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짜증, 라거로 날리다
여름에 마시기 좋은 맥주 스타일은 무엇일까?
의심의 여지 없이, 단연코 라거다.
언제부턴가 공영방송에서도 중간 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내 익숙해졌고, 광고가 등장하는 시간대에 따라 노리는 타깃이 다르다는 것도 깨달았다.
예를 들어, 주말 오후. 그 시간대엔 어김없이 짜파게티나 피자, 치킨 광고가 튼다. 아무래도 집에서 가족끼리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겨냥한 전략일 것이다. ‘짜파게티 한 번 끓여볼까?’ 아니면 ‘치킨이나 시킬까?’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만드는.
그런 맥락에서 보면, 여름 저녁 시간에 빠지지 않는 광고는 단연 맥주 광고다.
오늘은 안 마셔야지, 다짐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순간. 광고 속 차가운 맥주캔에서 흐르는 물방울, 햇빛 아래 반짝이는 거품, '칙-' 하고 열리는 캔의 소리. 그 장면은 마치 “지금 마셔도 괜찮아, 너 오늘 고생했잖아”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냉장고에 준비해 둔 비상 맥주 한 캔을 꺼내는 일은, 어쩌면 계획된 충동이 아닐까. 그런 비상식량이 없을 땐 편의점까지 나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과연, 나만 그랬을까?
놀라운 것은, ‘맥주를 좋아한다’는 사람들 중 의외로 브랜드를 고집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이다. 소주는 다르다.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브랜드 취향이 뚜렷하다. ‘처음처럼’, ‘참이슬’, 그 안에서도 빨간 뚜껑, 파란 뚜껑, 심지어 특정 지역 생산분까지 따지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지인들과 고깃집에 갔는데, 한 테이블에서 4명이 전부 각기 다른 소주를 주문해 깜짝 놀랐다.
그에 비해 맥주는 그저 “시원한 거 한 잔 주세요” 하면 끝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원한 라거 한 잔.
그렇다면, 라거는 무엇일까. 왜 ‘시원한 맥주’ 하면 라거가 떠오를까?
라거는 저온에서 발효된 맥주다. ‘라거(lager)’라는 말 자체가 독일어 *‘저장하다’*에서 유래했듯, 차가운 온도에서 천천히 발효하고 숙성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맑고 깔끔한 맛은 라거만의 가장 큰 특징이다.
탄산감이 강하고, 홉의 향은 적절히 절제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청량한 인상을 준다. 마치 한여름 땡볕에 달궈진 몸에 얼음물을 붓는 느낌. 그래서 사람들은 라거를 “시원하다”라고 표현하고, “가볍게 마시기 좋다”라고 기억한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대기업 맥주는 거의 모두 라거다.
말하자면 ‘기본값’인 셈이다. 수제 맥주 붐이 일어난 이후 다양한 에일(Ale) 계열의 맥주들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대형마트나 편의점 진열대의 중심은 라거다.
에일은 주로 소규모 브루어리에서 만든다. 향과 맛이 풍부하지만, 대중성이나 유통 측면에서는 아직 한계가 있다. 가격 경쟁력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고, 유통망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에일이 라거보다 우월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여름에 마시기엔 라거만 한 맥주가 없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피로감과 라거의 관계
여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기분 좋은 햇살도 있지만, 쉽게 짜증나고, 가만히 있어도 불쾌지수가 올라간다.
장마철 습도는 몸과 마음을 눅눅하게 만들고, 열대야는 잠까지 앗아간다. 이럴 때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가볍고 청량한 무언가를 원하게 된다. 에어컨, 아이스 아메리카노, 수박… 그리고 라거 맥주.
맥주는 흥미롭게도 감정의 온도가 낮을 때보다 오히려 무덥고 지친 상태일수록 더 절실하게 찾게 되는 술이다.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았거나, 인생의 벽에 부딪혔을 때 마시는 술은 주로 소주나 양주처럼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이다. 그에 반해 맥주는 좀 더 명랑한 술이다. 축하할 때, 누군가의 성공을 기원할 때, 단합을 외칠 때 손에 들리는 건 대부분 맥주다.
게다가 맥주는 첫 목 넘김이 빠르다. "벌컥벌컥"이라는 의성어는 거의 맥주를 위해 존재하는 말 같기도 하다.
한여름 라거 한 잔의 위로
여름날 퇴근 후 집 앞 편의점에서 고른 라거 한 캔,
바닷가에서 삼겹살 구워 먹으며 함께 나누는 시원한 라거,
휴가 중 숙소 테라스에서 햇살을 받으며 홀짝이는 라거.
그 어떤 상황이든 라거는 어울린다.
가벼운 술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죄책감 없이 마실 수 있고, 맥주잔에 따르지 않고 캔 그대로 마셔도 충분히 맛있다. 입안에서 쏴- 퍼지는 탄산, 목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가는 청량감은 이 계절의 피로를 한순간 씻어내 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래, 오늘 하루도 잘 버텼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게 만든다.
결국, 여름엔 라거다.
맥주에 대해 알면 알수록 다른 스타일에도 흥미가 생기고, 향과 맛을 구분하게 된다.
하지만 맥주와의 첫 만남이 늘 그렇듯, 시작도 라거였고, 여름이면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도 라거다.
익숙하고 편안하며, 무엇보다 시원하다.
한 모금의 라거는 더운 여름날, 가장 작은 사치이자 확실한 위로다.
그리고 그 위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마침 오늘은 금요일이다. 오늘은 라거의 유혹을 모른 척 해도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