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근처를 걷는 건 오랜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좀 떨렸다. 회사 관둔 지 얼마 안 된 사람 특유의 어색함, 아마 나만 느끼는 건 아닐 거다.
오늘은 근영 언니와 점심 약속이 있었다. 딱 둘이.
회사 시절 가장 가까웠던 언니였고, 마지막까지 내 편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괜히 더 신경이 쓰였다.
카페처럼 꾸며진 작은 식당에 들어서자, 근영 언니가 먼저 와 있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그런데
낯익은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회사에서 소문난 불여우, 수민이 있었다.
수민은 회사에서도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겉으론 밝고 친절한 척했지만, 사실은 늘 다른 여자 직원들을 견제하고 경쟁하길 좋아했다. 누가 조금이라도 주목받으면 견딜 수 없어 했고, 남자 직원들의 관심이 자신에게만 쏠려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
결혼을 했지만, 남자 직원들 사이에선 여전히 인기 많다는 걸 은근히 즐겼다.
그런 수민을 좋아하는 여직원은 드물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자리로 다가가며 근영 언니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언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근영 언니는 입술을 깨물고 나를 보더니 급히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작게 속삭였다.
"나... 아까 톡 보냈는데… 못 봤어?"
(못 본 게 아니라, 말한 적도 없잖아 언니...!)
근영 언니는 식은땀을 흘리며 죽을죄 지은 표정을 지었다.
"나 진짜 미안해. 무심코 오늘 너 만난다고 회사 사람들 앞에서 말했거든… 근데 그 자리에 수민이가 있었어. 하필."
'하필'이란 말에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수민이는 이미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물을 홀짝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진짜 오랜만이다~ 얼굴 보니까 너무 좋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앉았다.
"그래, 오랜만이다.“
나는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뭐. 온 김에 밥은 먹어야지.
자리를 정리하고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 묘한 긴장감이 식탁 위를 덮었다.
수민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어머, 너~ 피부에 뭐 했어? 너무 좋아졌다?"
칭찬인 척, 하지만 눈빛은 샅샅이 관찰하는 듯했다.
나는 순간 속으로 눈을 굴렸다.
'남 얼굴에 뭐 했는지는 왜 궁굼한건데?
너는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빛나야 직성이 풀리잖아.
남자 직원들한테도 플러팅도 장난 아니던데?
어쩌라고. 나는 그냥 잘 살고 있는데.'
진심은 이미 전투모드였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야, 하고 속으로만 몇 번을 되뇌었다.
겉으로는? 나는 그저 무심하게 웃었다.
"그냥… 잘 쉬었나 봐.“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수민은 또 한 마디를 던졌다.
"그나저나 소문 들었어. 너 로또 돼서 회사 그만뒀다던데? 진짜야?"
그 순간, 포크를 들던 내 손이 잠깐 멈췄다.
테이블 아래로, 근영 언니가 내 다리를 살짝 발로 툭 쳤다. '넘어가'라는 신호였다.
"에이~ 그런 소문은 항상 있잖아. 다들 상상력이 풍부해."
수민은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나는 대화가 길어지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요즘 회사는 어때? 여전히 바빠?"
근영 언니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똑같지 뭐. 바빠봤자 내 월급은 그대로고."
우리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수민은 여전히 나를 흘긋거리며 탐색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냥 모른 척, 고개를 숙이고 음식에 집중했다. 셋이서 식사를 하는 내내, 대화는 어딘가 어색했다.
수민은 계속 자기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바쁘다, 애는 어쩌다, 회사는 여전히 자기 없으면 안 된다. 나는 들으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답은 적당히, 웃음도 적당히.
수민은 밥을 다 먹고 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 먼저 갈게~ 오늘 미팅 있어서. 커피는 다음에!"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잘가~ 수고해." 하고 얌전하게 인사했다.
근영 언니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수민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둘 다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후——“
근영 언니가 테이블을 쾅쾅 치며 웃었다.
"야, 나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쟤 뭔데 그렇게 떠들어!"
나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언니, 나 아까 진짜. 손톱으로 허벅지 찔러가면서 참은 거 알아?"
근영 언니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아니, 로또 소문은 또 어디서 들었대? 별걸 다 만들어서 퍼트려! 지가 관심 없으면 죽는 병 걸린 것처럼!"
"그러니까~ 그리고 뭐야, 남의 얼굴에 뭐 했냐는 건 또!"
"지가 제일 예뻐야 되거든. 지가 중심이어야 직성이 풀려."
우리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따뜻한 라떼를 한 잔씩 들고서도 한참 동안 수민이 이야기를 했다.
"진짜 저 지지배도 대단해. 참 한결같아. 사람이란 게 그렇게 쉽게 안 바뀌어. 냅둬, 세상 넓고 괴물은 많다더라. 언젠간 지보다 더 한 사람 만나서 피눈물 흘리겠지."
근영 언니가 라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또 한 번 쿡쿡 웃었다.
창밖으로 상쾌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분명히 아까까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후련했다.
회사 시절엔 늘 조심하고, 긴장하고, 싫어도 웃어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젠, 싫은 사람한테 웃어줄 필요도 없고, 불편한 자리를 억지로 참을 이유도 없고,내 시간을 그렇게 헛되이 쓸 이유도 없었다.
나는 커피잔을 돌리며 속으로 다짐했다.
' 다시는, 다시는, 저런 인간들 눈치 보며 살지 말자.'
근영 언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진짜, 오늘 너 얼굴 보니까 나까지 힐링 된다. 역시 사람은, 회사를 떠나야 빛나는 거야ㅋㅋ."
나는 눈을 찡긋했다.
"그치? 나 이제 자연광 인생이야."
둘은 깔깔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카페 창가를 가득 채웠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게 다 괜찮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