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에 있어 얼마나 뛰어나는지가 그 척도가 되곤 한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한 도시에 밀집해 살아가기에 이는 거부할 수 없는 필연적인 현상일지 모른다. 애써 SNS를 외면하려고 노력해도, 오프라인 장소 조차도 사람들이 원하는 '유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능력에 비해 좋은 장비나 물건을 소유하려고 한다. 좀 더 좋은 물건을 쓰고 싶어하는 것을 우리는 물건 자체의 소유로써만 바라본다. 그 물건의 가격, 그 물건을 지불 할 수 있는 능력, 물건의 쓰임세 등. 기업은 이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 경제가 아무리 위축되도 유행인 것에 대해 사람들은 지갑을 쉽게 연다. 유행 자체의 좋고 나쁨을 말하고 싶은게 아니라, 삶에서 유행이 우선순위에 쉽게 우위에 서게 되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인과의 만남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날 수 있고, 100살 시대에 132살에 죽을수도 있다. 그래서 '적당히' 삶을 즐기는게 중요한건 다 알지만, 그 '적당히'가 어렵다.
'적당히' 돈을 모으고
'적당히' 돈을 쓰고
'적당히' 사람을 만나고
'적당히' 혼자 지내고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외로워하고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슬퍼하는
그 정도가 어렵다. 비단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사실 어떤 삶을 살아가던지 모두에게 주어진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만 왜 이렇게 힘이 많이 들까.
'적당히' 위로받기도
'적당히' 비평하기도 어렵기에 우리는 이 대다수의 지지와 공감을 받은 자를 전문가라 칭하고 이들의 말에 전문성이 있을 뿐 아니라 권위까지 가지게 해 준다. 반대로 이 전문가에 대해 사람들은 더 깐깐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백의민족의 시대에 모두 흰 옷을 입었을지언정, 누가 더 하얗거나 누가 더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었느냐로 구분하고 뿌듯함과 경쟁심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한국인의 무난함과 극치스러움의 아이러니에 머리가 아파온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모든게 용서되는 마법의 문장이라기 보다, 피해갈 수 없는 삶의 역치와도 같은 역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문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나기엔 내 능력이 부족한가? 아니면 한국을 사랑하기에 떠나고 싶지 않아하나.
한국에서 살지 못하기에 떠나고 싶어하나? 내가 원하는 한국이 아니기에 떠나고 싶어하나.
그래도 고국이라는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기반에서 어떠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혼란이 와도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젠 그 뿌리조차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계속 사회는 혼란스러워 질 것이다. 나는 중고 물건을 판매하는 한 앱에서 고무나무 모묙을 사왔다. 언젠가 이 나무가 내가 사는 원룸이 아닌, 나의 작은 정원에서 뿌리내려 나의 후손이 이를 관조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