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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a Feb 12. 2023

푸른 침실로 가는 길
           

-모리스 위트릴로와 인터뷰-


                                                  푸른 침실로 가는 길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와 인터뷰-          

                              

                     

인터뷰이(interviewee):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     

                1883년 12월 26일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출생.   

                1955년 11월 5일 프랑스 아키텐 닥스에서 사망.

                1928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상.                        

                몽마르트르를 대표하는 다작으로 알려진 화가.

                근현대 미술 사조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고독한 정서를 화폭에 담았음

                중년에 이르러 알코올중독을 극복하여 치유와 영성의 길을 걸었음.                                

                                       

인터뷰어(intervieweer):   시아(심상 시치료사) 

 

                                    

                                      

                                                

  초청장이 왔다. 푸른 하늘빛 표지였는데 만져보니 구름이었다. 적혀있는 글씨가 워낙 선명해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초대 이유는 당신이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초대에 응하고자 하면,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열 번만 하면 됩니다.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  



  이 초청장은 간직할 수도 없었다. 완벽한 구름이었으므로. 읽자마자 초청장은 순식간에 하늘로 올라갔다. 시치미를 떼고는 양떼구름 마지막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다. 나는 단박에 달려들지 않았다. 먼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부터 해야 했다. 기록을 세우는 경주선수처럼 가슴이 뛰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초청장을 떠올리면, 이상 증상이 나타나 일상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부러 초청장을 은밀한 마음 안쪽에다 밀어 두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다가 해를 넘기고 말았다. 초청에 답이 없으니, 이만저만한 실례가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어 올랐다. 뽀얀 눈들이 녹아 얼룩덜룩한 세상이 되던 날, 나는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시작했다.     

     

  무수한 계단 중간쯤에 걸터앉아 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자가 치맛자락을 잡은 채 내 옆을 지나갔다. 계단 아래에 희멀건 외눈을 드러내놓은 가로등을 보았다. 그때였다. 구둣발 소리가 들리더니 내 등 뒤에서 멈췄다.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내 오른쪽 옆에 그가 앉아버린 것이다.  

    

  -위트릴로: 반갑소. 제대로 찾아왔구려.(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시아: (위트릴로의 손을 잡으며) 반갑습니다. 선생님. 정말, 이렇게 만나게 되었군요!

  -위트릴로: 당신을 잘 알고 있소. 내 이름을 그토록 간절하게 부르며 글을 쓴 사람은 당신이 유일하오. 

  -시아: 2003년부터였어요. 이백 편 가까운 편지를 썼지요. 넋두리일 뿐인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위트릴로: 당신이 이름을 붙인 ‘푸른 침실로 가는 길’은 내 어머니 수잔 발라동이 그린 ‘푸른 침실’에서 따온 거라고 바로 알아봤다오. 그거, 참 잔망스럽구나 싶었소. 

  -시아: 허락도 받지 않고 제목을 따와서 송구스럽습니다. 

  -위트릴로: 아니오. 오히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오. 그래, 뭐가 그렇게 궁금하셨소? 그렇게 수년 동안 나를 불렀던 이유를 마음껏 말해보시오.


  -시아: 이미, 알고 계실 거라고 여겨지지만, 그렇더라도 몇 가지 여쭈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치명적인 병인 알코올 중독을 어떻게 이겨내셨던 건가요? 행하셨던 그림 작업과 정신적 문제는 어떤 연관을 가졌던 건가요?

  -위트릴로: 아주 어릴 때부터 나를 따라다닌 것은 ‘불안’이었소. 나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태어났고, 자라왔소. ‘위트릴로’라는 성을 준 이는 스페인의 미술평론가인 미구엘 위트릴로이지만, 그분은 내 아버지가 아니오. 어머니를 가엾게 여겨서 성을 빌려준 것에 불과했소. 어머니한테 아버지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소. 어머니조차 내 친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게 치명적이었다고 둘러대지 않겠소. 내 불안의 진원지는 내가 사생아라는 것, 화가들의 모델을 하며 늘 술에 찌들려 있던 어머니, 나를 돌봐주긴 했지만 동시에 무척 귀찮아했던 외할머니도 아니었소. 나는 불안한 채 잉태되었고, 불안이라는 양수를 마시며 태아 시절을 보내다가 불안한 채 자라났소. 원인도 이유도 없는 그냥 불안 말이오. 그게 늪과 같아서 나를 암흑 속으로 끌어들이더란 말이지. 그 암흑은 바닥도 없소. 끝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소. 그걸 술로 달랬소. 술이 아니면 잠시도 버틸 수 없었지요. 술을 마시면 그나마 새끼줄이라도 잡는 듯했거든.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소. 술은 썩은 줄이었고, 나는 곡예사처럼 대롱대롱 매달리다가 언젠가 내 어머니가 나를 낳기 전에 그랬듯이 줄을 놓치고 떨어지고 말았소. 그림은 또 다른 줄이었소. 파리의 쌍탄느 정신병원에 주로 입원을 했었소. 물론 강제 입원이었지. 어머니는 내가 죽을까 봐 겁이 났던 거요. 한번은 면회를 오셨던 어머니의 손에 붓과 물감이 들려 있었소.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거짓된 맹세나 잔소리 대신 우리는 그림으로 소통하기 시작했소. 그렇소. 어머니는 내 그림의 스승인 셈이요. 

