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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야할 일들

- 여행 준비

by 조명찬

여행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고작 4일 다녀오는데 해야할 일이 많았다. 우선 아버지 병원을 알아봐야 했다. 2년 전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의 병원을 옮겨야 한다. 집중 치료를 하던 병원에서 더 이상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뇌출혈이 발병하면 상급재활병원에서 재활을 할 수 있지만 2년이 넘으면 강제로 퇴원을 해야 한다.


'뇌출혈 환자는 2년이 넘으면 더 좋아질 수가 없으니 더 이상의 재활은 불필요하다.'라고 나라가 정해놓은 셈이다.


잘 지내고 있던 병원에서 쫓겨나듯 옮겨야 하니 마음이 좋지 않지만 마냥 불평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홈페이지에서 병원리스트를 프린트해서 전화를 돌렸다.


-그런데 환자분 발병 시기는 언제시죠?

-아. 2년 됐습니다.

-그럼. 저희 병원에는 못 오시네요. 2년 이전 환자분들만 오실 수 있어요.


아침 일찍은 피하고, 점심시간이 끝난 후에도 받는 사람이 조금 여유가 생기는 시간, 두 세 시 즈음 책상에 앉아 매일 전화를 돌렸다. 거의 모든 곳에 전화를 해도 재활이 가능한 병원은 입원이 불가능했다. 선택권이 없었다. 요양병원 중에 그나마 재활을 시킬 수 있는 병원을 찾을 수 밖에....

몇 곳의 병원을 리스트업 해서 직접 찾아가 시설을 둘러봤다. 원래 계셨던 곳보다 시설이나 분위기가 맘에 드는 곳이 없었다. 긴 여행을 떠났는데 특급 호텔에서 불편 없이 지내다가 모텔에서 지내야 하는 겪이다. 불편하고 여러모로 맘에 들지 않을 게 뻔하다. 그게 나라면 상관없다. 충분히 적응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부모라서 걱정이다. 게다가 아픈 사람!

나는 어느덧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예상보다 너무 이르게 보호자가 되었다. 우리 가족은 마음을 비워야 했다. 또 하나의 커다란 고비가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한 곳으로 결정했다. 정하고 나니 맘이 편했다. 대만 가기 전에 마음속의 큰 고민을 하나 덜게 된 셈이다.


메모하느라 공책의 절반을 다 썼다.


걱정을 하나 덜었으니, 슬슬 대만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행을 가기 전에 간단한 인사말이나 그 나라의 대략적인 역사, 문화 정도는 공부해서 가려고 노력한다. 그게 기본 예의라고 생각하니까.

유튜브에서 대만의 역사를 검색해 산책을 하며 라디오처럼 들었다. 원주민들의 입장에선 외침이 많은 나라다. 여러 나라의 문화가 혼재될 수밖에 없는 역사다.


틈만 나면, 넷플릭스에서 대만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아내와 난 그 유명한 <상견니>도 본 적이 없었다. <상견니> 영화판을 30분쯤 보다가 그만뒀다. 원작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그런지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야기가 무성의하게 편집된 느낌이다.


그래도 드라마 한 편 정도는 봐야지 그 나라의 분위기는 알 수 있을 것 같아 <결혼까진 했는데요>를 보기 시작했다. 상견니와 여주인공이 같았다. 유명한 배우인가 보다. 가벼운 시트콤 형식의 드라마였는데 결혼에 대한 생각이나 문화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여성의 임신이나 남아선호사상은 나의 부모님 세대의 인식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고지식하게 표현돼 있었다. 동성결혼이 가능할 정도로 개방적인 대만이지만 부모와 자식들과의 연대 그리고 출산의 대한 생각은 오히려 지금의 한국보다 고루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물론, 이건 드라마 한 편을 본 나의 착각일지도.)


드라마를 보고 난 후, 영화 한 편을 보고 싶었다. <아호, 나의 아들>.

포스터부터 수상경력이 화려하다. 제목부터가 묵직한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영화가 단단하고 힘이 있었다. 나에게 대만 영화는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가 마지막이었다. <비정성시> 같은 영화는 십 대 시절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친구 집이 비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그게 어디든 애들끼리 모여서 비디오를 빌려봤는데 <영웅본색>류의 홍콩영화를 주로 빌려봤었다. <비정성시>는 내가 우겨서 빌린 건데 왜 빌렸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뜻도 잘 모르면서 제목이 그저 멋져서 선택했을 것이다. 복수의 총싸움이 언제 시작될지 기대하고 보다가 대만 현대사의 묵직한 스토리에 압도당하며 끝까지 보긴 했지만 뭐 이런 영화를 빌려왔냐며 친구들의 원망을 샀었다.

