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기에 있는 한국 코미디 영화(드라마)
어려서는 코미디에 관심이 없었는데, 다 커서 <더 오피스>를 보고 블랙코미디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코미디 영화는 분명히, 진보했다
기성세대(~70년대생)가 만든 한국 코미디 영화는, 대가족이나 폭력조직, 학교, 회사 등 전통적 위계조직 속에서 시달리던 ‘아랫것들’의 푸념과 이벤트처럼 벌어졌던 하극상을 주된 재미 요소로 삼아왔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선, 이 같은 개그의 타율이 점차 떨어졌다. <개그콘서트>의 쇠락과 김은숙 표 로맨틱 코미디의 흥행 실패가 그 중 눈에 띄는 징후였다.
이후, 이우정 신원호 콤비의 ‘응답하라’ 시리즈가 주류 코미디의 자리를 대신했다. 한편, 여성 서사 콘텐츠의 증가와 함께 라미란의 <정직한 후보>가 흥행했다. 이제, 여성도 코미디의 원탑 주연이 될 수 있었다. 이병헌 감독의 <극한직업>과 마동석은 조폭 코미디의 마초성을 비교적 ‘순한 맛’으로 계승했다.
‘미국식 코미디’로 뭉뚱그려졌던 블랙 유머가 다양해지기도 했다. ‘하이킥’ 김병욱, 봉준호, 박찬욱, 이경미 이후의 새 세대가 라이징 됐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윤성호, <LTNS> 전고운 등의 젊은 감독들의 여성 캐릭터들은 언제나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 때로는 '음담패설'을 뱉는 '변태'를 자처하기도 하며 통쾌함을 줬다. 또한, 정석적인 대본 구조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균형감 있게 인물 군상을 잘 보여주는 연출도 적당했다. <완벽한 타인>과 같은 연극 원작 영화나 홍상수 감독 작품에서나 볼 수 있었던 원테이크 대화 장면이 상업 영화나 드라마에 도입되기도 했다. <더 글로리> 이후로, 드라마 홍보에서도 대화 장면 하나만을 숏폼으로 제작한 예고편이 급증했다. 이전에는 임성한이나 김은숙 작가 특유의 강점이었던 부조리하고 자극적인 대사 스타일도 많아졌다. 김은숙 작가는 <더 글로리>를 통해 로맨틱 코미디의 색을 빼고, 원색적이고 폭력적인 대사와 블랙 유머의 꽃을 피웠다. <스카이캐슬>의 흥행과 함께, <피라미드 게임>처럼 ‘가해자인 여성’의 모습을 그리는 장르물의 물꼬를 텄다. '로코' 드라마 중에선 <런 온>을 시작으로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솔직하게 속내를 겉으로 중얼대는 여성 캐릭터가 늘었다. 전형적인 남녀 성역할을 전환시킨 설정이나, '뒤떨어지는 성인지 감수성'을 짚어주면서 통쾌함을 유발하는 대사도 많아졌다. 한국의 코미디는 분명히 진보했다.
- <더 글로리> 넷플릭스 예고편
https://youtu.be/rvcAx5QOm84?feature=shared
하지만 예능과 다큐, 밈(텍스트) 사이에서 특색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대의 코미디 영화/드라마가 스케치 코미디나 연애 버라이어티, 유튜브 토크 예능만큼 소비자에게 소구 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경쟁력이 부족한 이유는, ‘극영화’만의 특색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숏박스’만큼 디테일한가? <환승연애> 수준의 치정극을 만들어내는가? <핑계고>만큼 대사량이 많은가? <지구오락실>만큼 ‘힙’한가? 유튜버들의 브이로그만큼 밈의 맥락을 잘 이해한 채 구사하는가? 사이버 렉카나 우익 유튜버만큼 주관이 확실하고 한 사안에 몰입해 있는가? 어느 항목에서도 경쟁력 있지 못하다. 내가 추측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다른 매체보다 새 세대의 유입이 늦다. ‘채널 십오야’에서는 90년대생 PD들이 메인으로 코너를 맡아서 콘텐츠를 제작한다. ‘숏박스’의 세 멤버는 각각 89, 90, 96년생이다. Z세대 유튜버들은 굳이 꼽지 않아도, 만연해있다. 드라마 혹은 영화계에서,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자신의 오리지널 기획으로 장편 데뷔하는 것은 희귀한 사건이다. 22년부터 24년까지 장편 영화로 데뷔한 감독의 평균 연령은 39세다. 독립 영화를 제외하고 23년과 24년에 개봉한 코미디 영화 감독들을 살펴보면, 22명의 감독 중 21명이 39세 이상이다. 그러니 현업 작가나 감독들이 밈을 당사자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없고, 청년 문제 또한 그 징후를 포착하기보다 ‘아이템’의 측면에서 사후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웹툰이나 소설의 IP를 가져오더라도, 대본 작가나 연출자의 세대가 원작자와 다를 경우에 그 시의성을 잘 강조할 수 없다.
