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행 티켓을 예매했다.
대만행 티켓을 예매했다. 작년 12월이었다.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에서 문자가 아내와 나에게 동시에 왔다. 2024년 12월을 기준으로 장기누적 마일리지는 소멸된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일리지가 소멸된다니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여행이 취소되는 것 마냥 서운하다. 아내도 그런 마음은 마찬가지였는지 제주라도 가보자고 했다.
아내와 나의 마일리지를 계산했다. 대한항공은 제주 왕복, 아시아나는 중앙아시아 왕복이 가능하다. 9년 동안이나 미뤄두었던 마일리지 합산을 진행했다. 결혼 후, 마일리지를 합산하자고 매번 말했었으나 그동안 계속 미뤄왔었다.
꼭 12월까지 여행을 가야 하는 건 아니었다. 12월 안에 티켓팅만 하면 됐다. 아내는 틈만 나면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마일리지 티켓을 검색했다. 예상했지만 마일리지를 사용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내는 꽤나 진지했다. 어차피 안 될거라고 포기한 나와 다르게 집요했고 끈질겼다. 나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그만하라고 해도 들을 사람도 다니고 저러다 말겠지 싶었다.
토요일이었다. 손님이 조금 많았는데 (우린 연남동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아내가 자기의 할 일도 미뤄가면서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나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고 아내는 눈치를 챘는지 미안하지만 중요한 일이니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설거지는 쌓이고 있었고 손님이 나간 테이블을 바로 치우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말던 핸드폰에만 집중하고 있던 아내가 드디어 폰을 내려놓고 얘기했다.
-됐어.
-뭐가?
-티켓 끊었어.
-엥?
-우리 1월엔 제주, 3월엔 대만에 갈 거야.
며칠 동안 항공권 사이트만 들여다보던 아내가 마침내 티켓팅에 성공한 것이다.
-오. 진짜?!
나는 놀라고 기뻤다. 하지만 금세 걱정이 앞섰다. 가겟세도 겨우 내고 있는 이 상황에 그렇게 놀러 가는 게 맞나? 뿌듯해하는 표정의 아내를 보자니 부정적인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그래. 그동안 그렇게 일했어도 통장에 쌓이는 건 없었다. 이러나 저러나 손님 없는 건 마친가지다. 며칠 비운다고 해서 크게 손해 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쉬면 큰일이라도 난다고 착각하는 '자영업자의 병'에 걸려 있는 것뿐이다.
왜 대만일까?
대만은 처음이다. 하지만 대만을 적어도 한 번쯤은 가봐야 한다는 부담감이 우리 부부에겐 있었다.
토비(tobey)때문이다. 토비는 우리에게 막내 동생 같은 대만 친구다. 나이도 열다섯 살 정도 차이 나고 국적도 달랐지만 우린 친구처럼 지냈다. 토비를 알게 된 건 친한 동생을 통해서다. 근처를 지나다니면서 종종 봤기 때문에 얼굴은 낯이 익었지만 아는 동생과 연결이 돼 있을 줄은 몰랐다. 나에겐 그저 '근처에 사는 것 같아 보이는, 표정이 어두운 외국 여자애'일 뿐이었다.
토비는 이화여대에서 공부를 했다. 어학당이 아니고 본과 4년을 마쳤으니 열심히 공부한 셈이다. 공부를 하며 카페에서 일을 하고 동대문 새벽시장에 나가 물건을 사서 대만에 팔기도 했다. 알면 알수록 열심히 살고 있는 청춘을 우리는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비는 아이처럼 티 없이 웃었다. 어두워 보였던 건 그녀를 몰랐을 때의 이야기고 알고 보니 작은 일에도 히히히 소리를 내며 해맑게 웃었는데 아내와 난 토비의 그 웃음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토비도 그 마음을 잘 아는지 우리를 잘 따르고 시간만 나면 가게에 잠시라도 들렀다. 다른 나라에서 언제라도 부담 없이 찾아갈 곳이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토비는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우리는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토비는 대만에서 친구들이 오면 가게에 데리고 와서 우리에게 소개했다. 덕분에 우리도 많은 대만친구들을 만나게 됐다. 나중에는 토비의 가족과 가족의 친구들까지 가게에 왔다. 토비의 엄마를 (사실 말이 엄마지 우리와 네댓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우리도 '마마'라고 불렀다. 마마는 김치찌개를 배우고 싶어 했는데 나는 마마를 김치찌개 맛집으로 데려가 함께 맛을 본 후, 가게에 와서 그 맛을 재현했다. 가게에서의 첫 쿠킹 클래스였다.
