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마도 선생님은 저를 기억 못 하시겠죠? 그럴 거예요. 졸업 후에 제가 따로 인사를 드린 적도 없으니 말이에요. 선생님에게 얼마나 많은 제자가 있겠어요? 그 수많은 제자들을 다 기억하는 것은 불 가능한 일이죠.
게다가 제가 선생님을 기억하는 그날은 벌써 3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에요.
저는 아직도 그날이 생생한데, 선생님은 이미 잊어버린 일일지도 모르고요.
선생님께선 지금 칠순 즈음 되셨을 것 같아요. 그때는 선생님의 나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던 시절이었잖아요. 선생님 나이를 묻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고요. 그러니까 그때의 선생님 얼굴을 떠올려 보면 마흔 언저리가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어요.
짧은 펌 머리의 단발, 작은 얼굴, 큰 눈, 단정한 투피스 정장, 깨끗한 검정 단화 구두,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몸매. 쉽게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 긴 손가락.
저는 선생님을 그 정도로 기억해요. 푸근하기보다는 조금 냉랭한 인상이었죠. 선생님의 교편은 다른 선생님들 것보다 길게 느껴졌어요. 아마도 선생님의 긴 팔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학기 초에 모두의 일기장을 본 선생님이 저를 '서기'로 지목하시던 날. 저는 경시대회에서 상을 탄 마냥 기뻤어요. 다른 아이들보다 글씨를 조금 더 잘 알아볼 수 있어서 뽑은 것일 테지만 저는 '인정'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맞아요! 선생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그때 저는 '인정욕구'에 메말라 있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무리해서 전학을 간 8 학군의 학교에서 저는 소심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확실한 건 반 아이들 중에 저희 집이 제일 못 살았던 것 같아요.
전학 오기 전에는 알 필요가 없었던 것이 전학을 온 후에는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예를 들어 어디 아파트에 사는지, 아버지 차가 무엇인지, 과외 활동으로 바이올린이나 플루트를 배우는지가 얘들 사이에서 그렇게 중요한지 저는 몰랐죠.
선생님의 생각보다 우리 집은 강남에 거주하기가 쉽지 않았아요. 아마도 '가정환경조사서'에는 연 수입을 아버지가 실제보다 높여 기입했을 거예요. 그랬을 것 같아요. 친구들은 집에 데려오지도 못했어요. 주말마다 얘들은 쉽게 가는 롯데월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지 못했죠. 몇몇 얘들이 수군대기 시작했어요.
얘들한테 꿇리기 싫었으니 적당한 거짓말로 둘러대고 학교를 다녔던 것 같아요.
그래도 선생님은 다 아셨죠? 그때는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게 있었잖아요. 거기에는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부모님에 어느 회사를 다니는지, 직책은 무엇인 지, 연봉을 얼마나 되는지도 기입해야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대충 저희 집 상황을 아셨을 거예요. 그런 걸 너무 잘 알게 돼서 그러는지 몇몇 선생님들은 노골적으로 차별을 하기도 했죠. 지금도 그분들은 얼굴하고 이름이 정확하게 떠올라요. 좋은 기억도 오래가지만 나쁜 기억도 오래가는 것이니까요. 참 부끄러움이 없는 어른들이었어요.
선생님! 저는 오늘 선생님하고 그날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기억나세요?
그날의 선생님을 떠올리면 저는 아직도 먹먹해져요. 그리고 그때의 선생님 나이가 된 지금, 선생님이 참 좋은 어른이었다는 생각이 들죠. 저도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봄소풍이었어요. 5학년 첫 소풍이었죠. 어머니는 전 학교때와 마찬가지로 정성스럽게 싼 김밥을 우리 집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락에 담아 선생님에게 드리라고 따로 싸주셨죠. 가방 안에 있는 선생님 도시락이 망가질까 봐 그날은 뛰지도 않고 조심스럽게 걸었어요.
