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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a Mar 09. 2023

[호모룩스 이야기-5]'나는 신이다'를 만나다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을 만나다- 

      [호모룩스 이야기-5]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을 만나다                





                 

  인간은 얼마나 악할 수 있을까?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을 보는 내내 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냥 불편 정도가 아니라 환멸이 느껴진다. 인간이 가지는 집착과 욕망에 대해서 체머리를 흔들게 된다.   



   

  고성 상족암에 갔을 때였다. 오래전 그곳을 활보했던 존재의 흔적이 보였다. 바위 위에 물을 머금고 공룡 발자국들이 곳곳에 물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한쪽에는 크고 작은 돌탑들이 광대하게 늘어서 있었다. 복을 구하며 하나씩 돌을 쌓아 올렸을 무수한 인간들의 흔적이었다. 뻔하게도 합격과 취직과 결혼과 돈과 건강 따위를 기원했으리라. 2억 5천만 년 전,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후기에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공룡과 21세기의 인간은 묘하게도 어울리지 않았다. 공룡의 자취는 웅덩이가 되었지만, 인간의 욕망은 치솟아 오르는 돌탑이 되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멸절하고 나서는 무엇이 남게 될까?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제는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로 연결된다. 기독교복음선교회의 정명석과 오대양 사장이었던 박순자와 아가동산의 김기순,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의 행태가 낱낱이 취재된 이 실록 영상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들은 스스로 신이라고 했고, 추종자들은 그것을 사실로 믿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괜찮을 정도는 ‘사랑’이 아닌가. 교주를 열렬하게 사랑한 게 무슨 죄냐?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집단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박순자를 제외하고 세 명을 아직 추종하는 이들은 여전히 그럴 것이다. 내가 주고 싶어서 줬어. 내가 믿고 싶어서 믿은 거야. 그게 무슨 문제냐?                     


  우물 안의 개구리는 자신의 세계가 우물이라는 것을 모른다. 우물 밖을 구경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찬란한 햇빛과 광활한 풍광을 아무리 설명해도 코웃음을 친다. 밖을 다녀온 개구리는 더 이상 우물 안에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물을 지배하는 개구리한테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우물 밖 따위는 상상하지도 말 것이며, 우물 바깥을 말하는 이와는 아예 접촉을 차단하라는 엄명이 떨어질 것이다. 우물 밖을 향해 나가보자는 시도는 반역이고, 저주다. 대개 인조 후광을 비추게 해서 그럴싸한 지배 개구리한테 충성을 다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하면서 평생을 살다 가기 마련이다. 지배 개구리는 놀랍게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뱀이 되고 만다. 교활하고 악랄한 뱀은 개구리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야금야금 잡아 먹히던 어느 날, 놀랍게도 우물 안 개구리 하나가 처한 상황을 알아차리게 된다. 여기는 우물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자신의 욕망이 이곳으로 불러들였고 축축하고 눅눅한 기운이 그만 다리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그 개구리는 극도의 힘을 발휘해서 우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돌아와 지배 개구리와 우물 안의 참상을 고발했다. 그 개구리의 용감한 행위에 동의하는 이들이 마음을 합쳤다. 그렇게 탄생한 영상이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이다.      

  영화 제목은 모든 부조리를 상징하고 있다. ‘나는 신이다’라는 말을 한다면, 대개 정신이상자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물 안에서는 그 말이 절대적이었고, 신이라는 개구리의 말은 기정사실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그 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모든 이들을 복종시켰던 교주는 살아있는 신이다. 그런데 영상의 부제목인 ‘신이 배신한 사람들’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아는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축복하고 은혜를 베푼다. 죄를 사하여주고, 옳은 길로 안내한다. 그런데 영상 속의 살아있는 신은 그것과 정반대였다. 그 신이 결국 사람들을 배신한 것이다. 교묘하고 영악하게 신을 따르는 이들을 파멸로 이끌고 만 것이다. 이들의 수법은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신자들한테 특권의식을 심어주는 것, 갖가지 수단으로 신자들이 기꺼이 돈을 갖다 바치게 만들어서 돈을 갈취하는 것, 신자들의 몸으로 자신의 정욕을 채우지만, 신자들은 그것 또한 영광이라고 여기도록 세뇌 시키는 것.       


  이십 대 초반이던 때, 나는 사무치게 외로웠다.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 어느 누구한테도 위로와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밤거리를 헤매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왜 그렇게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짊어지고 계시나요?”

