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분의 입맛
여행지에서의 첫 끼는 좋아하는 사람과 첫 데이트만큼이나 중요하다. 첫 끼가 성공하면 비로소 풍경이 보이고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첫 끼가 실패하면 마음이 자꾸 조급해진다. 뭘 자꾸 먹어야 할 것만 같다. (결국 그러다 아무 거나 먹게 돼서 결국 배만 부른 초보 여행자가 돼버리기 일쑤다.)
첫 끼를 먹을 식당으로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먹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토비만 따라갔다. 여행 전, 아내와 난 대만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을 유튜브를 보며 체크해 두었다. 그리고 토비에게 무엇이 먹고 싶은 지 귀띔을 해두었다. 우리가 먹어보고 싶은 음식 목록을 들은 토비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시큰 둥하게 대답했다.
- 아. 그거. 한국인들만 유독 좋아하는 것 같아요. 대만 사람들은 사실 별로 안 좋아해요. 유튜브는 믿을 게 안 돼요.
토비의 말을 듣고 나는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들었다. 우선 현지인이 직접 소개하는 리얼 맛집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다. 반면에 우리가 미리 알아둔 식당을 무시한다는 기분이 들어 언짢았다.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리뷰 몇 개를 보더니 '대만 사람들은 대부분이 여기 음식이 별로라고 하네요'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오래된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으로 따라 들어갔다. 유독 한 가게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 가만히 보니 모두 현지인인 듯하다. 우리도 자연스레 그 뒤에 줄을 섰다. 테이블이 대 여섯 개 밖에 되지 않고 노상에서 영업을 하는 식당이다. 먼저 주문을 하고 선불을 낸다. 앉아 있던 손님이 일어나면 그 자리에 차례대로 앉고 조금 기다리면 미리 주문해 두었던 음식이 나온다. 줄을 선 채로 사람들이 무엇을 먹는지 살펴본다. 오징어볶음처럼 보이는 것과 볶음면처럼 보이는 메뉴가 모든 테이블마다 하나씩 있다.
- 저 거다. 여기서는 저 거다!
아내와 토비가 줄 서 있는 동안 나는 줄에서 이탈해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대만 해방 이전, 그러니깐 1945년 이전에 지어졌을 듯한 건물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건물은 낮고 건물과 건물 사이는 촘촘해서 골목이 더 좁아 보인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취두부다.
취두부집 보였다. 나는 취두부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번 대만 여행에서는 무조건 한 번은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빨간색 플라스틱 테이블에 네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분주하게 젓가락질을 하는 게 귀여웠다. 시장에서 떡볶이 1인분을 시켜 놓고 나눠 먹는 것만 같다.
여기에서 나의 인생 첫 취두부를 먹어 볼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대만의 건물은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스타일이다. 우선 건물과 건물 사이가 좁다. 에어컨 실외기를 외벽에 설치하지 못할 정도로 붙어 있는데 멀리서 보면 하나의 건물처럼 보일 정도다. 건물의 1층은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보행로만큼 들어서 있고 2층부터는 1층의 보행로까지 포함한 면적으로 층층이 올라서 있다. 그러니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의 1층 전면부가 이어지며 지붕이 있는 보행로가 되는 셈이다. 비가 자주 오더라도 비를 쫄딱 맞을 일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1층에서 영업하는 식당은 식당 바로 앞에 테이블을 깔고 장사를 한다. 보행로지만 영업장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있는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이내 적응이 됐다. 심지어는 그 방식이 좋아졌는데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펼쳐진 테이블 아무 데나 앉으면 밥이 나오고 술이 나오는 것이다.
아내와 토비에게 돌아가니 줄이 많이 줄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토비는 음료수 하나와 크로켓 같은 걸 사 왔다. 전분 반죽이 둥글게 튀겨진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순식간에 입 안에 감칠맛이 퍼졌다. 작은 굴이 들어 있었고 야채가 가득했다. 튀김 반죽은 바삭하기보단 끈적하고 부드러웠다. 그 유명한 대만 굴전을 먹기 쉽게 둥글게 빚어 튀긴 것이다. 그리고 음료수 한 모금! 적당히 달고 새큼한 게 기름진 맛을 한 번에 씻어준다.
-오... 오... 오... 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완벽한 조합이다. 토비가 생긋 웃었다.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나 보다. 입에 침이 돌기 시작했다. 때마침 자리가 났다. 자리에 앉으니 음식이 바로 나왔다. 투박하게 썰은 오징어볶음 그리고 무슨 생선인지 모르겠는 생선볶음 요리였다. 오징어볶음은 버섯, 브로콜리, 껍질콩, 양배추 등의 야채와 함께 볶아져 나왔는데 한눈에 봐도 실패가 없는 맛이다. 굴소스나 피시소스를 넣어 볶았을 것이다. 간간할 것을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심심했다. 생선볶음의 비주얼은 일단 별로였다. 전분기가 가득한 짙은 갈색의 소스 위로 뱀장어 같은 생선이 껍질 채로 둥둥 떠있었는데 흡사 진흙탕에서 헤엄 지는 뱀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토비가 먼저 먹어보라고 권해서 아무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쉬었다. 비주얼이 그리 당기진 않았다. 젓가락으로 생선 토막 하나를 먼저 집었다.
