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 백합미역국
얼마 전 엄마의 생일이었다. 무릎수술을 마치고 재활을 하느라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엄마는 졸지에 생일을 병원에서 맞게 됐다. 병원에 양해를 구해 잠시 외출을 하고 외식을 하려 생각했지만 아직 몸이 성치 않은 엄마에겐 그것 또한 부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나마 생일 상을 준비했다. 잡채를 만들고 김밥을 싸고 미역국을 끓였다. 엄마가 입원한 병실은 2인실이라 다른 환자들에게도 크게 피해가 되지 않았고 병원에서도 외부음식에 대해 까다롭게 굴지 않는 모양이었다. 교통사고나 외과수술 후 재활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라 그럴 것이다.
한우로 끓인 소고기 미역국은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엄마도 맛있게 먹었다. 나는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10개월 전, 뇌출혈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는 여전히 정상 컨디션을 못 찾고 있다. 어쩌면 영영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엄마에게 축하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비슷한 말을 건네긴 했다.
-엄마. 그동안 무릎 열심히 썼으니 새로 할 때 되긴 됐어. 다들 재활만 잘하면 수술하기 전보다 훨씬 좋아진다더라. 열심히 운동해. 다시 걸음마부터 시작해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면 되지 뭐. 여기서 다시 태어난 거야 엄마는.
엄마와 함께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의 담당 간병인에게 전화를 걸어 영상통화를 했다. 한눈에 우리를 알아본 아버지의 얼굴이 아이처럼 환해졌다. 뇌출혈 후, 아버지의 표정에서 근엄은 없어지고 짓궂은 아이의 표정이 자꾸 보인다. 엄마가 큰 소리로 얘기했다.
-나 알아볼 수 있어? 나 누구야? 나 빨리 퇴원해서 갈게.
자신을 정확히 알아보는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휴대폰 화면으로 보면서 엄마는 몇 번씩 자기가 누구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끝내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미역국을 끓여줬던 사람이다. 생일선물로 홈쇼핑에서 쓸데없는 보석을 사서 혼이 났던 사람이다.
그렇게 엄마의 생일 면회를 마치고 나서 나는 며칠 동안 생각이 많아졌다. 이제 두 사람은 생일을 영영 서로 챙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는 아버지의 생일을 챙기겠지만 엄마는 더 이상 아버지가 끓인 미역국을 먹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레토르트 식품으로 나온 <백합미역국>을 우연히 보았다. 오. 괜찮겠는데! 그동안 왜 저 조합을 왜 생각하지 못했지? 바지락을 넣은 미역국을 먹은 적은 있지만 백합을 넣은 미역국은 기억에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레토르트 <백합미역국>을 제자리에 두고 백합을 사러 수산시장으로 갔다. 미역국 용으로 1kg이면 충분하겠지만 2kg을 샀다. 미역국을 하고 남은 건 찜기에 물과 소주를 넣고 쪄 먹어도 괜찮다. 아버지도 시장에서 백합이 보이면 넉넉하게 사곤 했다. 엄마는 필요한 만큼만 사라고 늘 옆에서 잔소리를 했었고.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고 늘 생각하지만 백합 사는 건 닮았나 보다.
백합미역국이라고 해서 특별한 레시피는 없다. 백합에서 나오는 육수 자체가 특별한 것이니 육수만 잘 뽑으면 된다. 대부분 조개를 이용한 국물 요리는 조개를 미리 넣어 육수를 따로 뽑아 사용하면 해감이 잘 된 깔끔한 국물 요리를 만들 수 있다.
1. 백합 겉면을 잘 씻은 후 물과 소금을 넣고 중불로 끓이다가 백합이 입을 벌리면 백합을 건져낸다. 백합을 건져낸 육수를 윗물만 조심히 따르면 육수 완성. (아래에는 미처 해감되지 않은 잔유물들이 가라앉아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2. 최소 1시간 정도 물에 불린 미역을 냄비에 넣고 들기름 1스푼, 마늘 1 티스푼, 참치액 반스푼 넣고 볶아준다.
3. 미역을 볶은 냄비에 미리 준비한 육수를 넣고 강불로 끓이다가 팔팔 끓으면 약불로 줄여 30분 이상 뜸 들인다.
4. 따로 빼둔 백합살을 먹기 전에 고명으로 넣어 준다.
다가오는 아버지 생일에는 백합미역국을 끓여서 드려야겠다. 10개월 동안 뱃줄을 통해 식사를 한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조금씩 죽을 먹기 시작했다. 아버지 생일까지 아직 9개월이 남았으니 그때 되면 미역국을 먹을 수 있으리라.
백합을 먹으면 원래처럼 좋아하려나? 벌써부터 궁금해서 안달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