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난
타오위안 기차역에서 출발하니 금세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온통 논밭이다. 만약 토비 없이 우리가 계획을 했다면 우선 타이베이역으로 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타이난으로 가는 열차를 탔을 테고. 그렇다면 이리저리 한 시간 정도는 더 소요되는 셈이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 중에 굳이 타이난을 가게 된 것은 토비의 추천 덕분이었다. 토비는 우리에겐 타이베이보다 타이난이 잘 어울린다며 대만에 오게 되면 타이난을 함께 여행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대만이 처음이었기에 타이베이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타이난이 그러게 좋다고 하니 한번 가봐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현지인이 그렇게 추천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도 했고.
고속열차를 타기 전에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 음식을 공략하는 것도 잘 알려진 대만 여행법 중에 하나지만 그래도 편의점에서 첫 끼를 시작하긴 싫었다. 맥주를 세 캔 들고 탔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선 물도 마시는 게 안 되지만 고속철에선 가능한 모양이다. 맥주를 따서 아내와 한 캔씩 마셨다. 숙취가 있는 토비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고 나머지 한 캔은 자연스레 내 몫이 됐다. 대만 맥주는 탄산이 적어 목 넘김이 부드럽다. 어떤 면에서는 싱겁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데 더운 나라들의 맥주가 대부분 그렇듯 물처럼 마시기엔 나쁘지 않다.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나니 비로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며칠 내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여러 고민들이 울컥하며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다.
'그래 어차피 왔다. 이제 좀 즐기자.'
타이난으로 가는 길에 토비가 한번 더 숙소를 어디에 정했는지 물었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타이베이에 가서 느낌을 보고 숙소를 정하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할 지, 어떤 여행을 할 지도 모르면서 숙소만 먼저 예약 했다간 동선만 꼬일 뿐이다. 공항에서 숙박지원금을 받았다면 숙박지원금을 쓸 수 있는 곳으로 숙소를 정했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다. 아무데나 정하면 된다. 그런데 토비가 자꾸 자신의 집 근처에 숙소를 정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토비는 타이난을 여행하는 이틀을 제외하고 우리와 온 종일 함께 할 수 없다. 4일 중에 이틀은 휴가지만 이틀은 회사에 나가야 하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타이베이에서 어디에 자든 토비와는 관계가 없다. 카톡으로 토비가 숙소 링크를 하나 보내줬다. 자기 동네에 있는, 지하철과 가까운 숙소였다. 토비가 자꾸 본인의 집 근처로 숙소를 추천하는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가까이 있어야 자기가 한번이라도 더 챙길 수 있고 아침 한끼라도 한번 더 먹을 수 있지않냐는 이유여서였는데 나는 그렇게 우리에게 신경쓸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토비의 재촉에 아내가 난감해하는 듯 하여 그냥 될대로 돼라는 식으로 숙소를 예약해버렸다.
1시간 20분 만에 타이난에 도착했다.
도착할 즈음, 나는 화장실에 있었다. 맥주 두 캔을 연속으로 마신 게 문제였다. 화장실에서 급하게 나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기차칸 끝에 있었던 캐리어를 바로 들고 내렸다. 창가에 걸려있는 나의 재킷과 나머지 짐은 아내와 토비가 가지고 내렸다.
타이난 기차역에 내리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커다란 창밖으로 키가 큰 야자수가 먼저 눈에 띄었는데 비로소 남쪽의 나라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진짜 여행의 시작이구나.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으면 온몸이 설렌다. 발걸음이 가볍다. 조금만 걸어도 통증이 느껴지는 족저근막염이 있었나 싶다. 눈썹이 자꾸 올라간다. 광대가 간질거린다. 캐리어를 끄는데 무게가 갑자기 치우치게 느껴졌다. 바퀴가 굴러가는 소음이 갑자기 커졌다. 확인해 보니 한쪽 바퀴가 망가져 틀어져있었다. 하필이면 이때 망가지다니. 아내에게 비틀어진 바퀴를 가리키니 곁으로 와 조용하게 말했다.
-토비에겐 얘기하지 마!
무슨 뜻인지 안다. 성치 않은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로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네 바퀴를 굴리지 않고 두 바퀴만 굴려 다닌다면 그리 어려울 일도 아니다.
1층으로 내려와 아내는 화장실을 가고 토비와 나는 기차역 밖으로 빠져나갔다. 더웠다. 입고 있던 점퍼를 어깨 밑으로 내려 반만 벗었다. 토비는 우버를 잡느라 손가락이 분주했다. 나는 역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우리의 짐을 하나씩 확인했다. 캐리어, 작은 가방. 그리고....
