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단추부터 잘못 됐다
대만에 가기 일주일 전, 토비는 우리가 타이베이에서 어느 호텔에 머물지 물었다. 나는 자꾸 숙소에 대해 묻는 게 불편했다. 타이난은 토비와 함께 여행하는 것을 감안해 숙소를 미리 잡은 상황이었고 타이베이에서의 숙소는 직접 현지에 가서 결정하려고 했는데 자꾸 숙소를 예약하라고 보채는 것처럼 느껴졌다. 타이베이에만 머물 예정이었다면 일정을 고려해 중심지에 적당한 호텔을 잡고 4일 내내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첫날에는 타이난에 갔다가 다음 날 타이베이에 돌아오는 일정이라 숙소를 확실하게 정해둘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숙박지원금!
공항에 내려 추첨을 통해 숙박지원금을 받으면 바우처를 사용할 수 있는 호텔로 갈 것이다. 그러니깐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이 있으니 미리 호텔을 정해둘 필요가 없었다. 신청페이지를 통해 코드까지 받아 두었다. 한 사람 당 20만 원의 숙박지원금을 받을 수 있으니 잘하면 둘이 40만 원의 지원금 받을 수도 있다. 둘째는 그렇게 여행하는 것이 원래 아내와 나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든, 우리는 첫날에만 숙소를 잡고 돌아다닌 다음 동네의 분위기를 충분히 살피고 마음에 드는 곳에 숙박을 정한다.
그런데 자꾸 토비가 숙소를 어디에 잡을 거냐고 물으니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게다가 토비는 자기 집 근처에 숙소를 잡으면 어떻겠냐며 제안을 했는데 출근하기 전에 자기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아침을 함께 먹으면 좋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엥? 고작 아침을 함께 먹겠다고 숙소를 자기 집 근처에 잡으라고?'
토비와는 타이난에서 이틀을 함께 여행하고 타이베이에 돌아와선 토비는 집으로 갈 예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토비는 이제 막 새로운 회사에 들어갔기 때문에 사흘 모두를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다. 휴가 이틀을 낸 것도 사실은 조금 무리한 셈이다. 자기 딴에는 괜찮다고 하지만 어느 회사가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직원이 휴가 쓰는 것을 좋아할까? 현재는 일을 배우는 단계라서 오후 열 두시에 출근, 밤 아홉 시에 퇴근하는데 아무리 오전시간에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게다가 대만에서 어떤 아침을 보내게 될지 아직 알 수없다. 그런데 아침식사까지 계획하다니.... 벌써부터 갑갑해졌다. 마음 같아서 이렇게 얘기하고 싶었다.
'타이난에서 함께 여행을 하고 타이베이는 우리끼리 여행하는 게 좋겠어. 우리 나름 대로의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 우리를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하지만 결국, 얘기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하면 이렇게 답이 올 것만 같았다.
'그러면 저는 타이난도 빠질게요. 회사에 휴가 취소하면 저도 눈치 안 보이고 좋죠 뭐. 타이베이에 오면 연락 주세요. 저녁이나 한번 먹어요.'
베란다에 있는 창고에서 캐리어를 꺼냈다. 먼지가 쌓여 있어 물티슈로 닦아냈다. 한 장 가지고는 부족했다. 베란다에 캐리어를 두고 이틀에 걸쳐 햇볕에 말렸다. 워낙 창고에 오랫동안 있었다. 함께 많은 곳을 다닌 캐리어다. 바퀴 한쪽이 유독 닳은 것 같았지만 굴려 보니 멀쩡했다. 캐리어를 새로 사야 하나 걱정했는데 적어도 이번 여행까지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오래 쓴 물건이 좋다. 여행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세월의 흔적이 있는 여행가방이 좋고 브랜드 로고는 따 떨어졌지만 20년 동안 쓴 레이벤 선글라스가 좋고 여행지에서 쌀쌀할 때마다 걸치고 다니는 10년 넘게 입은 셔츠가 좋다.
햇볕에 잘 말린 트렁크를 거실 한 구석에 펼쳐 놓고 생각날 때마다 짐을 던져두었다. 아내와 난 원래 여행 전 일주일부터 그러는 편인데 이번엔 하루 전에 그 의식을 시작했다. 그만큼 다른 여행보다 기대감이 덜하다는 뜻이다.