  -시아: 그 당시 어머니도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거지요? 


  -위트릴로: 어머니는 타고난 예술가였소. 어머니도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소. 아주 가난한 세탁부가 난 사생아였소. 아홉 살 무렵부터 어머니는 그림을 그려왔었지. 안 해본 일이 없을 만큼 갖가지 허드렛일을 했더랬지. 서커스 일을 하다가 공중그네에서 떨어진 후로는 주로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소. 내가 툴루즈 로트렉의 아들일 지도 모른다고 항간에서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어머니는 거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소. 에드가 드가 양반은 참 고마우신 분이셨소. 어머니의 작품을 직접 구매까지 하면서 격려했다오. 나와 외할머니가 주로 모델이 되곤 했소. 어머니의 독특한 보헤미안 스타일의 그림이 각광을 받게 되고, 어머니는 꽤 알려진 화가가 되셨소. 나는 그런 어머니를 존경했지만 동시에 증오했소.

  -시아: 그래서 오랫동안 알코올중독자로 살아갔던 건가요?

 

 -위트릴로: 그 애증의 문제도 한몫하긴 하지만, 사생아로 태어난 것을 원인으로 들지 않는 것처럼 그것만으로도 볼 수 없소. 여러 방향으로 파편처럼 튀어 나간 불안이라고 하면 조금은 맞을지도 모르겠소. 아까, 두 번째 질문이 내 그림 작업과 정신적 문제를 연관해서 물어봤던 것 같은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러하오. 술은 썩은 새끼줄이었고, 그림은 내게 구원의 줄이었소. 그림을 그릴 때만 나는 살아있는 것 같았지. 내 그림을 칭찬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기쁨 그 자체였소. 구석지고 곰팡이 나는 골방에서 나와 따뜻한 햇볕을 쬐는 기분이었소. 그러니,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가 없었지. 내 그림 속 몽마니! 몽마르뜨, 세느강변의 풍광들이 들려주는 노랫소리를 사람들은 좋아했소. 나는 그들이 눈빛을 빛내며 내 그림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즐거웠소. 어릴 때부터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는 것만 같았지. 

 

  -시아: 선생님은 몽마니 시절에는 파리 교외의 풍광을 주로 그렸고, 일 년간 인상파 시절을 거쳤지요. 그때는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와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서른 살이 되던 무렵에는 흰색을 주로 썼던 백색 시기로 넘어오셨지요. 석고와 접착제를 혼합해서 회색과 장미색으로 설경을 그리거나 크림빛을 띤 흰벽을 주로 그리곤 하셨지요. 독특하게도 흰 물감에 모래나 석회를 섞어서 그렸는데, 아마도 길바닥이나 건물 벽의 느낌을 송두리째 담아내고 싶어서 그러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뒤에 이어진 색채 시대 때는 광택이 나는 색채를 주로 쓰면서 녹색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트릴로: 그렇소. 1912년에 코르시카 여행을 다녀온 뒤로 색채를 선명하게 쓰기 시작했소. 해맑고 푸른 하늘과 바다. 구김살이 없는 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지중해 기후. 그걸 담아냈던 거요. 1921년에는 어머니와 함께 2인전을 열었는데 엄청났소. 돈도 명예도 부러울 게 없을 정도였지. 만월이 된 달의 모습이었소. 그다음에는 짐작하다시피 달이 이울어지기 시작했소. 이름은 알려졌고, 끊임없이 그림은 그렸는데 그다지 평판이 좋지 못했소. 뭐라더라. 내 그림에 긴장이 사라졌고 서정이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건 그렇고, 첫 번째 질문이 뭐였더라?

  

  -시아: 알코올 중독을 어떻게 이겨내셨는지 여쭈어보았습니다. 

