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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Apr 08. 2024

심난한 아침

나는 악성 민원인이었을까?

아침에 일어나 거실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작은 방에 있던 모든 옷가지를 거실에 꺼내 놓았기 때문.

작은방 천장에 물이 새서 내일 공사를 해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휴일에 옷과 씨름하기 싫어서 아내와 난 어제 미리 옷을 꺼내 거실에 쌓아두었다.


15층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몇 년간 작은 방 누수로 인해 고생을 했다. 꼭대기 층이니 위층과 상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파트 관리소와 협의를 해야 하는데 관리소 직원들이 책임을 회피하며 자꾸 말을 바꿔서 긴 시간 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일의 체계가 없는 관리소 직원들을 경험한 후, 나는 관리소 직원들과의 회의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관리소와 통화한 기록, 관리소 직원이 집에 와서 살펴본 기록, 협의 날짜 등을 꼼꼼하게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리소에 찾아가 직원들과 얘기를 할 때면 그 일지를 보여주며 당신들이 얼마나 이 일에 대해서 비협조적인지 내가 얼마나 기회를 주고 참고 있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관리소 직원은 설비 전문가가 함께 방문해야지 빨리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데 설비 전문가가 아직 시간이 나지 않아서 방문이 그동안 어려웠다고 얘기를 했다. 6개월 동안 같은 변명만 반복을 했고 심지어는 같은 얘기를 하는 것 자체를 민망해하지도 않아서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들은 그냥 돌아가면 몇 주후 또 같은 말을 반복할 사람들이라 어떻게든 확답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바쁘다는 설비 전문가와 직접 통화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직접 연결이 어렵다는 직원은 연결이 자리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는 나와 대치하다가 결국 설비직원과 전화 연결을 시켜주었다.


설비 전문가의 방문 약속은 생각보다 쉽게 잡혔다. 관리사무소에서 그동안 약속을 잡으려고 노력을 했는지 의심됐다. 하지만 더 이상 따지면 나만 스트레스받을 일. 우선 방문 날짜가 잡혔으니 소정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그리고 며칠을 기다렸다. 방문일이 하루 전이 됐는데도 설비업자에게서 전화가 없었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몇 시에 방문할지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아무런 전화가 없으니 슬슬 약이 올랐다. 자꾸 보채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아 관리소 퇴근 시간 전까지 기다리다가 전화를 걸었다.


-저 00동 000호인데요. 내일 방문하시기로 했는데 전화가 없으시네요.

-네? 무슨 일이시죠?

-아니. 저희 집 작은방 누수건 때문에 설비하시는 분이 방문하시기로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요.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늘 그렇듯 여자직원이 먼저 전화를 받고 남자 직원이 전화를 건네받았다.


-무슨 일이시죠?

-아니. 저희 집 작은방 누수건 때문에 설비하시는 분이 방문하시기로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요. 아니 그런데 제가 똑같은 말을 몇 번을 해야 하는 건데요?

-아. 저희가 업무 파악이 아직 안돼서 체크하는 거예요. 직원들이 다 바뀌었거든요.

-네? 지난주까지 저랑 통화할 때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직원이 다 바뀌었다고요?

-네. 이번에 다 바뀌었어요. 지금 밀린 업무를 파악하고 있는데. 방문 메모는 없네요.

-저는 며칠 전에 약속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댁에 지금 계시면 일단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보기 좋게 당했다. 관둔 직원은 나와 실랑이를 할 때 자기가 관두는 것을 몰랐을까?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그럼 직원들이 바뀌는 것을 나에게 알리는 것이 맞다. 끝까지 그 사람은 무책임했다.

새로운 담당자가 집에 방문했다. 나는 그가 반갑지 않았다. 결국 같은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핸드폰에 메모해 두었던 사진과 일지를 보여주며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이건 빨리 공사 들어가야겠네요.


새로 온 담당자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보였다. 나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일단 공사만 진행하면 되는 것이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푸념을 해봤자 서로 피곤할 일이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겠어요.

-아니 고생이야 별 것 없는데 일이 진행이 안되니까. 너무 스트레스받았죠. 그리고 직원들이 바뀐다는 말도 없이 바뀌어버렸으니 제 입장에서 황당하네요.

-여기가 아파트가 오래돼서 민원이 많아요. 어르신들도 많이 사시고. 그러니까 관리소 직원들도 매일 전화에 시달려요. 어려운 곳이에요. 여기가 워낙에.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나는 관둔 직원에게 악성 민원인이었을까?

나는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따져 물어도 그는 그저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 자신만의 입장은 있는 것이니까. 그래도 일을 못하고 책임감이 없는 건 너무너무 싫다.


어쨌든 드디어 공사가 내일 시작된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시작된 공사지만 옷으로 꽉 차 있던 작은 방을 치우려다 보니 일이 적지 않다. 거실 한편에 옷을 쌓았다. 저 많은 옷들이 어떻게 다 들어가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이 참에 옷이나 정리해야겠다. 이제는 조금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옷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다양한 옷을 입는 게 좋았다면 이제는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는 몇몇의 옷을 편애한다. 이번에는 더 꼼꼼하게 선별하고 편애를 해야겠다.


작은 방이 전 보다 조금 더 널널해질 것 같다.


비워진 작은 방. 꽤 넓은 곳이었다


거실에 널려진 옷들. 요 며칠 동묘에서 쇼핑하듯 옷을 주워입고 있다


글 공간이 없어서 주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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