이번 여행은 월요일 아침 아홉 시에 떠나 목요일 밤 여덟 시 40분에 돌아오는 3박 4일의 일정이다. 일요일 가게 영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자정 12시 반이었다. (평소보다 손님들이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침대에 누우니 새벽 한 시 반. 집 앞에 공항리무진 버스를 타려면 아침 여섯 시에는 나가야 한다. 빨리 자야 하는 데 잠이 오질 않았다. 확실한 건 셀레여서 그런 건 아니다. 가게 운영에 대해 여전히 많은 걱정이 있었다.
다섯 시 반에 일어나 물샤워만 했다. 피곤하진 않았다. 3월의 대만날씨에 맞춰 옷을 챙겼기 때문에 여러 벌 겹쳐 입고 나갔다. 공항까지는 추울 것이다. 집에 올 때도 마찬가지일 테고.
집 앞에 공항리무진 버스 노선이 생긴 것을 처음 알았을 땐 반가웠다. 하지만 반가운 것도 잠시. 공항리무진 버스를 종종 집 앞에서 마주칠 때마다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가게를 관두지 않는 이상 해외여행이 나에겐 너무 먼 얘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친구들에게 종종 말한다.
-인생에 여행을 다니는 시간은 정확히 정해져 있는 것 같아. 할당제처럼 말이야. 나는 너무 당겨 쓴 것 같아. 지금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야.
정말 그런 것일까? 나와 아내는 2,30대에 모두 당겨 썼던 것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아껴 쓸 걸 그랬다. 하지만 난 곧 긍정한다. 40대는 이렇게 꽁꽁 묶여 있었으니 50대에는 보상받듯이 다닐 것만 같다. 근거도 없는 이론. 즉, 여행총량제에 따른다면 말이다. 그때도 아껴 쓸 생각은 없다.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더 많이 다녀야 한다.
오랜만에 공항에 가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내가 대만을 가긴 가는구나. 입출국을 알리는 전광판에서 편명을 확인하고 체크인 수속을 하는 항공사 부스의 번호부터 확인했다. 이마저 얼마만인지 자연스럽지가 않고 어색했다. 짐을 보내고 티켓과 여권만 달랑 손에 들고 나니 그제야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는 느낌이었다.
오전 여덟 시 반.
3주 전부터 아침을 거르거나 과일 주스로 대신했다. 겨우내 늘어난 체중 관리를 위해서다. 첫 1주는 힘들었지만 2주 차부터 할 만했다. 속이 비워지니 몸이 가벼웠다. 원래 자주 먹지 않는 아내는 나에 비해 '간헐적 단식'이 수월했다. 우리는 걱정했다. 대만 여행은 아침을 먹는 것부터 시작한다는데 여행 전에 아침을 먹지 않는 습관을 들여놓은 우리가 과연 아침을 즐길 수 있을까?
승강장 근처에 있는 의자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김밥, 핫바, 라면까지....
배가 고프진 않지만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여행의 기분을 억지로라도 끌어올려야 했다. 아내에게 김밥을 사 오겠다고 했는데 김밥 줄이 너무 길었다. 바로 옆에 있는 고래사어묵에 가서 핫바를 두 개 샀다. 아내가 핫바를 보자마자 인상부터 썼다.
-아침부터 기름기 있는 거 싫은데, 왜 김밥은 안 사 오고
-김밥 줄이 너무 길어서. 먹기 싫음 먹지 마.
아내의 핫바까지 억지로 먹고 나니 속이 더부룩해졌다.
이륙한 지 30분 만에 기내식이 나왔다. 속이 불편했지만 일단 한 입이라도 먹자는 심정으로 받았다. 불어 터진 면에 소고기와 야채가 굴소스에 볶아 얹어져 있었다. 조심스레 비벼서 한 입 먹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물론 좋지도 않고.
고추장이 같이 나왔는데 넣지 않았다. 출국하는 사람에게 고추장은 이제 잠시 놓아두어야 할 미련과도 같다. 아내는 자신의 것과 내 것을 손가락으로 집어 의자 아래 두었던 가방 앞쪽에 넣었다.
대만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 현지 시간으로 오전 열 한시 반이었다. 여행용으로 차는 오래된 초침시계를 한 시간 거꾸로 돌렸다. 한국보다 한 시간 느리니, 한 시간을 번 것만 같다. 입국 수속을 빨리 하기 위해 자동입국수속을 신청해 두었는데 일반 수속보다 자동입국수속의 줄이 오히려 길었다. 대만에 오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자동입국수속을 신청해 두었던 것이다. 대만을 자주 올 예정이라면 조금 기다려서라도 자동입국수속을 등록한 후 다음부터 편리하게 움직이면 된다.
