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설은 ‘기억의 총’에 맞아서 쓸 수밖에 없어서 쓴 글이다. 지금, 라가 ‘기억의 총’이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이 놀라운 동시성이라니! 시의 제일 마지막 행인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한 단어를 적고, 그 이유를 적어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적어보라고 했다.
“죽음. 죽으려고 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다. 수면제를 왕창 한 번에 먹었다. 죽어야 했는데 죽지 않았다. 엄마가 미친년이라고 욕했다. 병원에 실려 가는 순간까지 욕했다. 생활비도 없는데 병원비가 든다고 나쁜 년이라고 또 욕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것이다. 엄마는 절대 변하지 않고, 나는 그런 엄마와 살아야 하니까 언제까지 이 감옥에 갇혀있어야 할까. 불과 일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정신병원에 석 달 동안 입원해 있었다. 병원에서는 더 있으라고 했지만, 엄마는 병원이 돈 벌려는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했다. 엄마는 나더러 고생을 안 해봐서 그렇다고 했다. 알바라도 해서 바쁘게 지내면 아무 이상이 없을 거라고도 했다. 엄마가 뭘 아는가? 엄마는 내가 죽어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다. 오히려 웃을지도 모른다. 귀찮은 존재가 사라졌으니.”
라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라의 기억은 내게 너무나 익숙하다. 강압적인 엄마, 사납고 포악한 엄마. 그런 엄마한테 벗어나지 못한 나. 그런 엄마를 매일 봐야 하는 삶. 대놓고 미워할 수도 없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순이 가득한 마음. 긍정의 반과 부정의 반이 들이찬 양가감정은 점점 내 삶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오죽하면 죽으려고 했을까? 그 어떤 위로도 들을 수 없었던 라. 급기야 정신과에 입원했던 라. 오히려 일하면서 바쁘게 살면 괜찮을 거라고 나를 밀어붙이는 엄마. 이 연결고리를 어떻게 하면 끊어낼 수 있을까?
일단, 제일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도도새를 소환해서 나를 만나야 한다. 단 한 번의 위로도 받지 못했던 나를 온전히 껴안아 줄 존재가 바로 도도새였다.
복식호흡을 통해 이완하도록 이끌었다. 눈을 감고 온전히 호흡에만 집중하자고 했다.
-선생님, 못 하겠어요. 지금은 잘 안 돼요.
라가 감은 눈을 별안간 뜨면서 말했다. 라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다른 때와 다른 것 같아요. 복식호흡을 하면 오히려 더 가빠지고 힘들어요. 뭔가 위에서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어요. 힘들어요.
나는 잠시 멈추고 대신 눈을 뜬 채 호흡해 보라고 했다.
-호흡을 잘 못하겠다고요! 숨이 자꾸만 가빠져요.
라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평소의 라 같지 않았다.
-선생님, 저, 더 이상 못하겠어요. 이거, 이런 방법으로 나을 게 아닌 것 같아요. 화가 나는데 화를 내리라는 거잖아요. 저는 화가 나요. 제가 왜 이런 우울증에 걸리고 엄마한테 늘 당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못하겠어요. 지금까지 무료로 해주신 것은 고맙지만, 이제 여기서 더 좋아질 것 같지 않아요.
라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다시 앉아보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선생님, 베풀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저한테 이 방법은 맞는 것 같지 않아요. 용서나 이해하는 단어는 폭력으로만 여겨져요. 엄마를 용서할 수 없어요. 호흡을 고르고 도도새를 불러서 위로하는 게 저한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요. 저를 거만하다고 욕하셔도 좋아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라는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단단히 아픈 곳을 건드린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이대로 라를 보낼 수가 없었다.
욕을 하라니? 난 욕할 줄 모른다. 단 한마디도 욕을 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그 지겨운 욕 덕분에 욕을 입에 담지 않게 되었다. 그것도 철저하게! 어머니를 용서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걸 하다니, 갑자기 도인이 되라는 말과도 같다. 그건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야 이뤄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천 계단을 뛰어넘어 그 경지에 도달하자는 게 아니다. 그 아픈 기억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 기억의 고리를 끊어낼 수는 없다. 다만, 기억의 부푼 몸집을 다루기 좋을 정도로 줄일 수는 있다. 그럴 때, 기억은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기억의 부피를 줄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맞부딪혀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안아주고 달래줘야 한다. 그럴 때 놀랍게도 아픈 기억은 가쁜 숨소리를 내지 않게 된다.