  그 말에 눈물이 툭하고 흘러내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쓰라린 사월의 밤이었다. 한적한 도시 한 귀퉁이에서 그의 말을 들었다.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이 내게 관심을 주고 있었다. 그게 고마워서 그가 가자는 대로 따라갔다. 거대한 궁궐이 나타났고, 그 안으로 나를 인도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연분홍 천으로 선녀 차림을 한 여자들이 커다란 제사상 앞에 기립해 있었다. 그 안, 쪽방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했다. 이윽고 한 여자가 들어와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괴로움은 조상을 잘 모시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조상한테 예를 잘 갖추면 근심이 사라진다고 했다. 내 근심은 돈이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그러니까 돈을 빌려서라도 제사를 지내면 돈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했다. 아무리 외로움에 온 마음이 강타당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혼란과 방황으로 살았던 시기였지만, 막연하게나마 내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신의 원리는 ‘돈’과 거리가 멀었다. 돈을 운운한다면, 신의 이름으로 장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빌릴 데도 없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일어섰다. 좋은 기회를 놓친 거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나는 그곳을 황황히 떠났다. 혹시나 강제로 막아서면 어쩌나 겁이 났지만, 다행히도 그러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어렸던 고등학생 때였다. 옆자리 친구는 공부를 썩 잘했다. 한번은 자신의 교회로 나를 초대했다. 들어서자마자 부드럽고 환한 미소들이 만발했다. 그곳은 십자가가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목사도 없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잘 알 수는 없었다. 백인 남자가 영어를 무료로 가르쳐준다며 계속 함께 가보자고 친구가 말했고, 나는 솔깃했다. 아마도 두어 번 더 그들의 모임에 따라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나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 이 교회에 대한 의혹이 갑자기 불붙듯 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거였다. 그 의문을 친구한테 말했더니, 직접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친구의 말대로 나는 의문점을 가득 안고, 교회를 다시 찾아갔다. 소개를 받아서 간 회의실에 세 명 정도가 앉아있었다. 이십 대 정도의 여자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교리에 밝은 게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에 갔지만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로 신앙생활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부모님 몰래 한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새신자반에서 내가 습득했던 것이 성경에 대한 지식의 다였다. 나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했고, 그중 한 여자가 답했다. 내 얄팍한 지식 어디에서 그런 힘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반박했다. 그것도 논리적이고 열렬하게!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던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내가 왜 우냐고 묻자, 그 여자는 이렇게 답했다.      

  “이다음에 죽어서 천국에 가면, 주님이 한 사람의 말에 제대로 답변을 잘하지 못했다며 나를 벌할 것 같아서 우는 거예요.”

  나는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황급하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 여자의 애절함에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겁이 없었다. 위축되고 초라해서 스스로 시궁창 쥐 같다고 여기던 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던 것일까.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한참 동안 그 사람은 혼자 지껄이고 나는 그저 듣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자신의 말을 들었으니 강의료로 먹을 것을 사달라고 했다. 또 다른 이는 단체에서 발간하는 소책자를 건네더니 돈을 달라고 했다. 그렇게 당하고 나서는 거리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거나 뭔가를 내밀면, 받지 않게 되었다.      


  “나는 신이다!”라고 고함을 지르던 이가 들 것에 실려서 입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 입원한 조울병 환자였다. 극심한 조증 증상이 도졌던 것이다. 신자들을 착취하며 호의호식하는 신이 된 교주들, 혹은 신의 이름을 팔면서 속사정으로 보자면, 자신이 신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을까? 끝간 데가 없다. 그것을 실험으로 밝힌 학자도 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짐바르도(P. G. Zimbardo)는 1971년에 스탠퍼드 감옥실험을 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자 인간은 점점 악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도중에 실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특정 상황이나 시스템에 따라 선량한 사람도 극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짐바르도는 이를 ‘루시퍼 이펙트(Lucifer Effect)’라고 했다.                     




  인간에게는 신의 속성이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하면, ‘영성’일 것이다. ‘빛의 운반자’라는 뜻을 지닌 ‘루시퍼’는 알려진 대로 원래는 천사였다. 그가 사탄의 대명사가 된 결정적인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오만으로 뒤엉킨 교만 때문이었다. 사람의 영혼에 악, 유혹, 탐욕이 판을 치게 될 때가 바로 루시퍼가 날개를 활짝 펴는 순간이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에서 등장하는 네 인물들도 처음에는 빛 안에서, 빛을 누리고 나누려고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교만이 끝 간 데 없이 치솟아 올라와 추악함을 드러내며 세상에 파문을 던진 것이다. 영상 속 인물들한테 던지려는 돌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나는 어떤가? 나는 어떻게 살아나가고 있나? 나는 어느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나? 영상은 이렇게 다름 아닌 내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닌 것을 박차고 나올 용기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지? 옳은 쪽으로 가기 위해 용단 있게 걸음을 옮길 수 있는지? 부디 이 질문들을 생애, 그 어떤 순간에도 놓치지 않기를! 나는 층층이 쌓는 돌탑 대신 기원의 샘물터를 마련했다.  





  * 호모 룩스(HOMO LUX)는 빛으로서의 인간을 일컫습니다라틴어로 인간이라는 호모(HOMO)’와 빛인 룩스(LUX)’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 ‘호모룩스 이야기는 치유와 결합한 시사와 심리예술과 문화에세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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