 소원을 비는 게 아니다. 수많은 고민을 거쳐 마음속에 남은 가장 중요한 바람인 것이다.
사원은 생각보다 컸다. 세상의 일들을 관장하는 신들이 각각 모셔져 있었는데 가족 관련, 연인 관련, 사업 관련 신들이 따로 있어 그 앞에서는 그와 관련된 소원을 빌면 되는 것이다. 연애 관련 신 앞에는 미혼의 남녀들이, 아이를 점지해 주는 신 앞에는 중년의 여성들이 모여 있는 이유다. 한 바퀴 돌고 나니 토비가 말했다.
-언니, 오빠! 점괘 한번 보실래요?
-응? 무슨 점괘. 여기서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저기 사람들 하고 있는 거 다 점괘를 보는 거예요.
토비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중년의 여성이 무릎을 꿇고 앉아 나무토막 두 개를 몇 번씩 던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사원을 돌아다니며 나무토막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들렸던 터라 도대체 저 걸 왜 하고 있는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한쪽에 있는 반달 모양의 빨간 나무토막을 건네며 토비가 말했다.
-일단 이걸 던져서 오늘 점을 봐도 되는지 물어봐야 해요.
토비가 건네준 나무토막은 윷처럼 한쪽은 평평하고 한쪽은 둥글게 돼 있었다. 포괄(擲筊, 짜오베이 / jiaobei)이라고 불리는 나무토막 두 개를 던져서 각각 다른 면이 나오면 신이 답변을 주겠다는 뜻이고 같은 면이 나오면 답을 주지 않겠다는 것인데 만약 세 번을 던져 모두 같은 면이 나오면 그날은 점괘를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던지기 전에 마음속으로 먼저 신에게 물어보고 포괄을 던졌다.
'제가 오늘 소원을 빌고 점괘를 봐도 되겠습니까? 저의 소원은 제가 쓰려고 하는 글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잘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반달 나무토막을 조심스레 앞으로 던졌다. 톡톡 바닥으로 튀던 포괄이 멈췄다.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점괘를 봐도 된다는 얘기다. 토비의 안내에 따라 큰 항아리에 가득 차 있는 나무막대기 중 하나를 뽑았다. 막대기의 번호를 확인하니 100번. 이제 다시 포괄을 들고 와서 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제가 100번을 뽑았는데 이게 맞나요?'
그렇게 묻고 세 번을 던져서 연속으로 다른 모양이 나오면 점괘가 있는 상자에서 100번을 찾아 나의 점괘를 확인하면 된다. 만약 세 번 연속이 안 나오면 다른 나무 막대기를 뽑아 번호를 확인하고 포괄이 다른 모양으로 세 번 연속 나올 때까지 반복하면 된다. 나는 아주 쉽게 한 번에 성공을 했는데 토비가 이런 경우는 많지 않다고 했다. 점괘가 들어 있는 상자를 여니 한자로 쓰인 점괘가 프린트 돼있다. 그것을 한 장 뜯어 낸 후 번역을 해서 토비가 보여주었다.
해석을 하자면 아래와 같다
<이 점괘는 당신이 매우 중요한 순간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에 큰 기회가 찾아올 것이지만,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
소원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해주는 점괘인 것 같아 재미있었다. 이번은 아내의 차례.
아내도 크게 어렵지 않게 점괘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점괘를 확인한 토비가 웃으며 아내에게 물었다.
-언니! 도대체 무슨 소원 빌었어요?
-나? 돈 좀 많이 벌게 해달라고 했는데?
아내의 점괘는 이랬다.
<이 점괘의 핵심은 '인과응보'. 선행하는 마음 가짐입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내의 소원을 듣고 보니 점괘가 마치 아내를 꾸짖는 것 같아 실소가 터졌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평소에 돈과 관련해서 소원 같은 거 안 빌잖아. 어쩌다 한번 그렇게 소원을 빌었는데 하필이면 이런 점괘가 나오냐. 우리 그냥 맘을 비워야겠다.
밖으로 나오니 더 컴컴해졌다. 생각지도 않게 사원에 한 시간이나 머물렀다. 재미있었다. 토비가 아니었다면 해보지 못할 경험이었다. 다시 걸었다. 이제는 토비가 좋아하는 식당에 가보기로 했다. 타이난이 슬슬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