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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Jan 18. 2024

요리의 기쁨

여행지의 요리 - 낙지초무침



함께 소주를 맛있게 즐기는 친구들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친구는 아니고 3살 위의 형들이지만 서로 존중하면서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이제는 정말 동갑의 친구처럼 느껴진다. 가끔은 형들이 동생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난 건 14년 전이었다. 웹툰 작가였던 A를 친구를 통해 소개받았고 우린 함께 여행하며 책을 한 권 출간했다. A와는 여행 후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더욱 친해졌고 그가 어느 날 데려온 그의 친구 B와 내가 또 친해지면서 우린 그렇게 소주를 마셔가며 세월을 보냈다. 나의 삼십 대의 술자리는 그들이 8할을 차지했다. 맛있는 게 있으면 그들이 생각났고 신나는 게 있으면 그들이 생각났다. 사십 대를 관통하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좋은 술친구다. 물론 지금은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한다. 일단 내가 가게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줄었고 체력도 이제 예전만큼 못하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보던 우리는 한 달에 한 번도 못 보는 사이가 됐다. 확실히 예전 같지 않다. 그런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거다.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면 친구보다 가정에 충실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걸 거스르려 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다. 우린 모두 변화를 받아들였다. 서운하지도 않다. 가끔 만나는 것만으로 설레는 친구들이 있는 게 기쁠 뿐이다. 그런 우리를 잘 알아서 그런지 나의 아내와 형들의 아내나 여자친구는 우리가 만날 때 굳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우리끼리의 시간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날을 잡고 만난다. 갑자기 전화해서 만나는 급만남은 없어졌다. 서로 시간을 체크하고 아내에게 허락을 맡은 후, 약속 시간이 정해지면 그때부터 서로 궁금했던 맛집을 단톡방에 공유한다. 아무 때나 전화를 하면 만날 수 있었던 때와 달라서 한 곳의 식당도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서로 검증하고 또 검증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어디를 가도 우리에게 실패는 없다는 것을.....


일단 우리는 만나면 좋다. 그래서 최대한 일찍 만난다. 마음 같아선 아침 9시부터 만나고 싶지만 그건 여러모로 눈치가 보이니 집에서 10시 반 즈음 나서 이른 점심을 목표로 만난다. 식당은 당연히 반주를 곁들일 수 있는 곳으로 정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가끔 불친절하거나 생각보다 입맛에 맞지 않는 식당을 갈 때도 있긴 하지만 이미 만나서 소주 한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행복에 우리 중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잠깐의 불친절함이나 맛없는 음식이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지 못한다. 식당이 별로면 소주 한 병만 나눠 마시고 일어나면 그만이다. 짜증을 낼 필요가 없다.


만나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우리를 보고 몇 해 전 아내가 제안을 했다.


-그러지 말고. 회비를 모아서 만나. 그러면 서로 부담 없잖아.


아!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형들에게 제안을 했고 우리에겐 우리의 지갑이 생겼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니 지갑이 제법 도톰해졌고 우린 만날 때마다 회비로 하루의 휴가를 즐긴다.

어느 날은 좋아하는 매장 앞에서 만나 서로 골라준 새 옷을 사 입고 기분이 좋아 폴짝폴짝 뛰며 소주를 마시러 가기도 하고 어느 날은 수영장 있는 호텔을 예약해서 마시고 수영으로 해장하고 또 마시고 수영으로 해장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광주의 강연이 있다는 A형의 소식을 듣고 B형과 나는 광주로 향했다. 왜 그렇게 아침 일찍 가냐는 아내의 물음에 표가 그 시간 밖에 없었다는 핑계를 대고 탄 KTX는 왜 그렇게 설렜는지....

나는 가게를 하루 문 닫고 가는 거였고, B형은 회사일이 한창 바쁠 때였는데 휴가를 낸 것이었다. 광주로 가는 동안 우리는 일 얘기를 하지 않았다. 매출 하루 손해 보면 어떻고, 회사에서 바쁠 때 휴가 쓴다고 눈치를 주면 어떠랴? 그건 지금 우리의 하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광주 '문화전당'역에서 만나기로 한 우리는 광주송정역에서 문화전당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까르르 까르르 여고생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루 전, 광주에 와 있던 A형이 움직인 시간과 우리가 움직인 시간이 비슷했던 것. 약속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시간에 맞춰가면 중간에 만날 수 있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우리는 우연처럼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첫끼가 중요했다. 누구도 맛집을 검색해서 찾아보지 않는다.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당기는 집이 있으면 들어가면 된다. 이것저것 재면서 맛집을 찾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광주였다. 그냥 백반집만 들어가도 기본은 한다는 광주. 그러니 맛집 검색은 더더욱 필요 없다.


세월이 보이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낙지집이었다. 메인 메뉴는 낙지해장국. 우리는 재빠르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물었다.


-낙지해장국 먹어 봤어?


형들이 대답했다.


-없지. 없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낙지해장국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알아서 시키라고 하고 화장실을 다녀온 다녀왔는데 아직 형들이 메뉴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안 시켰어?


-낙지해장국으로 가는 게 맞긴 한데. 고민이야. 낙지초무침이 있는데?


-뭘 고민해 둘 다 가야지.


첫 잔은 소맥이었다. B형 앞에 맥주잔이 모인다. 이상하게 그 형이 타 준 게 더 맛있다. 낙지초무침이 나왔다. 광주답게 고구마줄기가 함께 무쳐져 있었다. 전라도 음식에서 고구마줄기는 생선조림이나 무침에 잘 쓰인다.

형들은 고구마줄기로 무친 건 처음이라고 했다. 맛있었다. 살짝 데친 싱싱한 낙지의 식감이 부드러웠다.

그날 우리는 총 14시간을 술을 마셨다. 지금 생각하면 별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계속 웃고 있었으니 진심으로 그 시간이 좋았나 보다.


광주에서 돌아와 장을 보며 처음으로 산 게 낙지였다. 광주로 매번 가지는 못할 테니 그때의 기억을 형들에게 선물해주고 싶어서였다. 낙지 머리를 갈라 내장을 빼 내고 연하게 끓여낸 멸치육수에 데친다. 쫄깃하게 하고 싶으면 바로 찬물에 씻어내고 부드럽게 하고 싶으면 실온에 그대로 식힌다.


고구마줄기 대신에 형들이 좋아하는 미나리를 듬뿍 넣는다. 오이, 양파, 깻잎 등의 야채는 취향대로....

식초를 조금 과하게 넣어 양념장을 만드는 게 포인트인데, 부드러운 낙지는 새콤을 넘어 조금 시큼할 정도의 양념장으로 비벼야 반찬이 아니고 술안주가 된다.


가게에 형들이 왔다. 광주여행을 마치고는 처음이었다. 낙지초무침을 냈더니 좋아한다. 그때 그것보다 더 맛있단다. 낙지초무침을 나눠 먹으며 우리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여행을 계획했다. 어디면 어떠랴? 우리만 있으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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