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은 감사해요
안녕하세요. 짐 리브스 님.
이렇게 당신을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렇잖아요. 1960년대에 유명한 미국 가수를 제가 알리가 있나요? 엘비스프레슬리나 비틀스는 알지만요.
사실 짐 리브스, 당신은 한국 사람들에겐 그리 유명하진 않아요. 물론 아버지 세대는 다르겠지요.
그러니깐 짐 리브스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세대를 나누는 선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고백하자면, 저는 당신을 너무 나도 싫어했어요. 싫다는 말보다는 지겹다는 말이 더 정확한 것 같네요.
아버지가 술만 취하면 당신의 목소리를 그리워했으니까요. 밤이고 새벽이고 집 안에 당신의 목소리가 CD에서 흘러나왔으니 얼마나 싫었겠어요. 저한텐 그게 아버지의 술주정이었요.
부드러운 당신의 목소리 위에 아버지의 잔소리와 신세한탄이 얹어졌을 땐 정말 고역이었죠.
아버지는 이미 만취가 돼 와 놓고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또 술을 마셨죠. 그렇게 당신의 히트곡이 담긴 20곡 짜리 CD가 세 번 정도 플레이 돼서야 아버지는 잠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싫어할 만하죠?
당신은 몰랐겠지요. 당신의 노래가 그렇게 울려 퍼질 줄말이에요. 그것도 한국에서!
당신에게 감사한 것도 하나 있긴 해요.
첫 직장이었죠. 거래처 접대를 하는 자리에 이십 대였던 제가 불려 나갔어요.
술잔을 건네는 대로 마시고 2차로 간 노래방에서 저는 당신의 히트곡인 <He'll have to go>를 불렀어요. 거래처 사장님이 아버지랑 연배가 비슷해서 나름 전략적으로 선곡한 것이었죠.
어땧을 거 같아요?
거래처 사장님이 이 곡을 어떻게 아냐며 너무 오랜만에 들어본다고 하면서 마이크를 잡았어요. 저희 회사 부장님도 어려워하는 그 사람이 저와 나란히 서서 함께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를 마치고 그분에게 아버지 얘기를 했어요. 아버지가 술 한잔을 드시고 오시면 꼭 이 음악을 틀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고요.
그 후로 거래처와 일이 더 수월해졌어요. 가끔은 엉뚱한 곳에서 일이 풀리기 마련이니까요.
당신이 부른 <Danny Boy>는 어떻고요!
저는 당신의 곡 중에 그 곡이 제일 좋아요. 나중에 알았죠. 수많은 가수들이 그 곡을 불렀다는 사실을....
여러 곡을 찾아 듣고, 또 우연히 듣기도 했는데 저에겐 당신이 부른 게 최고였어요. 너무 많이 들어서 익숙해서 그런지 당신의 목소리가 오리지널 같았죠.
아내와 결혼 전, 데이트를 할 때 우연히 그 곡을 같이 들었어요. 아내도 아는 곡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Eva Cassidy 가 부른 버전을 들려주었어요. 끝내주더군요.
미안하지만 그때는 당신이 부른 것보다 Eva Cassidy가 부른 것이 더 좋았어요. 하긴 그땐 아내가 좋다고 하면 뭐든지 다 좋았어요. 그러니까 서운해할 것 없어요.
아버지는 당신의 노래 말고 당신에 대해 얘기해 준 적이 없어요. 아마 몰랐을지도 모르죠. 가수들의 사생활까지 다 알던 시절은 아니었으니까요. 위키트리에 있는 정보를 보고 아버지에게 당신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정말 몰랐던 눈치였어요. 당신이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사실을 말이에요.
어려운 말을 한 김에 당신에게 고백 하나 할게요.
요 며칠, 저는 정말이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될 줄 알았어요.
요양원에 계시던 아버지가 급성패혈증으로 응급실에 가셨을 땐 정말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응급실로 가던 엠블런스 안에서 아버지 손을 얼마나 꼭 잡았는지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요. 아버지를 안심시켜야 되는데 제 가슴이 뛰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하루에 한 번, 짧게 면회가 되는 중환자실에서 아버지는 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힘들어요.'라고 반복만 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 두는 수밖에요.
혈압이 불규칙하고 심장박동도 안정적이지 않는 게 보이는데 할 수 없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때 당신 생각이 난 거예요.
중환자실 규칙인, 비닐장갑을 착용한 채로 휴대폰을 꺼내 볼륨을 최대한 작게 하고 아버지의 귀에 가까이 댔어요.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죠.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던 당신의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어요.
조금 전까지 아프다며 어쩔 줄 몰라하던 아버지가 가만히 눈을 감았어요. 자장가를 듣고 까무룩 잠이 드는 아이처럼 아버지의 숨이 안정되기 시작했지요. 세 번 반복해서 들려주었는데 마지막엔 나지막이 따라 불렀다니까요.
이제 당신을 그만 지겨워할까 해요. 어쩌면 아버지의 평안을 당신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아버지 시술이 잘 끝났어요. 심장 혈관에 스탠트를 세 개나 삽입했지만 그 시술로 인해 아버지의 의식이 점차 돌아오길 바라고 있어요.
의식이 돌아오면 당신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드릴까 해요.
때론, 아무리 감춰도 불안함을 지닌 내 목소리보다 당신의 목소리가 아버지를 안심시키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아프다'는 말 말고 당신의 목소리에 아버지의 목소리를 얹어 노래하는 걸 듣고 싶어요.
꼭. 부탁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