그때 우리에게 영화를 보는 시간은 그만큼 소중했다. 일단 부모님이 집을 비워야 했고 또 그 부모님이 언제 돌아오실 지도 모르니 항상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짧고 소중한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시간이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홍콩영화나 야한 영화를 주로 봤다. 동네 비디오 대여점 아저씨는 워낙 깐깐하고 무서워서 18세 이상 영화는 절대 빌릴 수 없었고 옆 동네 비디오 대여점 형은 몰래 18세 이상 영화도 빌려줘서 그 동네까지 친구들과 함께 걸어갔다가 몸에 비디오테이프를 숨기고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헐레벌떡 뛰곤 했었다.


대만 소설도 한 편 읽고 싶어졌다. 우밍위의 <도둑맞은 자전거>를 집 앞 도서관에서 빌렸다. 생각보다 두꺼웠는데 아침에 일어나 조금씩 읽다 보니 어느새 다 읽었다. 47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그렇게 빠른 시간에 읽은 것도 오랜만이다. 서사가 좋아 잘 읽힌 것도 있겠지만 대만에 가기 전 읽고 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작용했던 것 같다.


대만 드라마를 보고, 대만 영화를 보고, 대만 소설을 읽고....

그렇게 나의 일주일이 대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에게 여행 준비는 그런 것이다.


자전거를 도둑맞은 한 남자가 자전거를 찾기 위해 도시를 헤매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



2주 남겨 놓고 토비에게서 연락이 왔다. 타이난에서 지내면 좋을 호텔 목록을 보냈다. 아내가 몇 군대를 보더니 다 괜찮다고 얘기했다. 그중에 Y&I호스텔이 가장 좋아 보였는데 한국 사람들도 많이 가는 모양이다. 우리는 타이난 하루 정도는 토비의 숙소를 잡아 주고 싶었다. Y&I호텔은 공동생활을 하는 도미토리 룸과 개별 숙박이 가능한 호텔 룸으로 구분 됐는데 4인 도미토리 룸을 잡아서 셋이 지낼까, 아니면 호텔 룸을 따로 잡아서 잠은 따로 잘까를 고민했다. 도미토리 룸은 넓고 같이 지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욕실과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해야 해서 불편했다. 호텔 룸은 편할 순 있지만 함께 여행을 하면서 따로 지내는 게 애매할 수가 있고 게다가 토비는 혼자니깐 괜히 소외시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었다.


토비가 추천한 목록을 감안하지 않고 에어비앤비를 검색했다. 대만 특유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숙소들이 많았다. 1박에 15~20만 원 정도면 큰 집 전체를 빌릴 수도 있었다. 물론 아내와 나 단 둘이 여행을 한다면 5만 원 선에서도 만족할 만한 숙소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셋이다. 게다가 막내 동생 같은 토비와 여행을 하는데 돈을 아낀 듯한 느낌을 주는 숙소를 예약하기 싫었다.


맘에 드는 숙소를 발견했다. 내가 상상하는 대만의 정취가 듬뿍 묻어 있는 곳이었다. 특히 대문이 맘에 들었다. 집 안에는 작은 마당이 있고 주방에는 긴 테이블이 있으며 좁은 복도를 지나 이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1박에 20만 원. 규모에 비해 가격도 적당했다. (다시 말하지만 아내와 둘이 가면 이 정도 집은 필요 없다)


아내에게 보여주니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토비가 실컷 추천해 준 목록을 제외시키고 다른 숙소를 예약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다.


-에어비앤비 좋긴 한데. 토비한테 어떻게 말해. 걔 딴에도 고민해서 추천해 준 것일 텐데....


-그렇긴 하지. 그런데 이렇게 애매할수록 더 터 놓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 토비가 꼭 거기 가보고 싶은 건 아니잖아. 자기가 가본 곳 중에서 추천할 것일 테고, 아니면 현지인의 평이 좋은 곳을 추천했을 수도 있고. 그런데 괜히 미안한 마음 때문에 이런 걸 그냥 넘어가면 여행 전부터 미묘한 감정들이 쌓여 나중에는 서로 불편해질 수 있다고. 그냥 나는 대만의 정취를 더 즐길 수 있는 곳에서 자고 싶고 토비에게 그대로 전달하면 될 것 같아. 다만 그 숙소의 위치가 우리가 다녀야 할 곳에서 너무 먼 곳은 아닌지 체크해 달라고 하자.


토비에게 우리는 에어비앤비에서 자는 것을 좋아하니깐 호텔보다는 에어비앤비에서 숙소를 찾아봤다고 말했다. 그리고 선택한 숙소의 위치가 괜찮은지 다른 문제가 없는지 체크해 달라고 부탁했다.

곧 답장이 왔다.


-위치도 좋네요.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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