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목욕탕의 나르시시스트
어제는 목욕탕에 갔다. 코로나 이후는 처음이니까 따져보니 거의 4년 만이다. 사우나를 좋아하지만 코로나 때는 엄두가 나지 않았고 올봄에 드디어 한번 가볼까 마음먹었을 때는 진드기가 유행이었다.
4년을 집에서만 씻다 보니 이제는 목욕탕에 가는 것 자체가 어색해졌다. 남들과 한 공간에서 홀딱 벗은 채로 있어야 한다는 게 그렇게 어색해질 일인가 싶다.
목욕탕은 갑자기 가게 됐다. 작은 방 누수 공사가 생각보다 쉽지 않아 하루종일 집을 비워줘야 했고 아내와 난 오랜만에 찜질방에서 시간을 보내자고 의견을 모았다.
때수건을 챙겼다. 탕에 몸을 불려 때를 벗겨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개운했다. 멀리 움직이기가 귀찮아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오래된 찜질방으로 갔다.
한 시간 후, 아내와 찜질방에서 만나기로 하고 남자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한방 향과 싸구려 스킨 향 그리고 염색약의 진득한 검정 향이 오묘하게 뒤섞인 냄새가 풍겼다. 그리 좋지는 않지만 은근 편안한 냄새였다. 추억의 냄새다.
락커를 찾아 옷을 벗어 잘 개어두었다. 어릴 적 아버지와 목욕탕에 갔을 때, 옷을 벗고 잘 개어두지 않으면 꾸중을 들었었다.
-내가 다시 입을 옷인데, 함부로 구겨지게 두지 마.
절대로 고장 날 것 같지 않은 저울에 몸무게를 쟀다. 요 며칠 술을 자주 마셨다니 조금 빠졌던 살이 다시 붙었다. 내일 아침엔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걸어야겠다. 욕탕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람들이 보였다. 아침 10시, 동네 목욕탕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남자 넷, 40대로 보이는 남자 셋, 세신사 하나, 그리고 나.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압. 오랜만이라 그런지 이 목욕탕의 수압이 원래 센 것인지 따가울 정도다. 아내가 챙겨준 일회용 샴푸를 머리에 바르고 남은 건 몸에 발랐다. 샤워를 마친 후, 중탕으로 들어갔다. 탕 안에는 60대의 남자가 다리를 쫙 펼치고 눈을 감은 채 물에 떠 있는 듯 반쯤 누워 있었다. 나도 다리를 펼치면 그와 닿을 것 같아 그 사람이 자신만의 열반(?)에서 깨어나길 기다리며 한쪽 구석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2, 3분이면 깨어날 줄 알았던 열반의 남자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씩 약이 오르기 시작해서 일부러 헛기침을 해도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다리를 펴서 자리다툼을 해볼까 생각하다가 그냥 일어섰다.
몸은 어느 정도 불렸다.
좌식 세면대를 하나 골랐다. 앉기 전에 의자에 비누칠을 해서 꼼꼼하게 씻어낸다. 이것도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다. 바디샤워를 따로 챙겨 오지 않아 목욕탕 비누를 사용했다. 그럴 땐 손톱 바깥 쪽을 사용하여 대패를 썰듯이 아주 얇게 한 면 벗겨낸 후 사용한다. 때를 밀기 시작했다. 몸이 잘 불려져서 인지 힘을 강하게 주지 않았는데도 하얀 때가 주르르 벗겨졌다.
때를 밀며 주변을 살폈다. 주변머리만 남은 70대로 보이는 남자가 때를 밀다 말고 지쳐있다. 가슴은 뼈와 붙어 있고 배는 봉긋하다. 마른 팔은 인체도를 보는 것처럼 근육만 선명히 보였다.
열탕에는 40대의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 작고 말랐지만 배는 적당히 나와있다. 오늘 그는 뼈에도 힘이 없는 듯 축 쳐져 있다. 한숨을 자꾸 쉬고 하품을 계속했다. 당장이라도 열탕 속에 토를 할 것만 같다. 숙취일 것이다.
때를 살살 벗겨내며 탕 안의 모든 사람들을 살폈다. 노쇠한 몸들이다. 수증기가 가득한 거울을 샤워기로 씻어내니 내 얼굴이 보였다. 길고 풍성한 머리, 힘이 있어 보이는 어깨선, 그리고 유독 날렵해 보이는 턱선.
오늘따라 꽤 괜찮아 보였다. 나는 아직 젊다. 20대가 대부분인 연남동에서 매일을 보내니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젊다. 다리를 쭉 펴 때를 밀기 시작했다. 긴 다리는 아지니만 여전히 탄탄한 허벅지다. 힘을 주어 근육을 느끼며 때를 밀었다. 일어나니 좌식 세면대의 거울에는 상체와 하체의 일부분만 보인다. 아내의 식단을 함께 하다 보니 보기 싫던 옆구리 살도 많이 빠진 것 같다. 적어도 이 목욕탕에선 나의 몸이 가장 탄탄하다.
운동을 다시 열심히 해야겠다.
때를 다 밀고 나선 의자에 다시 비누칠을 하고 씻어둔다. 이것도 역시 배운 것이다. 때수건을 꼭 짜서 다시 챙겼다. 어릴 땐 아버지가 때수건을 다시 챙기는 게 너무 구두쇠 같이 보였다. 남들은 한번 쓰고 휴지통에 버리는 때수건을 아버지는 애지중지하며 챙겼다. 심지어 빳빳해 보이는 때수건은 개끗히 씻어서 가져가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싫고 누가 볼까봐 창피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 목욕탕에 갈 일이 있으면 때수건을 사서 한번 쓰고 버렸다. 나만 아는 사치였다. 그랬던 내가 이제 때수건을 챙긴다. 이게 한번만 쓰고 버리기엔 참 아까운 것이다.
욕탕에서 나와 찜질복으로 갈아입고 나니 아내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졌다. 찜질복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전화기가 울렸다. 아내였다.
-나 지금 나왔는데 어디 있어?
-나도 이제 막 나와서 찜질방으로 이동 중.
-진짜? 자긴 남자치고 진짜 오래 씻긴 한다.
-그런가? 때 밀면 시간 금방 가지 뭐.
찜질방에 들어서니 나와 통화를 하느라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아내도 전화기를 끊으며 손을 흔든다.
-아주 개운해 보이네.
-응 좋았어. 여러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