앞니로 살짝 물었다가 어금니로 넘겨 씹었다. 생선이 머금고 있던 짭짤한 소스가 입 안에 퍼졌다. 생각보다 괜찮다. 꼬득꼬득한 식감이 곰장어를 먹는 것만 같았다. 소스 안에는 국수가 있었는데 적당히 잘 익은 국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소스는 굴소스와 간장으로 맛을 낸 것 같았는데 이 역시 심심한 편이어서 엄청 인상적이진 않았다.
맥주 한잔이 간절했다. 하지만 맥주를 팔지 않는다. 대만 사람들은 낮부터 술을 마시는 것을 금기까지는 아니지만 좋게 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문이 없는 식당, 즉 길거리 식당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 게 보통인 듯하다. 맥주를 사다 마실 수는 있지만 식당에 먼저 물어봐야 한다. 금방 먹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맥주를 사다 먹어도 되냐고 묻지 않았다. 다음 식당에선 앉자마자 물어볼 생각이었다.
첫 끼는 그럭저럭 만족했다. 아니 만족하려 노력했다. 맥주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맛 자체가 그리 인상 깊지 않았다. 여행을 오기 전에 유튜브에서 찾아본 영상은 대부분이 먹방 영상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먹는 게 모두 비슷하긴 했으나 하나 같이 맛있다는 감탄을 연발해서 대만 음식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졌다. 여행지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은 것도 만족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만 같다. 게다가 영상을 찍는다면 더 그럴지도.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영상 속의 모습은 조금 다운 그레이드해서 판단해야만 한다.
취두부를 먹어보기로 했다. 약간 실망스러운 지금이 도전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다. 좀 전에 봐둔 취두부 집이 있다고 하니 토비가 말했다.
-타이베이에 가면 내가 가는 취두부 집이 있어요. 거기가 정말 괜찮아요.
아니. 나는 지금 준비가 됐는데 지금이 딱 좋은데 굳이 타이베이 취두부 맛집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내가 과연 취두부의 맛이 있고 없음을 구분이나 할 수 있을까? 자기 딴에는 최고로 좋은 것을 소개해주려는 마음은 잘 알겠으나 직접 부딪히고 궁금증을 해결해야 성미가 풀리는 나로서는 조금씩 답답하게 느껴졌다.
결국 취두부를 먹지 못하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시장 길을 걸었다. 대만은 아침이 활기찬 시장과 밤이 활기찬 시장이 따로 있다. 지금 캄캄한 이 시장도 내일 아침에는 한 가게도 빠짐없이 모두 열려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시장을 상상했다. 내일 아침에 꼭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골목 끝에 있는 노상점포가 하나 눈에 띄었다. 뭘 파는 곳이냐고 물으니 취두부 란다.
-먹어보자!
기회를 놓칠 새라 급하게 말했다. 아쉽게도 점포는 닫혀 있는 듯했다. 돌아서려는 우리의 등 뒤로 노부부가 다가왔다.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알 수 있었다.
-지금 해줄 수 있다!
테이블에 앉았다. 맥주를 사 와도 되냐고 토비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오케이! 50m 전방에 세븐일레븐이 보인다. 아내가 빨대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것도 오케이!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기차역에서 샀던 것과는 다른 디자인의 맥주를 샀다. 있는 동안 대만에서 나오는 모든 맥주를 모두 마셔보고 싶다. 빨대도 잊지 않았다. '스트로우'라는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아 볼이 파이도록 빨대를 빠는 흉내를 냈더니 선반 아래에서 찾아 내주었다.
돌아오니 이미 취두부가 나와 있었다. 토비에게 물어보니 순한 버전의 취두부 란다. 그래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지. 홍어도 초심자가 너무 삭힌 것부터 시작하면 다시는 홍어 근처에도 가기 싫어진다. 다른 가게와 다르게 취두부 냄새가 나지 않았는데 점포를 자세히 살펴 보니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점포 한쪽에 환풍기를 설치하고 환풍구의 끝은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연결해서 냄새가 주변에 퍼지지 않게 한 것이다. 노점에 저렇게 세심한 디테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취두부를 집었다. 입에 넣고 바로 씹었다. 소문으로 무성하게 들었다. 입안에 들어갔을 때 냄새부터 맡는다면 게임은 끝이다. 바싹 튀긴 두부가 고소했고 적당히 묻어 있는 소스가 간간했다. 그리고 씹고 씹고 씹을 때 즈음 취두부가 식도로 넘어가다 말고 목젖에 매달려 '잊지 마요. 나 취두부예요'말하는 것 같았다. 아! 이건가 보다 싶다. 사람들이 말하던 그 냄새. 어떤 것인지 알겠다. 결론은 괜찮았다. 먹을만했다. 고소했다.
물론 이건 취두부 중에서도 가장 약한 편이란다. 첫인상이 괜찮다. 조금 강한 것도 도전해 볼만했다. 타이베이에 가면 취두부 맛집에 가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아무리 약하다 해도 향이 있긴 했다. 괜찮다. 나에겐 맥주가 있다.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기분 때문인지 기차에서 먹었던 타이완맥주보다 목 넘김이 더 좋다. 토비에게 내 입맛에는 이게 더 낫다고 하니 대만 아저씨들이 특히 좋아하는 맥주란다.
참 나!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