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라! 나의 친구
S에게
잘 지내냐? 너랑 연락 끊은 지도 3년이 넘었다
그동안 너한테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너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다른 얘들한테 네 소식을 묻는 것도 좀 어색하더라고. 그렇잖아. 얘들이 네 소식을 나한테 물었으면 물었지. 내가 묻는 건 좀 웃기긴 하지.
우리가 친해진 건 스물이었고 우리가 싸운 건 마흔셋이었으니 23년 동안이나 친하게 지냈네. 짧은 기간이 아니야. 게다가 인생에서 가장 놀기 좋은 시기잖냐. 술도 참 많이 마셨다.
그래. 너랑은 술이 참 잘 맞았어. 둘 다 소주를 좋아하고 얘기하는 걸 좋아했으니 별 거 아닌 안주 하나 놓고 몇 시간씩 술 마시곤 했잖아. 얘들하고 뭉쳐서 만났더라도 꼭 나중에는 너랑 나랑 둘이 한잔 더 하고 들어 갔잖냐.
23년 동안 한 번도 크게 싸우지 않았던 우리가 그날 이후 보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너나 나나 서로 실망을 많이 한 것 같다. 그만할 때가 된 거지 뭐.
요즘도 술 많이 마시냐? 여전히 빨리 마시고?
나는 이제 예전처럼은 마시지 못해. 체력이 너무 달린다.
이제 슬슬 질리기도 하는 것 같아. 예전처럼 재미도 없고 말이야. 그렇다고 너랑 마시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 마라. 아마 요즘 너랑 마셨다면 우린 또 싸웠을 거야. 그러다 좀 지나서 연락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내다가 또 싸우고 한동안 보지 않겠지. 지겨운 관계의 연속이었을 거야. 그러니 지금처럼 아예 보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어. 적어도 서로에게 더 이상 실망은 안 하지 않냐!
굳이 따지자면 내가 변했다고 할 수도 있지. 널 더 이상 받아주질 못하니 말이야.
네가 좀 어리광이 있지 않냐! 너 맘대로 하는 것도 좀 있고 말이야. (너는 맨날 나보고 맘대로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너를 동생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 다른 사람이 네가 별나다고 해도 개성이라고 감쌌지.
제대를 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던 너를 보면서 사실 정말 많이 응원했다. 그건 너도 알지. 그때 인마 내가 술도 많이 샀잖냐. 나는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당장의 주머니 사정은 너보다 좋았으니 말이야.
나는 네가 끝까지 고민하고 공부하는 걸 보며 부럽기도 했어. 그래도 너는 당장 돈은 안 벌어도 됐잖아. 너도 알다시피 나는 당장 돈을 벌어야 할 때고 말이야.
아참. 아버지는 괜찮으시니? 오래 아프셨잖아. 네가 워낙 아버지 얘길 하는 걸 싫어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묻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네 결혼식 때 뵀을 땐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셔서 안심했었다.
우리 아버지는 2년 전에 쓰러지셨어. 여전히 병원에 계셔. 내가 워낙 나 힘든 거 친구들에게 얘기 못하는 편이기도 한데 아마 너랑 여전히 연락하고 있었더라도 아버지 문제로 힘든 점은 너한테 얘기 한 했을 것 같아. 어차피 넌 진지하게 듣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보면, 난 너한테 뭐였을까?
아마도 그냥 너 소주 마시고 싶을 때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 정도 아니었을까?
그게 나쁜 건 아닌데 나는 우리가 보낸 시간만큼 좀 더 속 깊은 사이가 됐음하고 바랐던 것 같아.
그날도 그래서 싸운 거잖아. 고민을 하다가 회사를 관두고 가게를 오픈했던 날, 다른 데서 술을 마시고 온 네가 아주 억지로 온 듯한 표정을 하고 가게 한쪽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손님들이 네 눈치를 보는데 나는 너무 어이가 없더라. 솔직히 말하면 ‘저런 걸 내가 친구로 두고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아내한테 창피하기도 하고 말이야.
너는 친구네 가게에서 편안하게 술 한잔도 못하냐? 내가 예의를 차려야 하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날 너는 너무 심했어. 웃고 넘기질 못하겠더라.
오픈한 지 4달 만에 코로나가 시작됐고 매일 같이 수많은 충동을 이겨내고 있을 때도 넌 나의 안부도 묻지 않고 너의 태도를 지적한 나에게 서운하다는 말만 했었지. 그때였어. 너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너한테 이제 보지 말자고 말하고 나서 보름 정도가 우울하더라. 미친. 꼭 여자친구랑 헤어진 것 같더라니까.
나의 2, 30대 에서 어떻게 너를 도려낼 수 있겠냐? 대부분을 함께 했는데 말이야.
갑자기 네 생각이 난 건, 어제 오랜만에 포장마차에 들렀다가 곰장어를 봤기 때문이다.
우리가 친해질 즈음 가장 좋아했던 안주가 곰장어 아니었냐. 강남역에 있는 ‘영동포차‘ 에서 깻잎에 곰장어 하나 올리고 마늘하고 고추랑 넣어서 한 손에 들고 차가운 소주를 마신 후 함께 먹었잖아. 여전히 그 맛이 기억나서 나는 가끔 곰장어를 먹는다. 그리고 그땐 네 생각이 나고.
그렇다고 곰장어를 핑계로 너한테 연락하진 않을 거야. 나는 지금이 더 편한 것 같아. 너는 너의 삶대로, 나는 나의 삶대로 사는 게 말이야.
그렇게 싫다던 은행, 여전히 잘 다니고 있지? 입사 초기에는 매일 같이 술 마시자고 하더니 어느덧 은행 사람들하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 나는 네가 드디어 적응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계속 다녀서 지점장까지 해라.
혹시 아냐? 우연히 만나게 될지…..
너의 사십 대는 어떠니? 나는 참 힘들다.
그렇다고 너한테 소주 한잔 사달라고 전화는 안 해. 그냥 혼자 마시고 말지. 인마!
그래도 그 말은 하고 싶다. 치기 어렸던 나의 이십 대를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 철없던 시절이었고 허세가 가득한 시절이라 지금 생각하면 온통 흑역사뿐이지만 큰 사고 없이 잘 보낸 건 너의 역할도 컸던 것 같다. 덕분에 외롭지 않았으니 말이야.
요즘도 소주 마시냐? 위스키로 넘어간 건 아니고? 칼칼하고 땡땡한 목소리도 여전하겠지?
가끔씩 이렇게나 생각할 게. 전화는 안 한다.
이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