공항 직원들이 일반 수속으로 옮기라고 권유를 했다. 우리는 대만에 또 언제 올지도 모르니 미련 없이 일반 수속 줄로 자리를 옮겼다. 다만 홈페이지에서 미리 작성해 둔 '입국신고서'를 다시 작성하라고 하면 '그 귀찮은 걸 다시 작성해야겠네'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토비가 공항에 마중을 나오기로 했다. 원래는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토비가 계획을 바꿔 공항에 직접 오기로 한 모양이다. (토비는 아내와 연락을 자주 주고받았기 때문에 나는 자세한 상황보다는 대략적인 일들만 알고 있었다.) 짐을 찾고 화장실에 들러 눈곱을 떼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는 토비를 상상하며....
캐리어를 끌고 나오며 토비를 찾았다. 눈썹을 한껏 올린 채 반가운 표정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피켓이라도 들고 있을 줄 알았던 토비는 거기에 없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 서로 엇갈릴 수 있으니 아내가 바로 전화를 했다.
-토비야. 우리 나왔는데. 너 어디 있어?
-언니. 지금 왔어? 몇 번에 있는지 알려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친구가 데려다준다고 해서 같이 왔는데 주차장에 있어. 밖으로 나와 내가 그쪽으로 바로 가면 돼.
공항 밖으로 나왔다. 출국장을 나와 밖으로 나오면 맞게 되는 낯선 풍경. 그 첫 시작은 내가 여행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순간이다. 낯선 언어가 들리고 사람들이 보이고 나무가 보인다. 조금 여유 있게 정보를 탐색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섰을 때 공항을 떠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공항 풍경을 감상하기보다 토비를 찾기에 정신이 없었다. 26번 출구 앞에 서있으니 1분 만에 멀리서 흰 승용차가 비상등을 켜며 다가왔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졌다. 토비였다. 아내와 토비가 꼭 끌어안았다. 나는 차 트렁크에 짐을 싣느라 하이파이브로 인사를 대신했다. 토비 친구와도 인사를 했다. 기차역까지 데려다주러 왔다고 했다. 타이베이역까지 꽤 먼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고맙기도 하고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공항을 빠져나가 고속도로로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소리쳤다.
-아! 맞다. 숙박지원금! 우리 숙박지원금 추첨도 안 하고 왔잖아.
이런, 미친!!!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오기 전에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을 하고 메일로 받아 QR코드까지 다운을 받고 신청가능한 숙소까지 꼼꼼하게 알아뒀는데....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어떻게 두 사람 다 아무 생각이 없었을까? 차를 돌리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반 택시였다면 돌아가자고 얘기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처음부터 난리다. 난리.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했지만 속에서 열불이 났다. 당첨이 될지도 모르는 숙박지원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락가락한 것이 문제였다. 머리가 멍했다. 뒷 좌석에 앉은 아내와 난 허무하다는 눈빛을 주고받다가 어이가 없어 웃었다. 10분 만에 기차역에 도착했다. 타이베이역까지 3~40분 정도 걸린다던데 이렇게 빨리 도착한다고?
알고 보니 우리가 내린 곳은 타이베이 역이 아닌 타오위안 기차역.
타이난으로 가기 위해서 타이베이까지 갔다가 돌아올 필요가 없으니 공항과 가까운 타오위안 역에 내린 것이다.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역의 순서를 설명한다면 타이베이 - 타오위안 -타이난의 순서다. 문제는 이런 설명 없이 타오위안 역에 덜컹 내려버리니 여기가 타이베이역인지 타오위안역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깐 이 역에서 출발하는 게 타이베이에서 가는 것보다 빠르다는 거지?
-네.
-타이베이로 갔다면 다시 돌아갔다가 여기로 온다는 거지?
-네.
나는 자세하게 물었고 토비는 짧게 답했다. 토비는 대부분의 한국어를 잘 알아들어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다. 토비가 기차표를 바꾸러 가는 동안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어제 술을 마시다가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일이 있었나 봐. 그래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데.
-아! 그래? 그래서 저렇게 불편한 표정이었구먼. 숙취가 있던 거였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불편한 표정이 느껴졌는데 그건 평소의 토비와는 분명히 달랐다. 만나자마자 반가운 느낌보다 묘하게 힘들어하는 표정을 몇 번이나 봤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씩 불편해지고 있던 터였다.
나도 술을 마시는 사람으로서 수많은 아침 숙취를 겪어왔다. 속이 불편해서 표정을 숨길 수 없는 그 시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여행을 함께 하자고 먼저 제안한 건 자기면서 한국에서 날아온 우리를 너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서운함이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금씩 꿈틀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