한편, 산업 내 종사자 수는 35,375명 규모로, 30대 이하가 64.9%로 나타나 청년층의 활동이 활발한 분야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직무별로는 ‘제작·개발’ 인력이 전체의 41.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영업·마케팅(24.7%)’, ‘디자인(13.9%)’ 등이 뒤를 이었다.
(출처: 2023년 디지털크리에이터미디어산업 실태조사)
둘째로, 스탠드업 코미디, 숏폼의 형식을 흉내 낸다.
고민 없이 대사에 인용된 밈은, 몰입을 방해한다. 코미디 영화/드라마의 대사 중 기존의 밈을 인용하는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밈이란, 대개 밈 생산자가 일상 속에서 겪은 일이나 보았던 콘텐츠를 패러디하는 텍스트일 것이다. 유튜브나 네이버 웹툰, 기사 댓글처럼 말이다. 크게 보면, ‘리액션 비디오’, ‘영화 리뷰 콘텐츠’과 같은 2차 창작물과 그 생산 과정이 유사하다. 그래서, 영화/드라마 안에서 기존의 밈이 활용될 때 상황에 대한 몰입도가 깨지기 쉽다.
이는, ‘유체이탈(과도한 자기객관화)하여 자신이 빠진 상황을 자조하는 주인공’이라는, 부수적인 부작용도 발생시킨다. 우디 앨런이나 찰리 카우프먼 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종일 내적으로 갈등하고 그걸 입 밖으로 중계하는 주인공 말이다. 한국 영화 속에서, 엘리트 계층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20세기 미국 희곡에나 등장할 것 같은 자조적 개그를 해댄다. 숏폼 형식으로 편집된 스탠드업 코미디를 연거푸 이어 관람하는 느낌이다. 거기에 호응하는 관객들은 몇몇 대사의 ‘텍스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지, 설레는 마음으로 작품 관람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서바이벌에 참여 중인 인물들 간에 콘텐츠 창작에 대한 고민이 오가는 <디 에이트 쇼>, <동조자>, 최근 <미키17>까지 공통적으로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미키17> 속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별 반전’된 19금 개그는 설레거나 통쾌하긴 커녕 과하게 느껴졌으며, ‘개구리 실험’ 등 한국적인 개그는 황당했다. 그런 와중에 시나리오의 구성은 무너져있었다. 전개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자잘한 사건과 기발한 컨셉은 많았으나 스토리의 주된 줄기가 없었으며, 감정 이입도 불가능했다.
셋째로, 기존 작법을 벗어나는 시나리오는 제대로 모니터링되지 못한다.
위의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시나리오 개발 시스템이 더욱 보충돼야 할 것이다. 집필을 공동으로 할 필요는 없다. 사전 취재와 모니터링이 공동집필보다 더욱 중요하다. 사전 취재에 있어, 소재에 대한 집필 작가의 이해도를 제작사 차원에서 측정해야 한다. 본격적인 집필 과정에서는, 기존의 작법에 익숙한 기획PD에 더해, 젊은 세대 영화 평론가, 대사만으로 끌어가는 연극에 익숙한 드라마터그, 영화에서 다루는 소재의 당사자 등이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하면 좋을 것이다. 시나리오 모니터링의 기준도 개정해야 한다. ‘로버트 맥키’식 구성이 아닌 시나리오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