-어? 그거 없다.
-뭐요?
-너희 엄마가 선물해 준 거.
-네? 헐! 진짜네요.
-내 자리에 있었는데 안 가지고 내렸어?
-언니가 이것저것 챙기는 거 같던데. 저는 제 짐만 가지고 내렸어요.
토비의 엄마는 우리가 대만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간식과 대만식 고추장아찌를 토비를 통해 보내 줬었다. 멀리 아내가 보였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거 안 들고 내렸어?
-뭐?
-토비 엄마가 우리한테 선물해 준 거.
아내는 이제야 생각 난 듯 짐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어?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의자 밑에 둔 에코백을 잊은 모양이다. 보이지 않았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마침 내릴 때 화장실에 간 내 탓이다. 화장실에 갔다가 자리에 돌아가 한번 돌아보지 않고 바로 짐을 가지고 내린 내 탓이다. 토비의 눈치부터 살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괜찮을 리가 없다. 미안하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토비는 평소처럼 잘 웃지 않았는데 그게 엄마의 선물을 바로 잃어버린 것 때문인지 어제 늦게 까지 마신 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철도 안내 센터에 전화해서 우리 좌석 알려주고 분실물 찾는 방법을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그거 찾는 거 어려운 일 아닐 거 같은데
토비는 타이난 시내로 가는 동안 한 번 시도를 하더니 연결이 쉽게 되지 않자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았다. 대만에 오자 마자 작은 사고의 연속이다. 실컷 신청해놓고 기대했었던 '숙박지원금 러키드로우'를 시고 해보지도 못했으며 토비의 엄마가 준 웰컴선물 또한 먹어보지도 못하고 잊어버렸다. 뭔가 자꾸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토비야! 타이베이로 돌아가서 엄마 시간 되면 식사 한번 하자. 우리 안 그래도 그럴라고 했었어.
사실 아내와 난 토비의 엄마를 한번 정도 볼 생각을 하고 있긴 했다. 토비의 엄마는 한국에 올 때마다 아내에게 대만에 언제 올 거냐고 물었다. 그러니 대만에 와서 토비의 엄마를 보지 않고 간다면 적지 않게 서운해할 것 같았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라 토비의 엄마를 봐도 좋지만 안 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선물까지 잃어버렸으니 무조건 토비 엄마를 직접 보고 사과를 해야 했다.
우버 택시를 타고 20분 정도 달리니 타이난 시내에 들어섰다. 간판이 한자로 됐을 뿐 거리 분위기가 태국 치앙마이나 베트남 냐짱의 풍경과 사뭇 비슷하다.
숙소에 도착했다. 대만에 오기 전, 토비가 추천한 호스텔을 가야 할지 내가 고른 에어비앤비 숙소를 가야 할지 고민했다. 에어비앤비에서 본 숙소는 1박에 20만 원 정도여서 현지 가격에 비하면 조금 높은 편이었지만 타이난 사람들이 살고 있을 법한 집이었고 깨끗해 보였다. 둘이 가는 게 아니었으니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아마 둘이 갔으면 6~10만 원 사이의 속소로 결정했을 것이다. 우리가 숙소를 정한다고 하니 토비는 타이난까지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겠다고 했다. 그게 자기가 사겠다는 건지 아니면 대신 끊어만 준다는 말인지 정확하지가 않아서 우린 당연히 기차표 예매한 금액을 현금으로 줄 생각이었다. 토비가 시간을 내줘서 함께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웬만한 금액은 우리가 다 지불할 생각이었다.
타이난 숙소는 사진으로 본 것보다는 작았다. 최대 여덟 명까지 숙박할 수 있다고 해서 내부가 클 것이라 생각했는데 네 명 정도 묵으면 딱 적당한 숙소였다. 토비에게 1층의 작은 방을 내주고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캐리어를 펼쳐 반바지부터 찾았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계속 편치 않았다. 몸이라도 가볍게 하고 싶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첫 끼를 먹어야 한다. 어디든 앉아서 맥주 한 모금을 마셔야 한다. 원샷으로 넘겨야 한다. 코끝이 시끈해져야 한다. 낯선 언어의 간판을 둘러봐야 한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는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여행지에 있다는 것이 비로소 느껴질 것만 같았다.
토비가 앞장섰다. 구글지도에 수십 개의 식당을 체크해 온 모양이다. 토비도 타이난을 여행 온 것은 오랜만이라고 했다. 이제 부터 진짜 시작이다. 많이 먹고 많이 마시고 많이 걸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