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라거 5종 테이스팅

카스부터 하이트까지, 5종 테이스팅

by AGING WELL

마트 냉장고 앞에서
“카스? 테라? 켈리?”
이런 고민은 이제 새롭지도 않다.

예전에는 그냥 카스 아니면 하이트였다.
이제는 라거만 놓고도 꽤나 복잡해졌다.
누구는 탄산이 세서 좋다 하고, 누구는 홉 향이 살아있다며 그게 또 제맛이라 말한다.

비어소믈리에들끼리 식사를 할 때도 시키는 맥주를 보면 정말 제각각이다.
회식이면 한 개 시켜도 나눠 마실 법도 한데, 각자 자기가 선호하는 맥주가 따로 있다.


진짜 그럴까?
정말 다를까?

그래서 조용한 여름 밤, 혼자 냉장고에서 다섯 캔을 꺼냈다.
한 병씩 잔에 따르고, 향을 맡고, 천천히 마셔봤다.
언뜻 비슷해 보여도, 마시는 순간, 꽤나 각자의 개성이 있다.



카스 – 말없이 시작을 여는 맥주


여전히 1등 맥주다.
가볍고, 맑고, 빠르다.
입 안에 닿자마자 톡 터지는 탄산, 머뭇거림 없이 넘어가는 목 넘김.
맛이랄 게 크게 없지만, 바로 그게 이 맥주의 미덕이다.
시작 전의 한 잔, 혹은 아무 생각 없이 마시고 싶은 날.
그럴 땐 역시 카스다.



테라 – 청량함 속에 살아있는 홉


테라는 탄산으로 말을 건다.
‘청정 라거’, ‘리얼 탄산’이라는 문구가 떠오르는데,
실제로 목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훨씬 더 청량하다.
그 청량함 안에서도 은근한 홉 향이 살아 있다.
바람 부는 날 야외 테라스에서 마시면
“이게 제일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듯한 맥주다.




켈리 – 단독으로 마시기에 가장 좋은 라거


켈리는 요즘 등장한 신인답게 말이 많다.
올몰트, 라거의 본질, 유럽 스타일...
설명은 복잡한데, 맛은 의외로 부드럽고 단정하다.
몰트 향이 살짝 올라오고, 거친 구석 없이 매끄럽다.
첫 느낌보다 두 번째, 세 번째 잔에서 더 매력적이다.
진득하게 ‘맥주 한 잔’ 마시고 싶을 때 어울린다.




한맥 – 조용하지만 익숙하게 균형 잡힌


한맥은 여전히 조용하다.
홍보도, 광고도, 특별한 수식어도 없다.
하지만 마셔보면 균형이 좋다.
홉의 허브 향이 짧게 스치고, 쓴맛과 단맛이 살짝 교차한다.
국산 홉을 썼다는데, 그래서인지 더 ‘익숙한’ 느낌이 든다.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는 느낌이 좋다.




하이트 – 부드러움은 잊히지 않는다


하이트는 묘하게 조용해진 맥주다.
한때는 카스와 양대산맥이었고, 그 부드러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목 넘김이 매끄럽고 깔끔하다.
탄산은 과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둥글다.
자극은 없지만, 그래서 오래 마시기 좋다.



폭탄주 문화 속 맥주의 존재감


한국 라거가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곳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고깃집이다.
특히 삼겹살과 함께하는 폭탄주는 대한민국 회식문화의 상징 같은 장면이다.


카스처럼(카스+처음처럼), 테슬라(테라+참이슬), 테진아(테라+진로) 같은 조합은
한국 라거가 '소주를 섞기 위한 맥주'로 여겨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때때로 한국 라거는 맥주 본연의 맛보다는

‘샤워 후에 들이키는 시원한 음료수’ 정도로 대접받는 것 같기도 하다.
가볍고, 톡 쏘고, 그냥 마시기 쉬운.


나는 비어소믈리에 교육을 받을 때, ‘한국 라거를 구분하라’는 과제를 받은 적이 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카스, 테라, 하이트를 마시고 어떤 맥주인지 맞히는 훈련이었는데
그 어떤 스타일보다도 어려웠다.

여러 잔을 동시에 따라 놓고 색과 거품, 향을 비교하면
“이건 테라 같다” 하고 말할 수 있었지만,

하나만 던져놓고 “이게 뭘까요?” 하면 입 안에서 헤매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그런 훈련을 하면서 내 입에는 어떤 국산 라거가 가장 잘 맞는지
조금씩 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KakaoTalk_20250805_104025357.jpg 한때는 식탁테이블도 아닌 책상 모니터 앞에서 시도때도 없이 이렇게 한국라거를 테이스팅하고 혼자 블라인드하고 그 미묘한 차이를 분별하려고 애쓴적이 있다.


예전에 술자리에서 내가 한국 라거를 블라인드 테이스팅하는 훈련을 한다고 말했더니,

직장 생활 20년 차인 한 지인이 “그건 나도 다 맞출 수 있어”라며 도전했다.
회식 자리에서 맥주를 수도 없이 마셔봤다는 자신감.

하지만 결과는, 한 잔도 못 맞췄다.

나는 그게 그가 맥주를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대부분을 폭탄주로 마셔왔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 맥주가 어떤 색이었는지, 향은 어땠는지,
심지어 어떤 맛이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 채,
쭉쭉 들이켜기만 했던 건 아닐까.

조금 씁쓸했다.



가끔 누가 “한국 맥주 중에 뭐가 제일 좋아요?” 하고 물으면
아직도 추천은 어렵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켈리를 좋아해요.”

올몰트에서 오는 약간의 묵직함, 그리고 입 안을 톡 치고 지나가는 탄산감이 나한텐 참 좋다.
단독으로 마셔도 ‘맥주다운’ 맛이 느껴지고, 폭탄주가 아닌 ‘맥주 한 잔’으로 가장 어울리는 느낌이 있다.

맥주에 특별한 이야기가 생긴다는 건 이런 순간들 덕분이다.




여름엔 라거, 그래도 조금 더 생각하고


이제는 라거를 고를 때 그냥 “제일 시원한 거 주세요”가 아니라
“오늘 나한테 어울리는 맥주는 뭘까” 그걸 한 번쯤 생각해봐도 좋겠다.

여름은 아직 한참 남았고, 시원한 맥주는 이 안에도, 그 안에도, 또 다른 잔 안에도 있으니까.


아, 그리고 전편에서도 말했듯이
한국 라거는 꼭 소비기한(유통기한)을 확인하고 구입하길 추천한다.
회전율이 높은 맥주라
운이 좋으면, 정말 공장에서 막 나온 듯한 신선한 맥주를 마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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