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를 던졌다.
쫄면서도 용감했던, 내 인생 첫 겁 없는 짓이었다.
퇴사 후 첫날 아침.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식겁했을 시간이었지만,
나는 이불 속에서 뒹굴뒹굴 굴렀다.
"아, 맞다. 나 이제 백수지."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멍하니 누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첫 일정은, 친구와 커피.
"야, 나 이제 백수야."
친구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야, 20년 동안 회사 다니기 싫다고 징징대더니 드디어 했냐?"
나는 피식 웃었다.
"응. 나 진짜 이제 자유야."
"좋겠다, 진짜. 내 대신 세상 좀 실컷 누리고 와라."
우리는 그렇게 깔깔 웃었다.
하지만 웃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시계를 흘끗거렸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데도,
습관처럼 시간을 재고 있었다.
'참, 아직 마음이 직장에서 못 벗어났네.'
피식 웃으며 시계를 손등으로 툭 쳤다. 그냥 커피를 마셨다.
며칠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마트 가고, 빨래 널고, 애 데리러 가고...
퇴사하면 인생이 막 달라질 줄 알지만,
현실은 의외로 평화롭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고 저녁도 먹이고, 아이랑 나란히 누워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어릴 때 뭐 되고 싶었어?"
순간 멍— 했다.
그 질문… 너무 간단한데, 왜 이렇게 대답이 안 나오는 걸까?
"...음… 엄마는… 카피라이터? 광고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그게 뭐야?"
"그냥… 사람들이 보고 기분 좋아지는 말 쓰는 사람이야."
그러곤 괜히 웃으며 덧붙였다.
"엄마 진짜 웃기지. 대학교 땐 인기 많은 여자가 되고 싶었어."
"에? 그게 직업이야??"
"ㅎㅎ… 아니야. 그냥… 되고 싶었어. 드라마처럼 연애도 하고."
내 말에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 사랑이 뭔지 모르겠는 표정.
그 모습이 어찌나 순진하고 기특하던지.
그날 밤, 아이를 재우고
혼자 주방에 앉아 생각했다.
‘그래. 난 카피라이터 되고 싶었고,
한창 때는 연애 많이 하는 주인공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리고는 통역사나 번역사가 꿈이었지.’
외국어로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삶.
가끔은 그게 진짜 나 같은 사람한테 딱인 것 같단 생각도 했다.
복잡한 일머리는 없어도
말 걸고, 웃고, 도와주는 건 자신 있으니까.
갑자기, 내 안에 있던 ‘진짜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작은 손전등처럼 켜졌다.
가늘지만, 분명한 빛.
“지금부터라도... 한 번 해볼까?”
그날 밤, 나는 외국인 대상 한국어 튜터 알바 공고를 봤다.
‘한국어 기초 회화 가능자, 재택 가능, 비대면 수업, 시간 조율 가능.’
뭔가 딱 나 같은 사람을 부르는 것 같았다.
소개서엔 "친절하고 열정적인 튜터가 되겠습니다"
이런 문장을 억지로 끼워 넣었다.
며칠 뒤, 연락이 왔다.
"학생은 중남미 출신이고요, 한국어 완전 초급입니다."
오케이. 파이팅.
첫 수업.
"안.녕.하.세.요!"
나는 또렷하게 인사했다.
학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림도 그리고, 손짓 발짓까지 총동원했지만
학생은 여전히 못 알아들었고,
그 와중에 화면 저편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터졌다.
"웨에에에엥!!"
학생은 급하게 "Un momento!"(잠깐만) 를 외치고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카메라만 바라봤다.
아기 울음소리만 들리는 컴퓨터 앞에서,
나도 모르게 겨땀이 줄줄 났다.
'뭐지, 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상하게, 내 일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수업은… 그냥 그렇게 끝났다.
나는 조용히 ‘튜터는 패스’ 목록에 체크했다.
수업을 마치고, 나는 집 앞 마트에 들렀다.
계란 한 판, 우유 한 통,
생각나는 대로 장을 봤다.
장바구니는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그러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이, 마트 앞 비닐봉지를 껴안고
나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바람은 세차고, 옷은 흠뻑 젖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났다.
집에 도착하자,
젖은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커다란 여행가방을 꺼냈다.
‘어디로든 가보자.’
가방을 여는 소리가
빗소리와 겹쳐 들렸다.
정말로, 뭔가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
아주 작지만 분명한, 내 인생의 방향 전환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