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버틴 나에게, 단 한 잔의 위로
한창 일할 때 일본 출장을 자주 갔었다.
일본어는 못했지만 시부야, 긴자 같은 번화가를 걷다 보면
식당이나 술집 앞에 걸린 맥주 사진들이 눈에 쉽게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유독 시선을 끌던 건, 거품이 꼭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또아리를 틀고 올라간 생맥주.
슬러시처럼 살얼음으로 올라간 거품이 인상적이었던 그 맥주는,
라거를 좋아하던 나에겐 매번 저항 불가능한 유혹이었다.
펍 앞에 그 사진이 보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 한두 잔 마시고 나오곤 했고,
그럴 때마다 “왜 한국엔 이런 맥주가 없지?” 하고 아쉬워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한국에서도 얼음잔 맥주를 내주는 가게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봤던 것처럼 거품이 예술적으로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맥주 자체가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그 맥주는 또다른 쾌감을 안겨줬다.
예전엔 그게 그렇게 맛있었고, 한 잔이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비어소믈리에가 된 이후로는, 그 얼음잔 맥주가 예전만큼 반갑지만은 않다.
물론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첫 잔으로는 여전히 훌륭하다.
그런데 두 번째 모금부터는, 시원함 이상의 무언가가 없어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입안에 남는 건 차가운 온도뿐. 맥주가 가진 고유의 향이나 질감, 여운은 금세 얼어붙어 버린다.
맥주의 온도가 너무 낮으면 향도 같이 닫힌다.
홉의 품종, 몰트의 캐릭터, 발효의 뉘앙스… 이 모든 걸 알아야 하는 사람이 된 이후부터는,
시원함 이상의 매력을 느끼기 어려워졌다.
너무 차가운 맥주는 그냥 시원한 탄산음료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내 입이 먼저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 그 한 잔의 시원함이 간절해질 때가 있다.
올여름처럼 유난히 뜨겁고, 유난히 버거운 여름이라면 더더욱.
거기에 아이들의 방학이 겹치니, 그 간절함은 더 깊어졌다.
드디어 개학이다!
아이들은 개학과 동시에 바뀐 학원 시간표에 적응하느라 분주했고,
나는 그날 하루만큼은 이 여름을 견뎌낸 나를 꼭 위로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엄마아빠 한 시간만 나갔다 올게, 너희 숙제하고 있어”라고 말하고,
남편과 집 근처 맥주집으로 향했다.
시간은 많지 않았고, 망설일 틈도 없었다.
“생맥주 두 잔 주세요!”
그렇게 눈앞에 등장한 맥주는, 거품이 슬러시처럼 얼어붙은 얼음잔 맥주였다.
한 모금 들이켰을 때, 정말 오랜만에 ‘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뇌부터 식도까지 시원함이 관통하고, 한 시간의 자유가 오롯이 그 한 잔에 녹아들었다.
참고로, 얼음잔 맥주와 얼음 맥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얼음잔 맥주는 맥주잔과 맥주 자체의 온도를 낮춰 라거의 시원함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라면,
얼음 맥주는 말 그대로 맥주에 얼음을 넣은 음료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콜라에 얼음을 넣으면 맛이 묽어지는 것처럼, 얼음 맥주는 결국 물탄 맥주일 뿐이다.
정말 어쩔 수 없을 때, 예를 들면 시원한 맥주가 없는데
당장 한 잔이 간절한 상황이라면 누군가는 얼음을 넣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맥주에 얼음을 넣어 마신 적은 없다.
만약 집에 시원한 맥주가 없다면
냉장고에서 차가워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편의점에 가서 시원한 걸 사오거나
그냥 차라리 마시지 않는다.
그 셋 중 하나다.
그런 나에게 작년 중국 항저우 여행에서의 경험은 꽤 충격적이었다.
아시안게임 직후, 도시 전체가 깔끔하게 정비된 항저우에서
우리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 중 하나인 곳에 머물렀다.
야경을 감상하며 맥주 한 잔 하자며 라운지로 향했고, 아무 의심 없이 맥주를 주문했는데
맥주잔 안에 얼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엔 잘못 가져온 줄 알았다.
그런데 직원은 당당했다.
이게 원래 이곳의 서빙 방식이라며 설명했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심으로 그 라운지 매니저를 불러 교육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 모금은 그냥 괜찮았다.
야경도 좋았고, 분위기도 그럴듯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그 맥주는 더 이상 맥주가 아니었다.
희미한 향, 흐릿한 질감, 물탄 듯한 맛.
세계적인 고급 호텔의 라운지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고,
동시에 ‘내가 정말 맥주를 진심으로 공부했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맥주는 기호식품이다.
누군가는 얼음잔 맥주를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고,
누군가는 맥주 스타일에 맞춰 온도를 조절해 마시는 게 진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내가 극도로 반대하는 ‘얼음 넣은 맥주’를 즐길지도 모른다.
괜찮다. 존중한다.
여름은 여전히 맥주의 계절이고, 시원한 맥주를 찾는 마음은 늘 같을 테니까.
다만 그 시원함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순간에 마시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오늘의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잔.
그걸 찾는 것도 맥주를 마시는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이제 곧 여름이 끝나간다.