  -위트릴로: 아, 맞다. 그 질문이었지. 이거야 원. 화가한테 그림 얘기보다 치유 얘길 먼저 묻다니, 당신도 참 독특하오. 과연 심리치료사다운 질문이오. 나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서명을 남길 때 어머니의 이니셜을 뜻하는 ‘브이(V)’를 덧붙이곤 했지. 1923년에 디아길레프의 발레 ‘바라바오’ 무대 장식을 제작했을 때도 서명에 ‘모리스 발라동’이라고 남기기도 했소. 어머니는 무시스(Moussis)와 결혼 생활을 했던 18년의 대부분인 13년간을 내 친구인 앙드레 위터(André Utter)와 바람을 피웠지. 어머니가 얌전하게 결혼 생활을 할 리가 없었던 거요. 내 나이 열 살 때 작곡가 에릭 사티와 같이 지냈을 때만 해도 나는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지. 에릭 사티가 키우던 개를 죽여서 상자에 담아 그에게 보여주기도 할 정도였으니 말이오. 그런데 이번에는 고작 23살인 내 친구 화가라. 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 술을 마셔댔지. 압셍트가 내 심장과 허파를 쓰다듬으면 나는 울었어. 꺼이꺼이 소리 내어 흐느끼곤 했소. 그 어머니가 결혼을 끝내고 위터와 다시 결혼하고, 이십 년 후가 된 어느 날에는 바람을 피운 위터를 보내시더군. 어머니는 이미 고희를 앞둔 나이였고, 그즈음 나는 한 여자를 만났소. 

  -시아: 벨기에 출신의 작품 수집가 뤼시 발로르군요.

  -위트릴로: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소. 덕분에 나는 어릴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곤했던 교회, 향수에 젖어 그림으로만 남겼던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되었소. 1935년에는 그녀와 결혼을 했고, 어머니는 38년에 판란만장한 삶의 막을 내렸소. 어머니의 그림 ‘푸른 침실’에서 어딘가를 응시하던 여자, 내 가엾은 어머니는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소리를 들었던 게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 그렇소. 나는 어머니가 계신 푸른 침실의 문을 두드렸소. 그 문 앞까지 가는데 쉰두 해나 걸린 셈이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았소. 아니, 술을 마실 수가 없었소. 마음은 평온하고, 오래 묵혀두었던 불안은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말았거든. 그건 기적인데, 아무도 믿지 않을 거요.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시아: 그건 기적이 맞아요. 그 기적을 불러일으킨 것도 바로 선생님 자신이고요. 

  -위트릴로: 아니오. 그건 맞지 않아요. 나는 기적을 꿈꾼 적이 없었소. 그 반대로만 갔지. 내가 올바른 정신으로 산 것은 내 삶의 백 분의 일도 안 될 것이오. 


  -시아: 프란시스 카르코(Francis Carco)가 쓴 ‘위트릴로 평전’에는 술집에 가면 틀림없이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고 적혀있을 정도였지요. 술집 카운터 옆이나 고주망태가 되어 술집 앞 시궁창에 드러누운 채 욕을 내뱉는 선생님을 묘사했지요. 

  -위트릴로: 그러니, 나는 슬펐고 외로웠고 고달팠소. 오죽하면 모딜리아니와 나를 두고 저주받은 화가라고 했겠소. 나는 기적 따위는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았소. 다만, 그림을 그리고 그것도 술값을 마련하기 안성맞춤이어서, 사람들이 칭찬에 우쭐해져서 그렸을 뿐이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진탕 술을 마셨지만, 어느 순간에는 붓을 들고 교회를 그리고 있더란 거요. 

  -시아: 백색 시대 때의 걸작 ‘두유마을의 교회’에서는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소프라노 아리아인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의 선율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위트릴로: 그것 참, 절묘한 말씀이군요. 그렇소. 나는 늘 울었고, 꿈도 우는 꿈을 꾸었을 성싶소. 어릴 때는 울음을 삼키며 멍만 들곤 했는데, 커서는 숨 쉴 때마다 울었소. 


  -시아: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곳, ‘코탱의 골목’의 이 수많은 계단을 올라가는 선생님을 떠올렸습니다. 열 살 된 아이가 양어깨에 물지게를 지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지요. 밤새껏 술을 마시고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는 어린 엄마의 얼굴을 씻길 물을 길어가는 아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물이 쏟아지고, 계단의 절반쯤에는 양동이의 물도 절반밖에 남지 않았지요. 아이의 걸음은 위태롭고, 울 겨를도 없을 만큼 비탄의 시간이 찾아오고. 산사나무의 뾰족한 가시가 하늘을 찔러대는 오월의 아이를 생각했습니다. 

