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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두 번째 대만?

- 우리는 늘 아쉽다. 그래서 다음이 있다.

by 조명찬


공항철도를 타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비를 맞으며 걸은 게 얼마 만일까?

여행용 방수 재킷을 입고 걸었다. 비가 톡톡 튕겨 나간다. 몇 년 전에 산 재킷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해내는 것 같다. 서울에선 사람들이 비를 맞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군다. 비가 내리면 밖에 나가지 않고 잠시 나갈 때도 큰 우산을 쓰고 장화를 챙겨 신고 나간다.


무엇이 무서워서 그렇게 비를 피할까? 닦아내면 그만 인 것을….


나는 어디에서든 비를 맞고, 눈을 맞는다. 그리고 슥슥 닦아낸다. 별 게 아니다.


모든 것이 그렇다.

별 것 아닌 일을 불편하다는 이유로 피하다 보면 작은 일에도 쉽게 좌절한다. 피하고 좌절하는 순간을 매번 반복한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까다로운 일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맞닫들이다 보면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맘처럼 되지 않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는 걸 안다. 지금 힘들어도 견뎌낸다면 결국 좋은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걸어갈만도 한데 신호를 잘 지키는 대만 사람들


대만에서의 날들을 떠올렸다. 토비를 만났고 타이난에 갔고 사원에서 점괘를 봤다. 타이베이에 돌아와선 토비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만났다. 국립고궁박물관에 가고 단수이에서 일몰을 보고 스린야시장과 닝샤야시장을 돌아봤다. 아쉬움이 많은 여행이었지만 좋은 추억이 많았다.


고작 4일 여행을 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담아내려고 한 것은 아닐까? 가게를 열고 첫 해외여행이라, 처음 대만 여행이라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던 것은 아닐까? 또 오면 될 것을 다시는 오지 못할 것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 오는 타이베이를 걷는 동안 나에게 계속 되물었다. 다시 또 올 수 있을까?


예전 같으면 '다음 달이라도 다시 오면 되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가게를 열게 되면서 어디든 쉽게 떠나던 나의 여행은 그대로 멈추었다. 매일 같은 곳을 지겹도록 드나들었다. 손님이 드나드는 문은 나에겐 창살이었고 손님들이 웃고 즐기는 매장은 나에겐 감옥이었다. 그렇게 나를 스스로 가뒀다. 어느덧 나는 손님이 없을 때 가게 한 구석에서 여행 유튜브를 보며 낄낄거리는 아저씨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한 순간 한없이 우울해졌다.


'헤어질 결심'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당장의 생활비와 아버지 병원비가 고민된다. 6년의 시간 동안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던 단골손님들도 맘에 걸린다.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타이난 사원에서 빌었던 소원을 떠올렸다.


-지금 쓰려고 하는 글이 잘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대만의 신이 나의 소원을 잘 받았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대만에 올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다시 그 사원에 가야지. 그때는 향뿐만 아니라 쌀도 공양해야겠다.


타이베이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캐리어를 맡기 때와 다른 입구로 들어오니 캐리어보관함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찍어둔 캐리어 고유 번호를 역관리원에게 보여주니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고유번호를 찍어두지 않았다면 꽤 오랜 시간 동안 헤맸을 것이다.


캐리어를 찾아 공항철도를 타러 갔다. 안내판이 정확하지 않아 헛갈렸다. 라인을 바닥에 그려두거나 공항철도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더욱 선명하게 표기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토비가 공항철도를 잘 탈 수 있냐고 몇 번이나 물어봐서 우리를 너무 노인 취급하나 싶었는데 괜히 걱정했던 게 아니었다. 캐리어를 끈 채로 위층, 아래층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겨우 길을 찾았다.

주변을 잘 둘러보고 갔으면 좋겠는데 공항철도 표시만 보면 무조건 직진하는 아내를 따라가다가 여행 중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별 일도 아닌데 캐리어도 무겁고 비가 와서 실내 공기가 습하다 보니 짜증이 절로 났다. 땀이 줄줄 흘렀다. 한 여름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겠지만 대만의 습도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름에 대만 오지 말라는 이유를 알겠어.


-왜?


-이거 뭐. 작은 일에도 짜증이 쉽게 올라오네. 헤어지고 싶은 사람하고만 여름에 와야겠다.


-여름에 오고 싶어?


-나중에 서로가 정말 미워지면 와 보자. 어떻게 되나.


-아마. 또 극복하고 전우애 생기겠지 뭐.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니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남은 현금을 다 쓰고 가기 위해 식당이 있는 라운지로 갔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면요리를 하나 시켰는데 대만에서 먹은 음식 중에서 손꼽을만한 맛이었다. 간장을 베이스로 트러플 오일이 듬뿍 들어간 비빔면이었는데 아내와 난 후루룩 거리며 음식에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대만에서의 두 번째 면요리다. (첫 번째는 숙취에 시달리던 오전 반 이상을 남긴 굴 국수)

우린 4일 동안 무엇을 했던 것일까? 여행을 하기 전 대만에 가면 면을 많이 먹게 될 거라며 라면도 참았던 우리다. 하지만 출국일에 돼서야 면요리를 먹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공항의 면요리가 맛있으면 맛있을수록 아쉬움이 더욱 진해졌다.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던 여행이었다.


-다음엔 망설이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보자.


그래!


다시 올 명확한 이유가 생겼다. 그땐 우육면도 먹고, 곱창국수도 먹고, 망고도 실컷 먹고, 지파이도 먹고 또우장도 먹어야지. 그러고 보니 한국인이 열광하는 대만음식은 하나도 못 먹었다. 이렇게 대만을 여행한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나의 첫 번째 대만은 아쉬움이 가득하다.

그래서 좋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대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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