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전거 좋아해요?
만두를 먹고 나오니 오후 세 시.
배가 조금 불렀지만 식사를 한 것 같진 않았다. 3월 중순이지만 날씨가 더웠다. 맥주 한잔이 간절했다. 낮에 문을 여는 펍에 갔다. 식사와 술을 동시에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만 사람들이 주로 가는 식당에선 낮에 맥주를 마시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술을 팔지도 않을 뿐더러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계속 드나든다. 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게 왠지 눈치 보인다. 빨리 자리를 내 줘야 할 것만 같다. 대만 사람들은 낮에 술을 먹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고 들었다. 낮에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놈팽이'의 이미지가 있어서 사람들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고 했다.
물론, 나는 기꺼이 '놈팽이'가 될 자신이 있지만 토비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맥주를 마시는 동안 토비는 계속 휴대폰으로 계획을 짜는 듯 했다. 짧은 시간에 많이 보여주고 싶은 건 이해하겠으나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그게 더 부담됐다.
-자전거 탈까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이제 좀 땀이 식고 있을 때였다.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토비에게 말했다.
-응. 좋은데. 이것 좀 천천히 마시고 생각해볼까? 너무 많은 걸 할 필요는 없어!
-그런데 자전거 좋아해요?
-그럼 우린 봄, 가을엔 둘이 나가서 자전거 자주 타.
-그럼 이 앱 먼저 깔아주세요. '유바이크'찾으면 있어요.
펍에 앉은 지 5분만이다. 나의 브레이크는 토비에게 작동하지 않았다. 갈증이 났다. 맥주를 한번에 들이켰다. 아내는 나의 답답한 심정을 아는 것 같다. 그리고 토비의 마음도 잘 헤아리고 있는 눈치다. 답답해 하는 나의 무릎을 왼 손으로 다독이고 계속 분주한 토비의 어깨를 오른 손으로 다독였다.
펍에서 나오니 멀지 않은 곳에 '유바이크'가 있었다. 어플을 깔고 정보 입력을 하고 빌린 후에 유바이크 정류장 아무 곳이나 반납하면 된다. 서울의 '따릉이'와 같은 시스템이다.
토비는 이미 회원이지만 우리는 여행 중에만 이용하면 되니 앱에서 'single rental'로 이용했다. 카드번호를 입력했다. 3,000대만 달러가 보증금으로 결제됐다. 우리 돈으로 13만원 정도. 보증금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적지 않은 금액이 결제가 되니 당황했다. (정류장에 반환하고 어플에서 보증금 반환 버튼을 누르면 바로 결제 취소 알림이 뜨니 안심하고 이용해도 된다.)
토비와 아내가 나란히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고 나는 그 둘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인도 한 켠이 자전거 도로였다. 중간 중간 끊기는 서울의 자전거 도로와 달리 타이페이의 자전거도로는 하나의 길로 길게 이어졌다. 자전거 도로만 계속 따라가면 되니 불안감이 덜했다. 평소 자전거를 탈 때, 안전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는 아내도 빠르게 적응했다.
바람이 불었다. 여행지에서의 바람은 다르게 느껴진다. 냄새 자체가 다르다. 토비를 따라 골목골목을 누볐다. 도로에 차가 다니지 않을 땐 잠시 자전거도로를 벗어나 페달을 굴렸다. 타이페이의 도로는 대체로 조용했다. 경적소리도 쉽게 들을 수 없다. 참 차분한 사람들이다.
갑자기 여행자가 된 기분이다. 어딘가에서 '첨밀밀'의 주제곡이 흘러 나올 것만 같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여명. 멀리 앞 서 가는 나의 아내는 장만옥.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첨밀밀'의 배경은 홍콩이라는 사실을. 분명 다른 장소지만 영화 속의 분위기를 타이페이의 도로 위에서 느끼고 있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당연히 '첨밀밀'이다.
디화제거리로 들어갔다. 조용했던 메인 도로와 달리 사람들이 골목마다 그득하다.
-여기는 옛날에 약재거리였어요. 건물들은 다 그대로고 지금은 특산품을 파는 매장도 있고 명품 매장도 들어서 있어요. 사람들이 많아서 위험하니까 자주 서지 않고 한번에 쭉 갈게요.
관광객들과 현지인이 모두 좋아하는 거리인 것 같다. 한 사원에 유독 사람들이 많았는데 알고 보니 연인들끼리 점괘를 볼 수 있는 사원이라고 한다. 특화된 소원을 비는 사원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 곳에선 연인들의 사랑과 관련된 소원을 특히 잘 들어주나보다. 재미있었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지만(왠만한 관광지보다 사람들이 북적댔다.) 지나치며 나도 맘 속으로 하나의 소원을 빌긴 했다.
'나의 장만옥과 계속 여행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사람들이 북적이는 사이를 자전거로 슁슁 지나가다 보니 현지인이 된 것만 같다.
나의 노란색 유바이크는 생닭을 양쪽에 매달고 도로 위를 달리며 식당에 배달을 가고 있는 중이다.
(아! 여전히 '첨밀밀'의 감흥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디화제 거리를 벗어나 다시 대로변으로 나왔다. 조금 달리다 보니 큰 벽에 관문이 보인다. 다다오청이다. 오후 다섯 시의 해가 조금씩 저물고 있는 중이었다. 해를 맞으며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눈이 부셨다.
도시가 붉은 색으로 반짝였다.
다다오청으로 들어가는 관문은 꼭 한강고수부지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벽을 지나면 '짠'하고 나오는 큰 줄기의 강이 더욱 그렇게 느껴지게 한다. 유유히 떠있는 유람선도 마찬가지고. 잔잔하게 흐르는 대만의 유행가만 다를 뿐이다.
특별한 계획이 없어 다다오청을 빠져 나왔다. 토비는 작은 골목에 있는 젤라또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름 유명한 곳인지 사람들이 가게를 배경으로 이제 막 사서 나온 젤라또를 찍고 있었다. SNS 업로드 용일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이 주인인 것 같아 물어보니 그렇단다. 괜히 신뢰감이 더해진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도 계속 사람이 들어왔다. 뒤에 들어온 여자 셋이 문을 연 채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는데 주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Close the door!
말투가 워낙 고압적이고 딱딱해서 가게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 붙었다. 에어컨을 틀어 두었으니 문을 닫는 게 당연하지만 손님을 대하는 말투로는 무례하게 느껴졌다. 내가 다 기분이 나쁠 정도였으니까. 문을 열어두던 여자 손님 셋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짓을 해서 쫄지 말라고 빨리 들어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젤라또는 맛있었다. 그러나 불친절함이 그 상쾌한 맛을 깍아 먹었다. 밖으로 나온 토비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한 마디 했다.
- 저 사람은 원래 좀 불친절해. 그리고 대만어 잘 할 줄 알면서 꼭 저렇게 영어로 말해.
이탈리아인의 말투는 정확히 젤라또의 맛을 깍아 먹을 정도의 불쾌함이었다. 어차피 우리에게 말 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기분 나쁠 필요가 없다. 네 가지 맛의 젤라또를 함께 나눠 먹고 다시 출발했다.
타이페이 메인역에 유바이크를 반납했다. 반납 후에 보증금 반환 버튼을 누르니 카드 결제됐던 것이 바로 취소됐다. 굉장히 빠른 반응이라 놀랐고 안심됐다.
어둠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랬다.
1. 짐을 찾아 토비 집 근처에 예약해두었던 호텔로 간다.
2. 짐을 놓고 바로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간다.
3. 저녁을 먹는 식당에 토비의 친구들과 엄마가 올 것이다.
타이페이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