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이즈 베스트 - 생채비빔밥
아내는 자주 시골밥상 스타일의 밥을 해준다. 상 가운데 투박하게 찌개나 국을 퍼 놓고 계란말이와 고추, 오이 같은 야채 그리고 김치. 어찌 보면 소박하다고 할 수 있는 한 끼를 먹으며 나는 말한다.
-지금 그 어떤 걸 먹었더라도 이것보다 맛있지는 않았을 거야.
신혼 초, 우린 먹는 걸로 서로 스트레스를 꽤 받았다. 간소하게 먹는 아내와 다르게 푸짐하게 먹는 걸 좋아했던 나는 아내의 밥상이 매번 빈약하게 느껴졌기 때문. 반대로 아내는 내가 차린 밥상만 봐도 부담스럽고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고.
간소하게 먹는 처가와 다르게 우리 집은 국, 찌개, 조림 등을 한 상에 놓고 푸짐하게 먹는 걸 좋아했는데 그렇게 자라다 보니 찬이 조금만 적어도 나는 제대로 먹는 것 같지않 았다. 먹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평소뿐만 아니라 시가와 처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처가에서 밥을 먹으면 나는 나와서 뭔가를 더 채워야 될 것 같았고 시가에서 밥을 먹으면 아내는 꼭 소화제를 찾곤 했다. 아내는 두 끼로도 충분했고 나는 세끼를 잘 챙겨 먹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밥을 먹는 문제가 달라 앞으로 참 피곤하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뭐든 그렇듯 시간이 지나니 그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40대에 접어드니 몸무게 관리가 예전 같지 않아 함께 자연스럽게 소식을 하기 시작한 것.
간소하게 먹으니 뭐든 더 맛있다. 한 가지 음식에 집중해서 먹으니 맛이 더 잘 느껴지기도 하고. 국이나 찌개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니 먹고 치우는데 시간도 오래 안 걸린다. 여러모로 편리하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본가에 가서도 간소하게 차려 먹어야 좋다고 잔소리처럼 얘기를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며 많이 변하긴 변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많은 것이 변한다. 식생활도, 옷차림도, 평소의 생각도.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왜 이렇게 이 사람한테 맞춰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면 거북한 것이고 '어? 나에 게 이런 면도 있었네.'라는 생각이 들면 편안한 거다. 거북함과 편암함. 이 극단의 감정은 내가 그 사람에게 억지로 맞춘 것이냐 자연스럽게 스며든 거냐에 그 차이가 있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집밥 메뉴를 하나 꼽으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생채비빔밥’을 말할 것 같다.
간단한 비빔밥이지만 나름의 까다로운 법칙이 있긴 한데 일단 무의 매운맛이 가시지 않은 갓 담은 생채여야 한다. 생채는 냉장고에서 2~3일만 지나도 맛이 변한다. 조금이라도 익은 맛이 나는 생채는 이미 생채가 아니다. 그러니 생채는 조금씩 먹을 만큼만 하는 것이 좋다. 바로 먹을 생채에는 액젓도 넣지 않는다. 간은 오로지 소금으로만. 그래야 바로 먹었을 때 뒷맛이 깔끔하다.
생채가 준비됐다면 밥만 있으면 모든 준비는 끝난다. 커다란 양푼에 뜨거운 밥을 넓게 펴고 생채를 듬뿍 올린 다음, 들기름 두 바퀴!
반드시, 꼭, 필수로, 어김없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들기름이어야 한다. 가끔 여기에 고추장을 추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로 고추장을 추가하지 말라고 캠페인이라도 싶다. 고추장을 넣는 순간부터 생채비빔밥은 이미 생채비빔밥이 아니다. 그냥 고추장비빔밥일 뿐!
다양한 야채를 넣어 먹는 걸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콩나물이나 생야채를 함께 준비해 놓긴 하지만 역시 ’ 생채비빔밥‘은 오로지 생채만 넣어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계란프라이도 안된다. 참치도 안된다. 고기도 안된다. 오로지 생생한 생채만!
안 되는 게 많은 것 같지만 결국 기본에만 충실하면 된다. 더 맛있게 먹고 싶은 욕심에 자꾸 더하다 보면 기본의 맛을 헤쳐 결국 니맛도 내 맛도 아니게 된다. 많은 것이 그렇다. 잘 보이기 위해 하나씩 더한 옷차림은 결국 우스꽝스럽기가 일쑤고 더 잘 쓰기 위해 비유와 꾸밈이 많은 글도 결국 장 읽히지 않는다. 처음이 가장 좋을 때가 많다. 부족한 것 같아 자꾸 더 하다 보면 군더더기만 자꾸 붙을 뿐이다. 인간관계든 일이든 꽉 막혀 있을 때 처음으로 돌아가 잘 생각해 보면 의외로 쉽게 풀릴 때가 왕왕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