우리에게 점점 대만의 인연이 늘어나고 있었다. 가게에 왔던 대만 친구들은 귀국하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며 대만에서 꼭 보자고 말하곤 했다. 인사치레 말일 수도 있으나 나는 언젠가 대만에서 그들을 볼 수 있을 거란 확신을 했었던 것 같다.
대만은 두 시간 반이면 가니까 멀지도 않은 곳이다. 하지만 역시 문을 닫고 해외를 간다는 건 부담이 되는 일이다. 우선 매출이 걱정되고 헛걸음을 할 손님들이 걱정이다.
가게를 하기 전, 아내와 함께 회사를 다닐 땐 1년에 적어도 두 번은 해외여행을 했다. 아파트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이리저리 나갈 돈이 많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의 월급에서 일정 부분은 여행통장에 넣었다. 그리고 여행 통장에 어느 정도 돈이 쌓이면 바로 떠났다.
하지만 가게를 하고는 1년에 한 번 제주도에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2019년 10월에 오픈을 하고 5개월 만에 코로나바이러스가 터지고 2년을 반쪽 짜리 영업을 하다 보니 여행은커녕 회사를 하며 모아두었던 돈까지 운영비용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금전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우리를 잘 아는 친구들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쉬어. 너희는 떠나야 얻고 오는 사람이잖아'라고 말을 했다. 위로 차원에서 하는 얘기였겠지만 나는 그 말이 고깝게 들렸고 한동안은 친구들도 만나지도 않았다. 꼬여 있던 것이다.
그때 나의 유일한 탈출구는 가게 근처에서 또 다른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들과의 술자리였다. 우리는 서로의 가게에 번갈아 모였다. 그 모임은 조금씩 커져서 각자 아는 지인들도 데려오게 됐는데 한 친구가 토비를 데려와서 그렇게 우리의 모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매달 회비를 모으고 종종 모였다. 회비가 어느 정도 모이면 여행을 떠났다. 서울 맛집을 여행하고 제주 여행을 하고 전주 여행을 했다. 친구들하고도 쉽게 할 수 없는 여행을 짧은 시간 동안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우리의 상황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가게를 며칠 씩 쉬는 게 모두에게 똑같이 부담스러웠으니 짧은 일정의 여행이 좋았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특별히 뭘 하지 않으려 하는 성향도 비슷했다. 그저 각자의 작은 공간을 벗어나 어디라도 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시간은 영원할 수 없다.
토비가 대만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학교를 마쳤으니 학생비자가 만료 됐고 오랜 시간 한국생활에서 조금씩 쌓인 향수도 그녀를 대만으로 돌아가게 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취업을 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대만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송별회 겸 해서 함께 전주에 갔다.
도착하자마자 11시부터 낮술을 마시고 낮잠을 실컷 자고 가맥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근처 LP 바에 가서 서로가 좋아하는 곡들을 신청해 가며 밤을 보냈다. 아침으로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근처 정자에 가서 다시 낮잠을 함께 잤다. 우리 다운 송별 여행이었다.
나중에야 들었지만 헤어질 때 토비가 아내에게 말을 했다고 한다.
-언니! 진짜로 빨리 대만에 와. 언니는 왜 대만에 한 번도 안 와?
따지는 게 아니었다. 서운했을 것이다. 아내는 내내 그 말이 신경 쓰였다고 한다.
자! 이만하면 우리가 대만에 가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그동안 왜 가지 않았냐고, 자기였으면 몇 번이나 갔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답하겠다.
그만큼 자영업자에게 여행은 어려운 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