  -위트릴로: 당신이 2010년에 쓴 시, 내 그림 제목과 같은 ‘코탱의 골목’이라는 시를 나도 봤었소. 최근에 당신이 가르치던 학생 중 한 명이 정말 위트릴로가 그 시를 지었냐며 묻는 것도 들었소. 그러니, 이 코탱의 골목 어귀, 바로 이 층계참에서 이렇게 만나는 것이 우연이 아니오. 

  -시아: 혼란의 순간에도 교회 그림을 그리셨던 것이 바로 기적을 꿈꾸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위트릴로: 그래요. 그 집요한 물음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겠소. 나를 파괴하면서도 동시에 나를 살리고 싶었던 게 맞소. 그런데 생각해보시오. 이 고주망태 술꾼이 어떻게 기도를 하며 구원을 받을 수 있겠소? 그러니, 다만 은총이오.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의 은혜요. 그것이 바로 기적이오. 

  -시아: 그 은총이 불안을 가시게 하고 평강이 흘러넘치게 한 거군요. 

  -위트릴로: 그렇소. 나는 어머니가 사망한 38년 이후부터는 매일 같이 교회에서 기도하며 지냈소. 눈물은 더 이상 슬픔과 아픔을 잉태하고 있지 않았소. 그 눈물은 회한이 가득했지만, 용서를 청하고, 용서받는 눈물, 감사와 구원의 눈물이었소. 


  -시아: 그것 또한 기적입니다. 기적이 일상화되는 놀라운 치유의 경험을 매일 하셨군요. 그래서 오래전부터 선생님을 불렀던 거예요.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극복하고 평강을 되찾은 선생님이 했던 비결을 저도 닮고 싶어서요. 저는 경계성 인격장애로 성찰을 전혀 하지 않는 어머니와 거의 평생을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많이 괴로웠고, 아팠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을 부르면서 편지를 쓰면서 마음을 추슬렀지요. 

  -위트릴로: 당신은 잘 해냈소. 앞으로는 더욱 순조로울 거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함께 잘 해낼 거라는 것도 알고 있소. 염려 말아요. 그동안 수고 많았소.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을 때 그 순간이 올 것이오. 

  -시아: 선생님이 가신 ‘용서’와 ‘화해’의 길, ‘푸른 침실로 가는 길’을 저도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제목으로 자전적 소설을 썼지요. 아무도 그 책을 읽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 책을 세상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위트릴로: 그 책은 이미 당신의 손을 떠났소. 순리대로 맡기면 됩니다. 나는 당신이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것도 알고 있소. 염려 말아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신의 섭리대로 일어날 것이오. 


  -시아: 저는 선생님을 ‘용서의 힘을 발휘한 화가’라고 일컫고 싶습니다. 알코올 중독에서 이겨낸 것은 결국 어머니를 용서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위트릴로: 그것, 참. 몸 둘 바 모르게 하는 칭호요. 내가 어머니를 용서했다고? 아니오. 용서와 화해는 맞지만, 나는 나를 용서했을 뿐이고, 나와 화해했을 뿐이오. 나를 껴안고 나를 쓰다듬었을 뿐이오. 과거에는 나를 저주하고 공격했거든. 마음의 눈을 떠보니, 내가 쏘아댄 화살에 박혀서 피를 흘리고 있는 나를 바라보게 된 거요. 나를 용서했는데, 어느 틈엔가 보니 어머니를 안고 있더란 말요. 

  -시아: 제가 어머니에 대한 용서라고 했지만, 결국은 ‘용서의 힘’을 드러내신 것은 맞는 말 같습니다.

  -위트릴로: 그 ‘치유’니, ‘힘’이니 하는 말은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오. 하지만 당신의 직업을 감안해서 이해할 테니, 그렇다고 합시다. 

  -시아: 감사드립니다. 내친김에 질문을 더해도 될는지요? 그림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만. 

  -위트릴로: (미소를 살며시 머금고 고개를 끄덕임)

  -시아: 살아가면서 ‘용서’가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분명 머리로는 용서해야 내가 편해질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아서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따지고 싶고, 상대방을 돌려세워 놓고만 싶고, 답답합니다. 그런 행동, 가치관, 태도를 수정하라고 요구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분명, 그런 시도는 통하지 않을 것이고 상대를 안 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기지만, 그동안 쌓아온 세월과 인연을 볼 때 관계를 끊는 것은 아닐 것 같기도 합니다. 최근에 든 갈등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위트릴로: 당신이 심리 치료사이면서도 갈등에 빠질 때가 있다는 거요? 

  -시아: 맞습니다. 치료사 역시 인간일 뿐입니다. 저는 제 성향상 예민하고 민감해서 대인 감수성 또한 섬세하게 느끼기도 합니다.  