점심시간이 되었고 아이들은 친한 얘들끼리 모여 도시락을 먹는 동안 저는 선생님을 먼저 찾았어요. 어머니께서 싸주신 김밥을 전해드려야 했으니까요. 선생님은 햇볕이 좋은 곳에 색깔도 이쁜 돗자리를 깔고 앉아 계셨죠. 주변에는 반장, 부반장의 어머니들을 비롯하여 몇몇의 친구 어머니들이 곁을 지키며 둘러싸고 있었어요. 가까이 가니 돗자리 위로 마련된 음식들은 거의 뷔페에 가까웠어요. 친구 어머니들은 각자 싸 온 음식을 선생님에게 내밀며 먹어보라고 권했지요. 하나같이 예쁘고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 보고 있는 제가 침이 꼴딱꼴딱 넘어갔아요. 제 가방 속에 있던 김밥 하고는 차원이 다른 음식이었죠.
그때, 선생님이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무슨 일이냐며 물으셨어요.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모든 어머니들도 저를 보았죠. 저는 순간 얼어버렸어요.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같아요. 저 그림 같은 음식들 사이에 어머니의 김밥을 내밀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새벽같이 일어나 김밥을 싸주고 일을 나간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선생님께 김밥을 전해드려야 했어요. 가방 안에 있는 김밥이 얼마나 원망스럽던지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밥을 선생님께 전해 드리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던 것 같아요. 등 뒤에서 들리는 친구 어머니들의 웃음소리가 왜 그렇게 저를 움츠려들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때는 비웃는 것처럼 들렸으니까요.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말이에요.
그러니까 날이 무척이나 좋은, 봄 소풍날. 저는 하루 종일 우울했어요. 친구들이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걸 애들한테 어떻게 말해요. 말해도 이해 못하죠. 걔들이 뭘 알겠어요. 정작 엄마가 싸준 제 김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것 같아요.
집에 가기 전, 모두 둥글게 모여 종례를 마친 선생님이 멀리 떨어져 있던 저를 굳이 불렀던 것 기억하시려나요? 실은 그때 도망가버리고 싶었어요. 물론 그러진 못했죠. 가까이 다가온 저의 눈을 보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오늘 먹은 음식 중에 어머니께서 싸주신 김밥이 제일 맛있었어. 너무 잘 먹었다고 꼭 전해 드려."
눈물이 나는 걸 겨우 참고 집에 가는 길에 계속 울었던 것 같아요. 소매 끝으로 아무리 훔쳐내도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요. 왜 그렇게 울었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나를 싫어하지 않는구나'라는 안도감과 '엄마의 김밥을 내가 왜 창피해했을까'라는 미안함이 겹쳤을 것 같아요. 부끄러웠죠. 그땐 왜 그렇게 자주 부끄러웠는지요.
엄마는 여전히 김밥을 잘 싸주세요. 김밥을 좋아하는 며느리 때문이죠. 밥을 잘 차려놓고도 김밥을 또 싸요. 집에 가면서 허기지면 먹으라고 말이죠. 저는 그 김밥을 보면서 선생님을 생각해요. 짐작하건대 아주 곱게 세월을 담고 계실 것 같아요. 허리는 꼿꼿하실 것 같고요. 투피스 정장도 종종 즐겨 입으시겠죠?
아마도 선생님은 각각의 이유로 선생님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많을 것 같아요. 어른이 되니까 알 것 같거든요. 좋은 어른은 누구에게나 성장의 씨앗을 심어주잖아요. 그런 분이 선생님이라는 게 정말 멋져요.
앞으로도 생각날 거예요. 재미있죠? 선생님은 모르셨을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 선생님이 김밥으로 추억될지 말이에요.
노영숙 선생님!
그 해, 저의 선생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쩌면 그날의 선생님이 저를 구했을 지도 모릅니다.
한 없이 소극적으로 변할 수도 있었던 저를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