일어선 채 내 말을 듣고 있던 라가 살며시 자리에 앉았다. 표정은 일그러진 채였다.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라의 분노는 엄마한테 쏟아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렇게 속절없이 당해야 했던 자신한테도 퍼붓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낳고 기른 엄마한테. 그리고 원통한 나머지 불똥을 엉뚱한 데 튕기곤 했던 자신한테. 분노는 엄마와 자신을 오고 가며 덧칠하고 또 겹겹이 덧칠하고 있었다. 이 분노부터 어떻게든 처리해야만 했다.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덮어두면 안 된다. 터질 것은 터뜨려야 한다.
심한 거부감이 들 때, 이때가 바로 절호의 순간이었다. 깊숙이 묻어두었던 탓에 뭉쳤던 마음의 근육이 자극을 받게 되면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면, 근육은 늘 뭉쳐져 있고 상태는 더 심각해진다. 아예 움직이지 못하고 마비가 되면, 정신적인 이상 증상 속에 빠지게 된다. 한번 그렇게 되면, 헤어 나오기도 힘들다. 그 속에 자주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마음의 근육이 아프다는 것은 호전될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피하지 않고 직면해야 한다. 그 길밖에는 없다. 다만,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을 가늠하면서 신중하고 알맞게 접근해야 한다.
라한테 나를 믿고 따라와 달라고 했다. 이쯤에서 그만둔다면, 지금까지 해 온 것이 물거품이 될 게 뻔하다고 했다. 많이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함께 가면 목표지점이 보인다고도 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으라고 했다. 라의 가쁜 숨소리가 다소 줄어들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얼굴이 서서히 잠잠해지고 있었다. 천천히 복식호흡을 하자고 했다. 열 번 정도 그렇게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도록 했다. 라의 숨소리가 부드러워지고, 온몸이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뒤 세 번을 세면 눈을 뜨면 된다고 했다. 맞은편에 엄마가 계실 거라고 했다. 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세 번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엄마가 와 계시군요. 어떤 모습인지 보세요. 얼굴은, 헤어스타일은, 옷차림은 어떤가요?
내가 물었다.
-늘 입던 모습이에요. 헐렁한 티와 바지. 짧은 파마머리예요. 저를 노려봐요. 왜 불러냈냐는 식으로 말에요.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했다. 라는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없다는 거였다. 분명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말이 있을 거라고 하자, 라는 고개를 숙였다. 차마 하지 못했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해보자고 했다. 지금은 어떤 말이나 다 할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라고 했다. 라는 아예 고개를 가슴께로 떨군 채 가만히 있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이렇게만 말했다.
-할 말이 없어요. 하고 싶지도 않아요.
나는 라한테 일어나 보라고 했다. 엄마와 라가 앉은 자리의 중간에 서보도록 했다. 라는 중간 지점에 나와 나란히 섰다. 그렇게 중립의 자리에서 엄마와 라를 바라보게 했다. 엄마는 라를 노려보고 있고, 라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엄마는 당장이라도 욕을 쏟아낼 것만 같고, 라는 엄마의 발작이 또 시작될 것을 예상하며 진저리 내고 있다. 현실 속의 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떤 말이나 할 수 있고,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다. 지금의 이 공간과 시간은 현실 속에는 없는 새로운 것이다.
나는 라한테 라의 자리에 가서 의자 뒤에 서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라 옆에 나란히 섰다. 그냥 고함을 질러보자고 했다. 내가 먼저 할 테니 따라 해 보자고 했다. 나는 얍! 하고 기합을 넣듯 소리를 질렀다. 라는 선뜻 따라 하지 않았다. 라한테 다시 따라 하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간신히 라가 야! 라고 했지만, 내 목소리의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나는 소리쳤다. “야! 네가 그러고도 엄마야?” 라는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야! 하고 다시 소리쳤다. 아까의 세 배 정도 강도였다. 나는 다시 소리 질렀다. “야! 너는 엄마 같지도 않아! 엄마가 어떻게 그 모양이야!”라고 했고, 라는 다시 야! 라고 했는데, 점점 커진 목소리였다. 함께 다시, ‘야!’를 외쳐보자고 했다. 이번에는 라가 제법 큰 소리로 외쳤다. 내 말을 따라 해 보라고 했다. “엄마도 아니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왜 욕을 해? 왜 자식을 폭행해? 이 범죄자야!” 라가 이 말을 따라 했다. 이제 소리의 강도는 염려할 수준을 벗어났다. 나보다 훨씬 큰 목소리를 냈다. 엄마의 표정을 물어보니, 여전히 노려보고 있다고 했다.
나는 바타카를 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엄마 자리에 바타카를 원하는 대로 쳐보라고 했다.
-엄마를 어떻게 때려요?
라는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