  -위트릴로: 거, 참. 내가 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한 마디 해보겠소. 닫힌 가슴이 작동되도록 버튼을 눌러 보시오. 가슴 작동 버튼은 입에 있소. 나를 따라 해보시겠소? 이렇게 말해보시오. “모든 것이 전부 다 감사합니다. 고통과 아픔까지도 감사합니다.”

  -시아: 모든 것이 전부 다 감사합니다. 고통과 아픔까지도 감사합니다. 이러면 됐나요?

  -위트릴로: 그러면 됐소. 이 말을 계속 반복해보시오. 가슴이 작동되고, 마음에는 꽃이 필 것이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물러나게 되지요.

  -시아: “모든 것이 전부 다 감사합니다. 고통과 아픔까지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위트릴로: 마음에 꽃이 피면 향기가 나고, 향기를 따라 향기로운 것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오. ‘감사’는 신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고백하는 말이오. ‘감사’는 겸손의 또 다른 표현이오. 그러니, 모든 것들은 또 지나가고 흘러갈 것이오.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 가사의 가장 마지막은 ‘자유’로 끝난다오.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는 성경 구절을 기억하면 좋겠소. ‘감사’는 진리를 불러일으키니까요. ‘감사’는 마음의 눈을 뜨게 하지요. 

  -시아: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하겠습니다. 온갖 일상에 감사드리겠습니다. 배신과 갈등, 오해와 반목 또한 ‘감사하고’ 보겠습니다. 


  -위트릴로: 나는 55년 11월 5일, 프랑스 닥스의 호텔 스플렌디드에서 폐충혈로 죽었소. 그런데 보시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당신을 만나고 있지 않소. 참, 감사하게도 말이오. 죽음이 끝이 아니란 사실을 보시오. 이렇게 증명하고 있지 않소. 모든 일상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단 말이오.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강력한 섭리의 끈으로 이어져 있소. 우리가 알고 있으나 모르거나 간에.

  -시아: 이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선생님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위트릴로: 이미, 지금, 이렇게 일어나고 있지 않소. 더군다나 프랑스인인 내가 유창하게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렇소. 삶은 죄다 기적이오. 매 순간 기적이 반짝거리고 있소. 

  -시아: 여기 좀 보세요. 계단 위로 냅다 뛰어 올라가는 열 살 아이가 있군요. (일어서서 오른쪽을 손을 가리키며) 저기 좀 보세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 올라가는 술에 취한 이십 대 청년이 있군요. 아니, 저 사람은 팔레트와 이젤을 들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 올라가고 있어요. 아아, 저 사람은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따라 걸어 올라가고 있군요. 놀라워요. 모두 선생님이군요. 선생님의 여러 생애의 모습이 한꺼번에 등장하고 있어요. 

  -위트릴로: 맞소. 나는 이미 죽었고, 또 이렇게 살아있소. 당신이 보다시피. 그러니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맞는 것 같지만, 또 아니기도 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거요.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치유의 길이오.


  -시아: ‘치유’라는 단어를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이 이곳에서 어떻게 살고 계신지 여쭤보아도 될는지요?

  -위트릴로: 여기에서의 삶은 눈부시게 아름답소. 지상에서 느꼈던 감각들이 백 배나 더 선명해지기에 그림 그리기에 더할 나위 없을 정도요. 이곳에서 내 어머니와 자주 담소를 나누곤 한다오. 어제는 어머니가 ‘아비뇽 다리 위에서’를 부르면서 춤을 추지 뭐요. 어머니는 술 대신 레몬차를 즐겨 마신다오. 지상에서 못 듣던 이 말을 자주 하신다오. “사랑한다. 아들아.”

  -시아: 행복한 나날이군요.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감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사랑합니다. 위트릴로. 

  -위트릴로: 사랑합니다. 시아. 우리는 오래전부터 하나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러니, 자주 만나게 될 거요. 이 세계는 놀랍게도 모든 것이 하나로 되어 있다오. 

  -시아: 덕분에 제 마음에 평강의 강물이 다시 흐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위트릴로는 두 눈을 찡긋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가만히 잡고는 내 눈 위로 끌어다가 올렸다. 얼떨결에 위트릴로가 하는 대로 있으면서도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손을 재빨리 치웠다. 아뿔싸. 늦었다.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 하늘빛 꽃 한 송이가 있을 뿐이었다. ‘화해’라는 꽃말을 지닌 플럼바고였다.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했다. 지상으로 도착하는 순간까지 플럼바고 향기가 손끝을 타고 스며들고 있었다. 




-출처: 계간지 <미래시학> 202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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